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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비몽사몽으로 한 마디 ‘말씀’을 듣는다. [문]사람이 한 세상 살면서 사람이기에 마땅히 할 만한 일이 무엇인가? [답]속으로는 충(忠), 겉으로는 서(恕)가 있을 따름이다. [문]무엇이 충(忠)이고 무엇이 서(恕)인가? [답]충(忠)은 자신에게 스스로 성(誠)함이요 서(恕)는 모든 남들이 자기와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말씀’은 이것으로 그치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공자의 그 말이 이런 뜻이던가?
그렇다. 분명하다. 이 세상 모든 남들이여, 당신들이 듣든 아니 듣든 말해야겠다. 당신이 나와 한 뿌리요 한 몸인 것을 안다. 당신이 무슨 뜻밖의 흉측한 겉모양을 했어도 당신은 나와 한 뿌리, 한 몸이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본디 그런 것이다. 이것이 한님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내가 이 ‘앎’에 지금처럼 온 몸의 세포로 깨어있는 한, 당신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은 나에게서 당신을 향한 미움이나 분노를 살 수 없을 것이다. 다쳐서 피 흐르는 왼손을 오른손이 어떻게 미워하고 그에 대하여 분노할 것인가? 내가 당신을 이렇게 알고 대하는 것이 곧 나 스스로에게 충(忠)하는 것이다. 그분이 옳았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그게 전부라고 가르치신 예수, 그분이 옳았다. 옴!
출판사 삼인에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예언자들’ 중판이 나왔다며 책을 두 권 보내왔다. 한 권 펼치는데 마치 나를 읽어보라는 듯, 한 단락의 문장이 나타난다. “개인과 절대자 사이의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 위대한 신비주의의 성취다. 신비로운 상태 속에서 우리는 절대자와 하나가 되며 또한 자신이 하나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영속적이고 굉장한 신비주의 전통으로서, 풍토나 신조에 따라 변경될 수 없다. 힌두교, 신플라톤주의, 수피즘, 그리스도교에서 우리는 동일한 신비주의의 발생을 본다. 그리하여 고전적인 신비주의는 생일도 따로 없고 고향도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되풀이하여 신과의 합일을 말하는 그들의 발언은 언어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며 결코 낡아지지 않는다.”(W. James).
토요명상 시간. 둘러앉아 기도하고 이야기 나누고… 복된 선물. (2017. 9. 16)
⎈ 주일예배. 전주, 광주에서 여러 벗들이 왔다. 한 사람씩 자기가 겪은 ‘고마움’에 대한 이야기 나눔. 오가는 말들이 달콤한 영양만점 천상(天上)의 호빵이다. (2017. 9. 17)
⎈ 아침 성경을 읽는다. 루가복음 2장.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더니,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예년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일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예수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고 부모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동행하는 무리에 섞여 있으려니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룻길을 가다가 문득 생각이 들어 친척과 지인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는지라,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면서 아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었다. 사흘 만에 성전에서 학자들과 어울려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아들을 발견하였다. …부모가 그를 보고 놀라며 어머니는 말하기를, “얘야, 어쩌자고 우리한테 이러는 거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고생이 많았다.”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왜 나를 찾으셨어요? 내가 우리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셨나요?”
