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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22
#.1 씬. 강석의 집 전경.(밤)
그 위로.
강석E : 내 겁니다.
#.2 씬. 강석의 방.(밤)
강석, 단아, 어린 시절 단아의 사진을 마주 잡고 있는.
단아 : 이 사진이 왜?
강석 : 주웠습니다.
단아 : (물끄러미 보는)
강석 : (사진 뺏는) 우리 어머니 굿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 들었죠? 넝마 귀신이 씌인 집안이라구.
그래서 그런가 자꾸 쓸데없는 걸 주워 들이게 되네요.
단아 : 돌려주세요. 제 사진이잖아요?
강석 : 싫습니다.
단아 : 제 사진을 뭐하러 가지고 있어요?
강석 : 내 맘입니다.
단아 : .....
강석 : (책갈피에 껴서 책상에 넣고 일어서며) 그쪽 증조부님 장례 때 내려가서 밥 먹으러 들어갔던 방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겁니다. 그냥 신기해서 가져온 거구요. 도적질이라고 할 겁니까?
단아 : ......
강석 : 그쪽 사진인 건 알고 가져 왔어요. 요즘 여자가, 어린 시절에
이런 구한말 때 분위기로 사진을 찍혔다는 게 신기해서요. 그뿐입니다.
단아 : 그럼, 돌려주세요. 주인이 돌려달라고 하는 거잖아요.
강석 : 이 연극 다 끝나고 나면 돌려줄게요.
단아 : 왜 그래요? 정말? 그런 사진 가지고 있어봐야 뭐 할 거라구?
강석 : 뭐 할 거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돌려주기 싫습니다. (옷장 앞으로 가서 웃옷 꺼내며) 나갑시다.
#.3 씬. 레스토랑.(밤)
강석은 식사를 하고 있고, 단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강석 : 계속 뿌루퉁해 있을 겁니까? 그깟 사진 보관 좀 하다가 돌려주겠다는데 뭘 그렇게 뿌루퉁해 있어요?
단아 : 참 특이한 취미가 있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하고 있어요.
강석 : 나 보약 먹어야 할 지경이거든요.
단아 : .....
강석 : 요즘 입맛도 없고, 잠도 잘 못 잔다고 하시는 우리 어머님 말씀 들었죠?
단아 : .....
강석 : 하던 사업 정리하고, 대성 건설에 들어가서 그쪽 작은 오빠하고 매일 투닥거리느라,
나 기운 많이 빠져서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잔다구요.
단아 : 사진 얘기하다가 왜 갑자기 보약 얘기는 해요?
강석 : 동정심도 없습니까?
단아 : .....
강석 : 보약까지 먹어야 할 정도로 기운 빠져있는 놈하고 그깟 사진 때문에 티격거려야 하겠냐구요?
단아 : 저 10살 때 사진이에요.
강석 : (보는. 그러다 고개 숙이고 포크로 음식 찍으면서) 그럼 더 잘 됐네요.
그 사진 가지고 있으면, 그쪽 네가 정말 단아니? 하는 말 계속 귀에서 맴돌거구,
그럼 우리 연극에 방해되지 않겠어요?
당분간은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게 우리 연극을 위해서도 좋겠네요.
단아 : 그러지 말고.....
강석 : (자르며) 난 입맛 없어서 요즘 밥도 못 먹는다니까요.
간만에 맛있게 밥 좀 먹어보려고 하는데, 계속 딴지걸 겁니까?
단아 : (보다가) 많이 안 좋은 거예요?
강석 : (고개를 드는)
단아 : (시선 피해 고개 숙이면서) 무리하지 말고 일 하세요.
강석 : (보다가) 지금 내 걱정해주는 겁니까?
단아 : 동정심도 없냐면서요?
강석 : (미소를 짓는)
#.4 씬. 강석의 집 식당.(밤)
천갑, 영자, 자리에 앉으며, 식탁은 차려져 있고.
영자 : 강석이 얘 안 내려 왔나보네.
천갑 : 드라마 그것도 못할 노릇이네. 뭘 찍은 걸 또 찍고, 또 찍고 그러나.
영자 : 추운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드라.
천갑 : 그러게. 저것도 드라마라고 욕하면서 볼 거 아니드라. 생고생이 따로 없더구만.
아줌마, 들어오는.
아줌마 : 아드님 방에 안계세요. 나가셨나 봐요.
영자 : 얘 밥도 안 먹고 하교수 태워다주러 간 건가?
