14일
로이카페 메니저 부부와 강화로 이사온 분과 봄봄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전통주 담그는 전문가인 이정님이 이정춘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오양주를 너댓병이나 가져오셨다. 술맛이 기가 막히다. 이정님은 단소도 잘 연주하고 노래도 잘하고 시낭송도 잘해 로이카페에서 한달에 한번 음악회를 할 때마다 사회 보시며 연주를 하신다. 심도학사 도반들과 여러번 들려 커피도 마시고 음악 감상도 하며 님과 친해져 여러번 자신이 빚은 술 한번 하자고 했는데 오늘에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내가저수지가에 있는 봄봄 식당에서 바라보는 여름밤의 정경은 환상적이다. 술이 취하자 이정님이 부는 단소소리가 여름밤의 향기를 출렁거리게 한다. 님은 민요도 잘해 님이 부르는 노레에 나는 절로 몸이 흔들린다. 함민복 시인을 좋아 한다며 그의 시 한편을 낭송해 나는 밤 늦은 시간인데도 함시인에게 전화해 이정님과 통화를 하게했다.
이정님의 남편 조형은 동검도 예술극장에서 일하고 계신다 해 그곳 유감독을 조금 아는 나는 특히 반가왔다. 클래식기타 연주 솜씨가 일품이다. 내가 아브라함 궁전의 추억(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이 생각나지 않이 이렇게 무식한 말을 했다)을 좋아 한다하니 언제 한번 연주해주겠다고 한다. 20여년 화랑을 운영해 미술에 조예가 깊었고 우연히 얘기를 하다 우파니샤드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심도학사에서 우파니샤드 강독을 여러번 듣고 이 책의 영역본을 번역해 보려고 일부를 번역한 적도 있었다.
사실 그가 마음에 든 것은 술에 취하자 금방 나를 형으로 부르며 거리감 없이 다가오는 그의 친밀함이었다. 술 익을 때마다 적어도 한달에 한번은 만나자고 한다. 강화로 이사와 내가면에 사는 이들 부부를 알게되 나는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한달에 한번은 술을 마셔야 할 것 같다. 사람도 좋고 술도 좋으니 이런 유혹을 어찌 뿌리칠 수 있으랴.
봄봄의 석화가 부부도 합류해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정을 넘겼다. 좋은 사람과 친해지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없다. 우리는 영원전부터 친구였던 것처럼 서로 허물없이 얼싸안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저수지 위의 별들이 그렇게 찬란할 수 없다.
15일
아들이 선거에서 낙선한 박화가 격려하고 싶다며 길선선생님이 쏘겠다고 해 친구들 6-7명과 함께 봉평메밀에서 점심을 했다. 몇 달간 가족이 총동원되 선거운동을 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를까? 박화가는 좋아하는 술도 끊고 그림도 그리지 않고 애많이 썼다. 정치는 무엇보다 바람인데 민주당 바람이 태풍처럼 전국을 휩쓸었는데 경상북도 강화군만 요지부동이었다. 강화에 사는 것이 부끄럽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강화에 사는 것이 좋다. 사실 평화가 정착되면 제일 좋아질 곳이 북과의 접경지역인 강화일텐데--. 평화가 정착되 피부로 접하게 되면 강화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다. 비관적 분위기가 팽배하고 심지어 분노조차 느껴지는 분위기였는데 낙천주의자인 나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라며 박화가 아들 이강이가 꿈을 잃지 않고 도전할 것을 권했다. 30밖에 안되는 청년이 정치에 뜻을 두고 출마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식사후 몇분과 북산 숲 산책. 우리 대화의 대부분은 남북평화, 트럼프와 김정은 얘기다. 젊은 김정은에게서 고구려의 기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저속한 장사꾼 트럼프가 오바마도 하지 못한 북미의 대결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나는 이제 가급적 입을 다물고 내 삶을 살려고 한다.
16일
심도학사 강의. 오늘은 선불교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헤능선사의 육조단경 강독이다. 15분 정도 오셨다. 초창기에 거의 개근하시다 6년에만에 오신 불교전문가이신 한의사 고병일님을 뵐 수 있어 기뻤다. 김영철님의 부인과 아들도 오셔 특히 반가왔고 요양원 의사이신 권오성님과 부인도 오셔 권형이 심도학사 중심으로 강화에 공동체를 만들고 요양병원을 해보자는 제안을 해 모두의 반응이 좋았다. 나는 노인들이 꿈을 꾸며 흥분하는 모습이 좋아 싱글벙글. 다쿠멘터리 제작자인 배영호님이 플라맹고를 추는 맹인과 한달간 산티아고 순례길 촬영을 하는데 대안학교에 다니는 심도학사 도반의 딸을 주인공으로 케스팅했다는 말을 듣고 반가왔다. 심도학사에는 참 다양한 분들이 오셔 매번 나를 감탄하게 한다.
혜능은 점수를 강조하는 요가 중심의 인도불교를 일거에 뒤집어 돈오를 강조하는 중국식 선불교의 기초를 놓았다. 마음은 맑은 거울이지만 거기 앉는 먼지나 티끌을 쉬지 말고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는 신수의 계송을 보고 방아나 찠던 일자무식 혜능이 본래 청청하여 먼지나 티끌이 없는데 무엇을 닦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도전적인 계송으로 5조 홍인의 뒤를 이어 조사가 되었다는 얘기는 통쾌하기도 하고 허황된 것 같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선사들의 얘기 중 특히 유명한 것은 남악 회양과 마조 대사의 얘기다. 마조가 길을 걷다 회양이 벽돌을 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스님, 벽돌을 갈아 무엇을 하려고 히십니까? 이걸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러면 종일 앉아 참선만 하는 네 놈은 그래서 언제 부처가 될건데. 이 말에 마조가 크게 깨닫고 平常心(평상심)이 도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된다. 내가 알기로는 이 보다 더 위대한 선언은 없다..
나는 돈오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루하루를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새롭고 기쁘게 살러고 한다. 나는 어제가 나에게 달라붙지 못하게 하고 내일의 염려가 거룩한 오늘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려 할뿐이다. 나는 한순간을 살뿐이다. 육조단경의 핵심은 세상에 물들지 말고 불성으로 청청하게 살라는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無心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다. 임제선사는 세상에 끄달리지 말고 어디 가든 주인공으로 살며(수처작주) 세상을 이용하고(用鏡 용경) 세상을 타고 가라(乘鏡 승경)고 했다. 이것을 성경에 나오는 말로 표현하면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오전 강의 끝나고 십여명이 큰나무카페에 들려 진강산 자락길 산책. 그곳 학부형이신 이연숙님을 뵈었는데 자폐아 청년들이나 그들 학부형들과 심도학사 도반들간의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모임을 했으면 하는 말을 하셨다. 이웃사촌들과도 상의를 해봐야겠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곳이다. 특히 말없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의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거룩한 일은 없을 것이다.
17일
가족들 모임이 있어 오전 강의에는 참석 못하고 서울에 가서 딸 가족과 식사.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우리 딸이었는데 이제는 딸의 딸이 더 좋다. 종일 손녀 데리고 다니며 천국에 소풍 온 듯 놀았다.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손녀의 모습은 나를 전율시킨다. 인생 최고의 경지는 기쁨이다. 유영모 선생은 기쁨을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 했다. 사람은 순수할수록 기운이 넘친다. 나도 늙어갈수록 더 어려질 수 있다면 최고로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첫댓글 마치 내가 글 속의 이 분들을 만난 듯...이리도 상세하게 묘사해 주시니...좋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