착각(錯覺)이 진실인 줄 알고 가는 길은 편하다. 착각을 착각으로 알아보고 진실을 찾아 돌아가는 길은 고생이 많다. 그래서 하룻길이 사흘길이다. 네가 찾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아버지 집에 있다는 걸 알아라. 아버지 집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다. 너도 마찬가지다. 너를 네 집에서 찾기까지 너는 고생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효선은 볼일 보러 새벽같이 서울 가고, 효선의 부탁으로 두더지가 점심 함께 하자며 와서는 조심스레 묻는다. 소리샘이 말하기를, 요 며칠 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니 한 번 여쭤보라고 하던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웃으며 답한다. 무슨 일이 없으면 그게 사람인가? 그러고 말까 하다가 너무 가볍게 대답한 것 같아서 다시 말한다. 요 며칠 좀 슬펐소. 그럴만한 이유야 물론 있겠지만 그걸 캐어볼 마음은 없고, 다만 세상 사람들이 너무 힘들게 사는 것 같아서 그것이 마음을 무겁게 한 건 사실인 듯… 그러다가 오늘 아침 성경읽기가 마음을 많이 가볍게 해주었소. …그러니,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버럭이 교통사고로 다쳤다기에 두더지와 함께 남원 집 방문. 현장에서 바로 폐차시켜야 할 만큼 차가 크게 망가졌는데 혼자 타고 있던 본인은 갈비 몇 개 다치고 살아났단다. 살아난 게 아니라 살려주신 거라고, 이제 당신 몸이 당신 게 아닌 줄 알았느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그걸 이제 알겠고, 아내와 딸이 곁에 있어서 고맙다며 울먹인다. 내외가 많이 수척해졌다. 사람 하나 죽고 다시 태어나는데 어찌 고생이 없겠는가? 우리 인연이 아직 헤어질 때가 아닌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으로 차려준 저녁밥 잘 먹고 돌아오다. (2017. 9. 18)
⎈ 일본영화 ‘고독한 미식가’를 보는데 주인공이 대만에서 돼지불고기를 맛있게 먹는다. 저도 모르게 침이 꿀컥 넘어간다. 부엌에서 효선이 뭐 먹고 싶은 것 있느냐고 묻는다. 삼겹살을 고추장에 구워달라고 하니 반색을 한다. 뭐 좀 먹고 싶은 걸 해달라는 말이 그렇게도 반가운 모양이다. 그럴 게다. 누구든 제가 할 수 있는 걸 누가 해달라고 하면 반갑고 고마울 것이다. 우리끼리 먹는 것보다 내일 두더지하고 같이 먹잔다. 오케이. (2017. 9. 19)
⎈ 7학년 마음공부. 개학하고 첫 시간. 사람과 말할 때는 상대방에 집중하라고, 너희가 할아버지한테서 이것 하나 배웠다고 해도 좋다고, 할아버지는 어려서 그런 말을 듣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기에 아직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누구와 말하면서 그에게 집중하지 않을 때가 많다고, 이것 하나만 버릇이 돼도 세상 살기가 훨씬 편해질 거라고, 이렇게 말하는데 딴전피우는 녀석들이 있다. 속으로 웃으며 저 녀석들 버릇 고쳐놓고 말겠다고 다짐한다.
수업 마치고 오랜만에 와온 바닷가 산책.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허벅지까지 빠지는 갯벌에 들어가서 아마도 연구용으로 쓸(?) 갯벌 흙을 채집한다. 그들을 지켜보던 카페 주인이 작업 마치고 나오는 흙투성이 젊은이들에게 손으로 자기네 집 안뜰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 가면 씻는 데 있어, 가서 씻고 가게, 그대로 가서야 쓰것는가? 그 전라도 말이 하도 구수하고 따뜻해서 빙긋이 웃어주었다. 칡꽃 향기에 취하여 한참 걷다가 돌아오는 길에 카페 주인을 다시 만났다. 웃으며 말했다, 아까 학생들에게 씻고 가라는 당신 말을 듣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고. 그가 뭐라고 묻는다. 잘 들리진 않지만 학교에 계신 선생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몰라봐서 죄송하단다. 무슨 천만의 말씀! 웃으며 답하는데 그가 뭐라고 한다. 역시 못 알아듣겠다. 다음에 차 마시러 오라고? (2017. 9. 20)
⎈ 참이슬과 무지개가 귀한 선물과 함께 다녀간다. 무지개가 카페를 열었는데 이름이 ‘각별한 마음’이란다. 벌써 지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들어와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도 나눈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판 보고 들어오는 카페보다는 멀리서 가까이에서 일부러 사람들이 찾아오는 그런 카페가 되기를 축원. 명절 지나 한 번 들러야겠다.
가을인가? 엉겅퀴 무성한 숲길로 황혼에 물든 하늘 등지고 먼 산봉우리처럼 보이는 늙은이가 마른 풀꽃들에 가슴까지 묻혀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둘째의 그림 ‘집으로 가는 길’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보면 볼수록 가슴 뭉클한 그림, 포근하면서 짠하다. 내가 모델이라는데, 산그늘에서 산으로 돌아가 마침내 산으로 되어버릴 한 인간이 저기 걸어간다.
밤, 브라보가 달빛 산책하자며 왔기에 효선과 함께 셋이 옥천 갓길을 걷는다. 달빛은 보이지 않지만 서늘한 가을 밤 청량한 공기가 괜히 아린 가슴을 보듬어준다, 괜찮다면서.