천갑 : 그 놈도 참 사서 고생하네.
영자 : 당신이 명문 종가 명문 종가 하니까 그 후예 노릇하느라 애가 더 그러는 거잖아.
#.5 씬. 노래방 앞.(밤)
차 세우는 강석, 단아 기가 막혀서 보는.
단아 : 보약 먹어야 할 정도라면서요?
강석 : 그런데요?
단아 : 피곤하잖아요? 아까도 사람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으면서,
노래방은 왜 가야하는데요?
강석 : 연말에 친구놈들 모임 있어요.
단아 : 그런데요?
강석 : 한번은 웃겨서 상까지 줬지만, 두 번 그러는 건 망신스럽잖아요?
단아 : 저 또 노래시킬 거예요?
강석 : 춤도 추게 할 겁니다. 내려요, 어서. (내리는)
단아 : (기가 막혀서 보고 있는)
강석 : 안 내립니까?
#.6 씬. 노래방.(밤)
강석, 단아에게 마이크 들려주면서.
강석 : 댄서의 순정, 그걸로 밀고 나가봅시다. 잘 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단아 : 근데요.
강석 : 뭐요?
단아 : 왜 나만 노래 시켜요?
강석 : 네?
단아 : 노래 연습을 시키려면 뭔가 시범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석 : 그래서, 손 요염하게 흔드는 법, 그런 거 가르쳐줬잖아요?
단아 : 처음부터 해보세요. 그럼, 보고 있다가 그대로 해볼게요.
강석 : 지금 반항 하는 겁니까? 난 기본은 되는 몸이니까, 그쪽이나 열심히 해요.
단아 : 그럼 저도 안할래요. 뭐 보고 배우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니냐구요? (마이크 놓고 나가려고 하면)
강석 : (팔 잡으며) 노래방 환불 안 되거든요. 그냥 좀 하죠.
단아 : 저도 고집 있거든요. 그리구요.
강석 : 그리구 뭡니까?
단아 : 진짜 저 사람 스승으로 모셔도 되겠구나, 하는 것 좀 보여주세요.
강석 : 무슨 제자가 스승을 그냥 존경하면 되지, 시험까지 하려고 듭니까?
단아 : 스승으로 존경해도 되나, 확신 좀 가지게 해달라는 거예요. (의자로 가서 앉는)
강석 : (난감해서 보다가) 이거 돈 안받고 막 보여주고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박진영의 ‘허니’ 반주가 나오는.
강석 :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자신도 어색해서 단아의 눈치를 슬쩍 슬쩍 보면서,
그러면서도 자신도 그러고 있는 스스로가 재밌는 느낌으로, 열심히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단아 : (저 남자한테 저런 모습도 있었나,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입이 약간 벌어진 채 보고 있는)
강석, 무안해 하면서도 할 건 다하고 있는.
단아 : (어이없는 표정에서 서서히 뭔가에 빠져드는 느낌으로 그런 강석을 보고 있는)
#.7 씬. 병원 복도.(밤)
태영, 벌떡 일어나는. 말순 앉아서 보는.
태영 : 너 왜 그러냐? 정말? 꼼짝 말고 누워 있어야 한다는데, 왜 퇴원을 하겠다고 난리야?
말순 : 경찰서 내 근무만 하면 돼.
태영 : 경찰서 내에서만 근무하면? 누워서 근무 할래?
말순 : 근무 수당이라도 받아야지. 그래야 네 돈도 빨리 갚고, 대출금도 갚을 수 있을 거 아냐?
태영 : (앉으며) 내 돈 천천히 갚아도 되니까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입원해 있어.
말순 : 네 돈은 천천히 갚을 거야. 하지만 대출금은 당장 다음달부터....
태영 : 그러지 좀 말라니까. 사람이 살고 봐야지, 돈이 지금 문제냐.
말순 : 돈도 돈이지만, 몸이 근질거려서 거래.
맨날 길바닥에서만 살다가 병실에 꼼짝 안하고 누워있으려니까 정말 몸이 근질거려 죽겠단 말이야.
태영 : (버럭) 그럼 목욕을 하던지?
말순 : (노려보고)
#.8 씬. 말순의 집 앞.(밤)
운전석에 앉아있는 수영, 뒤에 앉아있는 진아.
진아 : 주먹 괜찮으세요?
수영 : (룸미러로 보는)
진아 : 태어나서 처음 주먹질 해보신 거라면서요? 금 간 거 같지 않으세요?
수영 : (미소 지으며) 그렇게 허약하진 않아요.