문 대통령이 유엔에서 연설한다기에 일삼아 들어본다. 북조선 상황을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우리 힘으로 평화를 이루어보자고, 상대가 듣거나 말거나, 진정으로 권면하는 내용이기를 기대해보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한 나라 정치인다운 연설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지만 허전한 마음 어쩔 수 없다. 그에게서 간디 같은 영적 지도자의 연설을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인가? (2017. 9. 21)
⎈ 8, 9학년 마음공부. 사람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라고, 불난 집에서 화재 원인을 규명하기 전에 불 먼저 끄듯이, “왜 누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를 묻기 전에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를 먼저 묻는 게 바른 순서라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 순서를 망각하고, 지나간 일을 추궁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음이 너희 대(代)에서는 반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다시피 부탁.
두더지와 인연이 닿은 광주 노숙자들이 학교를 방문하여 함께 점심 식사. (2017. 9. 22)
⎈ 효선은 수업하러 학교 가고, 혼자서 옥천 갓길로 동천에 닿아, 고기비늘 같은 무늬로 끝없이 출렁이는 개울을 건너는데 아이 팔뚝만한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작은 피라미들이 반짝이는 은빛으로 제 존재를 증명하느라 괜히 분주하다. 개울 건너 조곡동성당 마당으로 들어서니 앉을만한 장소가 없다. 어디 늙은 나무 한 그루 뜰을 지킬 만도 한데, 작은 정원수들만 옹기종기 앉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아스팔트 주차장이다. 성당 입구를 기웃거리다가 “부득이하여” 문을 잠갔으니 출입은 신부가 드나드는 옆문을 이용하라는 안내문 앞에서 돌아선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부득이한 사정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고, 우리 어머니 집에는 ‘바깥’이 없어서 성당 안이든 밖이든 거기가 거기니까. 개울가 벤치에 노인 내외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앉아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난한 뒤태가 아름답고 정겹고 흐뭇하고 눈물겹다. 눈치 못 채게 한참 내려다본다. 공중전화로 기림을 부르니 대답한다. 저도 제 뱃속 아이도 잘 있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 오, 한님!
토요명상. 부모 배움에 온 엄마 아빠들로 그들먹한 도서관. 부산에서 온 풀꽃유치원 내외도한 자리에… 저마다 웃는 얼굴, 얼굴들, 고맙고 다습고 어여쁜. (2017. 9. 23)
⎈ 주일 오후 3시 예배. 중앙교회 홍 목사 설교를 귀담아 듣고 와서 중계하는 소리샘, 많이 행복해 보인다. 감사할 일이다. 예배 마치고 ‘노래 숨’ 모임이 계속되는 모양인데, 한참 만에 손님들 보내고 안방으로 돌아오는 효선의 표정이 아까보다 밝아져 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 힘이 빠져나가는 경우가 있고 힘이 오히려 보태어지는 경우가 있지…
밤, 효선과 손잡고 중앙시장 골목 산책. 5천원으로 슬리퍼 한 켤레 구입. (2017. 9. 24)
⎈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꿈을 꾸었다. 화랑에 어른 키만큼 큰 그림이 걸려있다. 반(半)추상화 같은데 무엇을 그린 건지 잘 모르겠다. 화가라는 남자가 다가오더니, 이 그림은 이렇게 봐야 하는 거라며 그림 앞에서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비스듬히 눕는다. 그제야 거기 그렇게 눕도록 마련되어 있는 장치가 보인다. 그가 가르쳐준 대로 누워서 그림을 보니, 맑은 개울물이 돌과 풀숲 사이로 졸졸 소리 내며 흐르고 있다. 아름답게 생동하는 그림이다. 와, 감탄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깨어나면서 드는 생각. ―왜 그림을 세로로 걸어놓고서 옆으로 누워야 제대로 보이게 했을까? 그림을 가로로 걸어놓으면 바로 서서 볼 수 있을 텐데. 이어서 드는 생각. ―화랑의 그림이야 보는 사람 위주로 걸 수 있지만, 그래야 하겠지만, 세상은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잖은가? 광주 무등산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자네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면서 봐야지 산을 돌려놓으며 볼 순 없잖은가? 허허허… 누가 누군지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거든 자네 자리를 좀 옮겨보시게, 가끔은 바닥에 누워도 보고.
술 빚는 날. 네 가정 여섯 식구가 모여 각자 빚은 술 알코올 도수를 측정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모양이다. 조용히 공부하며 생각을 나누는 모습이 착하다. (2017. 9. 25)
⎈ 오전에 중앙교회 홍 목사를 교회 목사관으로 잠시 방문하고 돌아와 구례, 군산, 순천에서 온 목사 세 분과 부인 한 분을 맞는다. 오래 전 공주 땅에 기거할 때 만난 인연들이다. 효선이 장만한 해물볶음밥으로 점심 나누고 차와 이야기도 나누고 밝은 얼굴로 돌아들 간다. 귀가 어두우니 더욱 정성껏 듣게 되고, 그것이 오히려 마음을 다독여준다. 구례에서 온 목사가 천은사라는 절을 추천한다. 오가는 길에 이정표에서 천은사 절 이름을 본 기억이 난다. 이번 명절 기간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밤, 효선과 동천 갓길 산책. (2017. 9. 26)
⎈ 술 빚는 모임이 지난 번 빚은 술 음미하는 자리에 와서 한 마디 하란다. “아는[知] 건 좋아하는[好]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건 즐기는[樂] 것만 못하다”는 옛 어른 말씀을 소개하며 술을 좋아하되 술에 당하는 인생(이를테면 알코올 중독자)은 되지 말고 술을 즐기는 인생이 되자고, 그러려면 술을 상전처럼 모시지 않고 술을 하인처럼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 한 자리에서 마실 술의 양을 정하든지(“세 병만 마시자”) 아니면 시간을 정해놓든지(“11시까지 마시자”) 하고서 그대로 해보자고, 그러면 술도 인품 도야(陶冶)의 한 소재로 훌륭히 응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이른바 동양의 주선(酒仙)이라 불리는 사람들(이태백, 이규보 등)이 모두 술에 끌려 다니는 주정뱅이가 아니라 술로 한 경지 오른 사람들이라고, 그들이 그럴 수 있었으면 우리도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뭐 이런 얘기를 잠간 하고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이 집(한결네 집)을 6시에서 8시까지 빌리기로 했으니, 설거지할 시간 계산하여 7시 50분까지만 마시며 즐기자고 했다. 술잔이 돌아가고 노래가 흘러나오고 흥이 무르익는다. 술을 좀 과하게 마신 것 같아 거실 소파에 누워있는데, 시간이 흘러 7시 45분쯤 되자 엄마들이 빈 그릇을 들고 방에서 나온다. 음, 약속을 지키는구나. 안심되면서 고맙다. 권력을 총칼로 빼앗는 게 아니라 자기를 오랜 습(習)에서 해방시키는 이것이 진정한 혁명이다. 부디 건강하고 멋있는 ‘술의 길’[酒道]이 이 모임으로 잘 열렸으면 좋겠다고, 한님께 속으로 빌어본다. 헤어지는 마당에 저마다 기분 좋은 얼굴들이다.