진아 : 죄송해요. 저 때문에 평생 안하고 사셨어도 될 일을 하시게 만들구.
수영 : 평생 누구한테 주먹질 하고 살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진아 : 저 참 애물단지죠?
수영 : 주먹질 할 만큼 화날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진아 : (보고)
수영 : 나란 인간한테 이런 면도 있었구나, 신기하고 그렇네요.
진아 : 전요, 아저씨.
수영 : .....
진아 : 정말 죄송한 마음도 있지만,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선 조금 기뻐하는 마음도 있어요.
아저씨가 날 위해서 평생 안 해본 일을 해주셨다, 그게 조금... 아니, 많이 기쁘고 그래요.
수영 : .....
진아 : 내릴게요. (차에서 내리는)
수영 : (내리고)
진아 : 가세요.
수영 : 진아씨?
진아 : (보면)
수영 : 고마워요. 진아씨 덕분에 죽을 때까지 해보지 못했을 경험하게 해줘서요. 들어가요.
진아 : 먼저 가세요.
수영 : 들어가요.
진아 : 같은 말 하면서 밤 샐까요?
수영 : 나이 든 사람 말, 어린 사람이 참 안 듣네요.
진아 : 전 아저씨 차타고 가시는 모습 보고 있는 게 좋아요.
수영 : (애잔하게 보다가) 늙어서 추위 더 많이 타는 제가 먼저 갈게요. (차타고 떠나는)
진아 : (멀어지는 수영의 차 보면서) 왜 늙었다고 하시는지 알아요. 더는 가까이 오지 마라, 그러시는 거란 거.
그래서 절대 더는 가까이 가지 말자, 매일 다짐하고 있어요.
#.9 씬. 길.(밤)
태영, 운전하고 있고, 환자복에 웃옷만 걸친 말순 옆에 타고 있는.
말순, 차창 열고 바람을 마시고 있다.
태영 : 이제 근질거리는 거 좀 풀리냐?
말순 : (창 밖을 보면서) 나한테 왜 이렇게 잘 해줘?
태영 : .....(순간, 멈칫하는 느낌으로)
말순 : 맨날 딱지나 떼고,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고 그랬으면서?
태영 : 친구 먹기로 했는데 별 수 있냐? 난 인생 자체가 의리 빼면 시체인 놈이거든.
미운 놈들한테도 한번 물면 안 놓는 똥개지만, 마음 준 사람한테도 의리 하난 똥개처럼 지키는 놈이다.
말순 : (보면서) 그런데 왜 별명을 똥개로 졌어? 질긴 놈이라는 거 알려주고 싶으면 다른 별명도 많잖아?
태영 : 출출하지 않냐?
#.10 씬. 삼계탕 집.(밤)
태영, 말순, 삼계탕 앞에 놓고 앉아있는.
태영 : 먹어. 뼈 다쳤을 땐, 이런 거 먹어줘야 해.
말순 : 나 때문에 돈 너무 많이 쓴다.
태영 : 알면 됐구. 내가 의리의 똥개 하태영 아니냐?
말순 : (주위 둘러보면서) 그 똥개 소리 좀.
태영 :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산에 놀러간 적이 있었어.
아마 복날 근처였던 거 같은데. 아저씨 몇이서 개를 잡으러 올라왔더라구.
말순 : (보는)
태영 : 진짜 직살나게 두들겨 패드라.
말순 : (얼굴 찌푸리고)
태영 : 밥 맛 떨어지냐? 하지 말까?
말순 : 해봐.
태영 : 그 자식 정말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어쩌다 매단 끈이 풀어졌나 보더라구.
죽어라고, 산으로 도망을 가는 거야. 근데....
말순 : 근데?
태영 : 주인이었나 봐, 아저씨들 중에 한 명이 쫑 하고 부르는 거야.
그러니까 피투성이가 된 그 놈이 돌아보는 거야.
그 아저씨가 손으로 쫑 쫑하고 부르니까 그 놈,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산 위를 한번 봤다가,
다시 주인인 그 아저씨를 한번 봤다가 망설이는 거야.
말순 : 그래서?
태영 : 근데, 그 자식, 주인 아저씨가 쫑 쫑 하고 다정하게 부르니까
주춤거리면서 그 아저씨 앞으로 다가오더라구.
말순 : 죽을 줄 알면서?
태영 : 아마 알았을 거야. 그 그렁그렁한 눈이 꼭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더라.