태수 화백이 호(號)를 지어달라고 아내를 통하여 어렵게 부탁한다. 말을 듣는 순간, 연원(然園)이라는 이름이 떠올라 전해주며, 이태수 하면 생각나는 말이 자연(自然)인데 이것으로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 김용준의 맥을 이어보라고 하니 내외가 좋아한다. (2017. 9. 27)
⎈ 전교생이 한가위 차례를 지낸다. 간소한 제상 앞에 줄지어 절하며 “우리는 당신의 손발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한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2017. 9. 29)
⎈ 효선이 어제 서울 가서 오늘 점심은 소리샘, 예온이와 함께 자장면으로… 그 식당은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래서(?) 사람들이 줄을 선단다. (2017. 9. 30)
⎈ 구빈, 예진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상담할 것이 있다며 찾아왔다. 우선 고맙다고, 너희도 우리 기성세대도 몸과 마음에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의 낯선 문을 들어서는 중이니 얼마쯤 시행착오가 있을 걸 각오하고 함께 도전해보자고, 그랬다. 고맙게도 동감하는 표정들이다. 오후 3시, 예배에 온 교사들과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 나눔. 아이들보다 우리가 더 힘들고 아프고 불안할 거라고, 그래도 한님을 믿고 우리가 희망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고, 낡은 세대의 방법과 생각으로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없는 거라고…
주일예배에 온 길벗들과 브라보네 식구까지 함께 어울려 효선이 마련한 요리로 저녁 식사. 이름도 모르는 무슨 수프처럼 생긴 음식이 맛있어 네 공기나 먹었다. 식사 마치고 나서 시현이가 기타 반주로 자작곡 노래를 들려준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나름대로 제 길 찾아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귀엽다. (2017. 10. 1)
⎈ 천사들…, 노리치…, 폴 틸리히 번역. 은서 소피아가 부모와 함께 자기 할아버지 뵈러 왔다가 들렸다. 인생 선배로서 후배인 은서에게, 부모와 함께 들으라고, 진심으로 말해주었다. “네가 세상에 오면서 가지고 온, 하늘이 너에게 맡기신 일을 찾아라. 네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그 일을 찾아서 부디 행복한 인생을 살아라. 그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한님께 기도드려라.…” 영문 모를 침울함이 곁을 떠나지 않고 서성이는 하루. (2017. 10. 2)
⎈ 도시락 싸들고 천은사(泉隱寺) 구경. 두더지 동행. 조용한 절 뒤 계곡에서 도시락 비우고 조금 걷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고단 턱밑 주차장까지 올라감. 사람들이 많다. “경제적 형편이 허락되면” 군밤 한 봉지 사 달라고 하니, 효선이 경제적 형편이 허락된다며 군밤 한 봉지 사준다. 열다섯 개도 안 되는 군밤이 5천원. 다음엔 경제적 형편이 허락되어도 이렇게 비싼 군밤은 사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분 좋은 산책이었다. (2017. 10. 3)
⎈ 추석.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대체로 조용하고 어딘지 슬퍼 애잔한… (2017. 10. 4)
⎈ 점심 때 장보는 데 따라갔다가 갑자기 배가 쌀쌀 아프다. 집으로 돌아와 된장국을 끓여달라고 해서 한 숟갈 떠 넣으니 거짓말처럼 배가 편안해진다. 신기하다. (2017. 10. 5)
⎈ 꿈에 두더지가 짧은 편지 한 장 전해준다. 곱게 차려입은 두 늙은 여인이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가 전해달라며 놓고 갔단다. 편지가 “현주니? 나, 윤주야.”로 시작되는데, 세로획이 굵어지다가 가늘어지는 걸 보면 펜으로 잉크를 찍어 쓴 것 같다. 윤주는 고3때 만난 여자 친구. 졸업하고 그 친구는 초등학교 교사로 나는 신학생으로 서울에서 다시 만나 신촌 뒷골목을 팔짱끼고 걷기도 했다. 군에 가서도 그 친구 명함판 사진을 틈만 나면 들여다보았지. 제대하고 서울에서 몇 번 데이트 끝에 어렵사리 결혼을 신청했다가 가볍게 거절당했다. 너를 좋아하긴 하지만 남편감으로는 아니란다. 그 윤주가 전해달라며 놓고 간 편지 내용인즉, 가장 가까운 자기 친구가 젊어서부터 자기보다 더 나를 잘 알고 내 책을 많이 읽어왔는데 최근에 견디기 힘든 일을 당해서 나를 만나보려고 함께 왔다가 그냥 간다며 언제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단다. 편지 마지막 문장이 이랬다. “현주야, 네가 잘 살아온 것처럼 윤주도 잘 살아왔다. 이런 일 저런 일 골고루 겪었지만… 안녕.” 꿈에서 깨어나는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한 생각. 음― 이 친구, 그날 서울 명동에서 잠간 훔쳐본 훤칠한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았나보구나. 아무렴, 그럴 것이다. 왜 안 그러랴? 세상에 잘 살지 않은 인생이 없거늘.
‘천사들과 말하다’에서 이런 문장을 만날 때, 어떻게 가슴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너는 결코 하느님에 닿을 수 없다. 너와 하느님이 하나기 때문이다.” 아멘!
하지만 잊지 말자, 하느님은 처음부터 너지만 너는 아직 하느님이 아니다. 빛은 네 모습을 하고 있지만 너는 빛이 아니다. 이 진실을 잊지 말자, 그래야 죽어서 살 수 있다. 아멘!
아침에 학교 가서 점심 먹고 오후 낮잠 자고 번역하고 저녁나절 와온 바다 산책. 젊은이들이 드론을 공중에 띄우고 논다. 실물을 처음 본다. 머리 부분에서 빨간 빛이 반짝거린다. 자기가 살아있어서 임자의 신호를 받고 있다는 표시겠다. 사람한테는 호흡이 빨간 불일까? 하기는 ‘나’라는 이 물건도 허공의 저 드론처럼 숨이 붙어있는 동안 누군가의 강력한 조작(操作)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아무데도 없는 거다. 오랜만에 느리고 한유한 산책에서 돌아와 토요명상 마치고 귀가. (2017. 10. 7)
⎈ 내일이 효선 생일인데 새벽같이 서울 가야 할 일이 있어 오늘 두더지가 여주 소치마을 자연산 횟집에서 근사한 점심을 대접한다. 많이 먹었다. 오후 3시 예배를 무지개네 카페 ‘각별한 마음’에서 드린다. 정가가 적힌 메뉴판이 없는 카페다. 이것이 무슨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가 왜 이런 엉뚱한(?) 시도를 하고 있는 건지, 한님을 믿고 따른다는 게 어째서 쉬우면서 어려운 일인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무토막에 붓으로 한 줄 써달라기에, ‘이웃을 내 몸같이, 각별한 마음, 사랑의 마음’이라 써주었다. (2017. 10. 8)
⎈ 네가 누구를 믿는다는 게,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이든 하느님이든 아니면 너 자신이든, 네 마음대로 네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몸으로 배우느라 며칠 동안 애썼다. 수고했다. 그만하면 됐다. 다시는 무슨 일로도 건방떨지 마라. 숨조차 네가 쉬는 게 아니라 쉬어지는 것 아니냐? 네가 감히 누구에게 설교를 한단 말이냐? ―아멘.
효선이 부재중이라 신난다와 두더지가 점심 저녁으로 와서 함께 먹어준다. 고맙다. 오후에는 대로를 따라 순천대학까지 걸어갔다가 뒷길로 돌아온다. 도심의 조용한 산책길.
2012년에 중단했던 리처드 로어의 ‘급진은총’을 5년 만에 이어서 번역. (2017. 10. 9)
⎈ 리처드 로어, 현대판 예언자라 부를 만한 친구다. 오늘 이런 글을 읽고 옮기는 행복을 나에게 선물한다. “이 땅에서는, 다른 무엇이 안 죽으면 아무도 살지 못한다. 동물세계가 그렇고, 화학세계가 그렇고, 전체 물질세계가 그렇다. 예수는 이런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신다. 그대들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내가 죽어서 그대들을 살게 하리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분처럼 죽어서, 굶주린 세상을 먹이기 위한 빵이 되어,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 삶으로 형성되는 아름다운 처소에서 살도록 초대받았다. 우리가 성찬식 기도 중에 ‘신앙의 신비’라고 말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죽어가는 나를 그분께 드리고 ‘죽음 누이야, 어서 오라’고 말하며 나 자신을 그녀에게 맡길 때, 하느님은 새로운 모양으로 내게 생명을 돌려주신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전개되는 패턴을 알아볼 만큼 충분히 살았다. 나에게 그 패턴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심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 연결된 패턴임을 나는 믿는다. 나는 그것이 전체 우주에, 모든 별들에, 자연의 온갖 것들에, 물에, 식물에, 동물과 내 육신에 스며있는 이 세상의 신비임을 믿는다. 그리스도가 죽는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다. 이 그리스도가 모든 세대, 모든 사물 안에서 당신을 보여주시리라.”