그런데도 주인이 부르니까 가야 하는 게 지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거 같더라구.
그 자식 그 슬픈 눈이 오래 잊혀지지 않더라.
저게 의리라는 건가, 죽일 거란 거 알면서도 부르면 가야 하는 게.
말순 : 그래서 별명을 똥개라고 지은 거야? 그렇게 살고 싶어서?
태영 : 개로 태어난 놈도 저러는데, 나도 한번 그 자식처럼 의리 있는 놈으로 살아보자 그랬나봐.
말순 : 그게 의리냐? 미련한 거지?
태영 : 나한텐 그렇드라. 너도 나도 잘났다고 뒤통수치며 사는 세상에
나만이라도 미련하게 의리라는 거 지키면서 살아보자.
말순 : (빤히 보는)
태영 : 뭐냐? 지금? 그렇게 의리를 지키고 싶어서, 간통이나 하면서 살았냐 그거냐?
그게 의리라는 거냐? 그거야?
말순 : 나, 간통에 간 자도 안 꺼냈거든.
하여간 머리 나쁜 애들이 꼭 지가 먼저 말 꺼내고 성질내고 그런다니까.
태영 : 야, 야, 머리 나쁜 인간이 사주는 삼계탕이나 어서 먹어라.
#.11 씬. 커피숍.(밤)
손님 없는 커피숍.
현규,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 보고 있다가 앞에 와서 앉는 혜주.
혜주 : 들어가요, 내가 정리하고 갈 테니까.
현규 : 먼저 가요, 정리는 내가 하고 갈 테니까.
혜주 : 또 술 마시러 갈 거예요?
현규 : 그러면?
혜주 : 내가 밉죠?
현규 : .....
혜주 : 내가 아니었으면, 우리 오빠랑 하교수님 같이 있는 모습 안 봐도 됐을 테니까.
현규 : 알면 됐어요. (일어서며) 하지만 미워까진 안 해요. 사내자식이 남 탓 하는 거, 치사하잖아요.
혜주 : 나쁜 모습 보여준다면서요?
현규 : (보는)
혜주 : 미워해야 하는데,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 어떻게 나쁘게 봐요?
현규 : 그건 그러네.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렇게 까진 안 되는 걸. 그리고....
혜주 : (올려다보면)
현규 : 나하는 짓 그대로 하고 있는 그 쪽 보면, 좀 측은해지고 그런 것도 사실이구.
좋아하는 사람 등만 바라보면서 힘들어하는 게 어떤 거란 거, 잘 아니까.
그쪽한테 화도 이젠 낼 수가 없네요. 정리 하고 가요, 먼저 갈게요. (가방 드는데)
혜주 : (일어서며)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곧 끝날 거예요.
현규 : (자조적으로 미소 지으며) 어쩜 이 상태가 꽤 오래 갈 거 같은 예감이 들어요. (나가는)
혜주 : .....
#.12 씬. 종가집 앞.(밤)
강석의 차 와서 멈추는. 단아 옆에 앉아있고.
단아 : (미소 짓고 있는)
강석 : 그냥 소리 내 웃던가.
단아 : (웃는)
강석 : 사람 못할 짓 시켜놓고 아주 재미있어 죽네.
단아 : 한 수 제대로 가르쳐 주셔서 고마워요.
강석 : 아주 가지고 노는군.
단아 : 게임 좋아하잖아요?
강석 : (보는)
단아 : (보는)
강석 : 어쩔 겁니까? 나하고 미운 정 들면?
단아 : 가세요. (내리는)
강석 : (내리는) 조금 걱정 되고 그런 거 없습니까? 이 인간하고 미운 정 들어버리면 큰일인데, 그런 거?
고운 정보다 왜 미운 정이 더 더럽고 무섭다면서요?
단아 : 걱정 되세요?
강석 : ......정말, 저 촌철살인의 한마디씩, 사람 뒤로 넘어가게 만들지.
단아 : 가세요. (문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강석 : .....
#.13 씬. 단아의 방.(밤)
단아, 진하의 사진을 들고 앉아있는.
단아 : 나 왜 그 사진 억지로라도 뺐어오지 못한 걸까?
오빠, 나 그 사람 말대로.....조금은 겁이 나.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
#.14 씬. 강석의 집 거실.(밤)
강석, 들어오는데, 천갑, 영자 앉아있고, 그 앞에 서있는 혜주.
영자 : (혜주에게) 저, 정말이야?
천갑 : 이 자식 오랜만에 맘에 드는 말 하네.