효선이 열차로 도착할 시간을 한 시간쯤 앞두고 대문을 나서서 버스 다니는 큰길로 이정표 따라 순천역까지 걸었다. 잠간 팻말을 잘못 읽어(?) 한 십분 쯤 다른 길로 걷다가 아무래도 수상쩍어 한 늙은이에게 길을 물었다. 그가 일러준 대로 방향을 고쳐 잡아 걷다보니 조곡동성당이 저 아래 보인다. 아하, 저쪽 길로 왔으면 훨씬 가까웠을 텐데, 속에서 웃음이 스멀스멀. 속옷이 땀으로 촉촉해지면서 역에 닿았다. 소리샘이 마중 나온다고 했는데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열차가 도착하는 홈에 서 있다가 저만큼 걸어오는 효선을 본다. 둘이 마주보며 활짝 웃는다. 그래, 고달픈 인생이지만 뭐 이런 재미도 가끔 있는 거라. 게다가 돈 한 푼 들지 않았다. 차에서 기다리던 소리샘이 내 이럴 줄 알았다며 야단법석이다. 너도 이런 웃기는 작은 행복 맛보면서 살라고, 안 들리게 말해주었다. 진심이었다. (2017. 10. 10)
⎈ 학교 논에서 벼 베는 날. 모내기할 때는 막내둥이 재민을 업고 논에 들어갔는데 오늘은 녀석이 앞장서고 관옥이 그 뒤를 따른다. 아이들이 컸다는 얘기다. 논에 들어가기 전 두 손 모으고 함께 기도하는데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한님께 기도드리나이다. 당신의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동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일을 설계하고 추진하고 완성하는 이는 오직 당신이시고 우리는 당신의 소중한 손발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 일을 당신이 도와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일을 우리가 잘 도와드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풍성하고 신명나는 잔치를 아쉬울 것 없이 즐기게 하소서. 옴.” 벼 베기 위하여 줄지어 선 아이들을 보며 곁의 두더지에게 말한다. “저것들이 모두 종자(種子)들이라, 삼십 배, 육십 배, 구십 배로 풍성하게 열매 맺을…” 넓은 운동장이 좁게 아이들이 모여들어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장면이 꿈결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열려라, 사람들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조화와 협동의 아름다운 한님 왕국을 이루는 새 시대야, 새 세상아! …무슨 소리? 벌써 저렇게 열렸거늘!
‘노리치의 줄리안’ 번역. “그러므로 복되신 삼위일체께서는 당신이 하신 모든 일을 항상 기뻐하시거니와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장 복되게 드러내시며 말씀하시되, 보아라, 내가 하느님이다, 보아라, 모든 것 안에 내가 있다, 보아라, 내가 모든 일을 한다, 보아라, 내가 내 작품에서 내 손을 치우지 않았고 영구히 그럴 것이다, 보아라, 내가 시간이 비롯되기 전에 모든 것을 지으면서 쓴 것과 동일한 힘과 지혜와 사랑으로 그것들을 끝까지 관리할 터인즉, 어떻게 무엇이 누락될 수 있겠느냐고 하시는 것 같았다.” 잊지 말자, 지금 이 코로 드나드는 숨이 첫 사람 아담의 코로 드나들던 바로 그 숨인 것을, 바로 그 같은 숨을 이 땅의 모든 살아있는 사람 짐승 벌레 나무 풀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것임을…
리처드 로어 신부도 비슷한 생각이구나? “제3세계라는 용어가 1950년대 유엔에서 만들어졌을 때 속으로 중얼거린 기억이 난다. 흠― 그러니까 어떤 나라들은 아래에 있다는 말이렷다? 제3세계는 잠재력이 낮고 개발도 더딘 나라들이다. 하지만 개발은 안 됐어도 잠재력이 있는 제4세계가 있다. 그리고 네팔처럼, 잠재력도 없고 개발도 안 된 제5세계가 있다. 나는 예수회 피정 때문에 네팔에 간 적이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제5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내가 대꾸했다, 뭐라고요? 그런 게 있습니까? 같은 떠돌이별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이토록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에게 선행을 베풀거나 이타적인 사람이 되라고, 백인 큰아버지와 백인 큰어머니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타주의나 자선보다, 물론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있지만, 훨씬 힘든 무엇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복음은 우리를 연대(連帶, solidarity)로 부른다. 제2, 제3, 제4, 제5세계를 같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제1세계 교회들은 결코 회개하지 못할 것이다.” (2017. 10. 11)
⎈ 고마워라, 세상에! 잠에서 깨어나며 기지개를 켜다니! 아니, 기지개가 켜지다니! 내가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잠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내가 잠에서 깨어나는 게 아니라 잠이 내 몸에서 나가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생명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 평범한 진실을 여태 모르고 참 잘도 살아 있었구나? 기적이 따로 없지. 깨달음이 바야흐로 머리에 들어왔으니 내친김에 온몸의 세포 한 알 한 알로 스며들기를… 여기까지 쓰는데, 다시 기지개가 켜진다. 몸이 알았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고맙다, 기지개!
목우당이 전각(篆刻)한 나무와 무화과 잼을 가지고 와서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묻는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고요가 말하다’)을 정독해보라고,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한다. 이런 문답은 비록 짧아도 기운을 주고 가슴을 행복하게 해준다. 전에 써두었던 용아화상(龍牙和尙)의 시를 건네주었다. 효선이 다음 주말에 있을 ‘노래 숨’ 공연 문제로 박소정 선생 만나고 3시쯤 돌아와 이른 저녁상을 차려준다. 맛있다. (2017. 10. 12)
⎈ 8, 9학년 마음공부. 낡은 세상을 보내고 새 세상을 여는 일에 우리 모두 동참하자고, 오늘은 수업이라기보다 나름대로 간곡히 호소를 한 기분이다. 얼마나 가슴에 새겨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희가 듣거나 말거나 나는 이 말을 해야겠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2천 년 전 스승 예수의 간절함과 외로움이 어떠했을지, 아주 조금이지만 느껴진다. (2017. 10. 13)
⎈ 효선은 천지인 아이들과 놀러 학교에 가고 드디어(?) 매곡 뒷산을 오른다. 오르막이 좀 가파르게 느껴졌지만 헐떡이지 않고 오른다. 비결이 있다면 느릿느릿 오르는 것뿐이다. 아들인 손 아무를 남겨두고 54년도에 세상을 떠난 광산 김씨 조촐한 무덤 곁에 앉아 쉬다가 벌레들이 갉아먹는 중인 밤톨을 발견, 그것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껍질 벗겨 입에 넣는다. 적당하게 마른 생밤이 군밤보다, 삶은 밤보다, 훨씬 맛있다. 난봉산성 정상에 서니 순천 신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멀리 여주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보이고 광양만 앞바다도 보인다.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약간 후들거려 잠시 앉아있는데 언젠가 톱에 잘렸을 소나무 마른 그루터기가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궁금하다. 그날 저 나무에 톱질하던 사람, 아침 식사는 콩나물국에 밥 말아 먹었을까?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차원에서 놀고 있을까? 그런 게 궁금한 이 물건은 저 나무가 잘리던 날 무얼 하고 있었을까? 그냥 웃고 만다. 기분 좋은 등산길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찾아야겠다.
토요명상. 천지인 부모 배움에 온 어머니 아버지들과 함께 숨을 고른다.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낯선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기 위해서 낡은 세상의 온갖 허물을 벗어버리는 일에 우리 모두 뜻과 힘을 모으자는 호소가 절로 나오는, 이것은 무엇인가? (2017. 10. 14)
⎈ 리처드 로어 번역하는데, 이런 문장이 있어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영성생활에서는 당신의 가장 가까운 벗이 당신의 원수다. 예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게 그래서다. 문간에 선 원수를 들어오게 하기까지는, ‘나-아님’(not-me)을 당신 세계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결코 당신의 죄를, 당신의 어두운 면을, 마주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을 틀어막는 사람들, 당신을 겁주는 사람들, 그들에게 당신을 위한 메시지가 있다. 우리는 남들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허물을 미워하고 배척한다. 내 말은 당신 밖으로 나가서 그들의 가장 친한 벗으로 되라는 게 아니다. 다만 당신은 당신의 안테나를 세워야 한다. 그들이 당신 안에 있는 무엇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당신한테는 그들이 필요하다.”(라디칼 은총) 리처드 신부의 눈길이 날카롭고 신선하고 엉뚱하다. 그래서 맛있다.
오랜만에 중앙교회 예배 참석. 홍 목사가 설교한다, 바울로에게 삶의 바탕이던 믿음이 어떻게 교회에서 만든 신조를 시인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는지, 5백 년 전에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종교개혁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오늘의 신자들한테서도 삶과 아무 관계없는 중세기 믿음이 버티고 있는지를 하비 콕스와 마커스 보그의 신학을 동원하여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당신의 가슴을 울리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예수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그 사람은 바울로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이라고, 돈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면 그 사람은 돈을 믿는 것이라고… 예배 마치고 목사와 인사할 때 귓속말로 들려주었다. 당신 설교 듣는 동안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목사가 웃으며 자기 가슴도 설레었단다. 마땅히 그랬을 것이다. (2017.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