영자 : 정말 나갈 거야?
강석, 다가오는.
혜주 : 네.
영자 : (일어나서, 혜주손 잡는데)
혜주 : (움찔하지만 억지로 잡혀있는 느낌으로)
영자 : 그래, 잘 생각했어.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야.
강석아, 혜주 선보겠단다. 저번에 말한 그 성형외과 인턴하고 선 보겠대.
강석 : (혜주를 보는)
혜주 : 올라갈게요.
천갑 : 혜주 저 자식이 무슨 맘을 먹었나 모르겠네. 얼른 결혼해서 집 떠나고 싶어서 그런 건가.
영자 : 아무려면 어때? 선보고 시집가겠다고 하면 다행인거지.
강석 : .....
#.15 씬. 강석의 집 2층 거실.(밤)
강석, 2층으로 올라오는. 혜주의 방 앞에 서는.
강석 : (노크 하는) 혜주야?
혜주E : 나 잘 거야.
강석 : 오빠 들어간다.
#.16 씬. 혜주의 방.(밤)
혜주, 서있으면, 강석 들어오는.
강석 : 너 왜 그래? 무슨 생각이야?
혜주 : .....
강석 : 무슨 생각으로 병원 차려 달라는 놈하고 선을 보겠다고 하는 거냐구?
네가 왜 그런 놈하고 선을 봐?
혜주 : 나 결혼 할 거야.
강석 : 혜주야?
혜주 : 병원 차려 달라는 사람보다 더 못한 사람이라도 상관없어.
사기꾼이라도 상관없고, 평생 나 천치 취급하면서 업신여길 사람이라도 상관없어.
강석 : (혜주 어깨 잡으며)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혜주 : 내가 빠져줘야 오빠 그만 둘 거 아냐?
강석 : (멍하니 보는)
혜주 : 내가 결혼 해버려야 그 사람한테 오빠랑 하교수님 같이 있는 모습 안 보게 해줄 거 아냐?
강석 : 어떻게....어떻게.....그런 생각을 하니?
네가 빠져주면 하단아 그 여자가 그 놈한테 갈 거 같아?
혜주 : 거기까진 몰라.
강석 : 그런데?
혜주 : 내가 빠지면 오빠도 빠질 거란 건 알아.
그럼, 그 사람 더는 오빠랑 하교수님 안 봐도 되는 거잖아?
강석 : 너한테 그 자식, 그렇게 대단한 거냐? 네 인생 엉망으로 만들면서까지
그 자식 가슴 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을 만큼? 대체 그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해?
혜주 : (보는)
강석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날 보게 하고 싶다고 생각해야 하는 게 사랑이라는 거잖아?
혜주 : 그런 사랑.....꿈 꾼 적 없어.
그냥, 그 사람이 저기 있어서, 나도 여기 있구나, 그런 생각 밖에 한 적 없어.
강석 : 제발 네 자신을 봐, 혜주야. 네가 얼마나 착하고 이쁜지 너 자신을 보라구.
너 누구한테든 사랑 받기에 충분한 애야.
혜주 : 날 더 많이 사랑하는 건, 진짜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강석 : ......
혜주 : 그 사람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거, 이것 밖에는 없는 거 같아. 빠져주는 거.
이것 밖에 없으니까 할래.
강석 : 그러지마, 혜주야. 그건 널 학대하는 거야.
혜주 : 오빠, 무서운 사람이란 거 알아.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가는 사람이란 것도.
내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오빠 절대 그만 두지 못할 사람이야. 나가줘. 자야해.
강석 : .....
#.17 씬. 강석의 방.(밤)
강석, 괴로운 심정으로 들어와서 앉는. (F.O)
#.18 씬. 종가 전경.(아침)
#.19 씬. 만기의 방.(아침)
식사하고 있는 만기, 석호, 수영, 주정. 동동, 각자에게 종이 세 장 씩을 주고 있다.
만기 : 이게 뭐냐?
동동 : 보시면 아세요. (나가는)
#.20 씬. 마루.(아침)
영인, 태영, 삼월, 조만, 단아에게도 종이 세 장 씩을 주는 동동.
태영 : 이게 뭔데?
동동 : 크리스마스 선물?
태영 : 무슨 크리스마스 선물이 이렇게 조촐하냐?
(읽어보는. 종이에 써진 글자. 구두따끼.(괄호 안에 500원 줏서도 대고 안줏어서 됨니다)
야,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영인 : (웃으며) 동동아, 맞춤법 너무 이상하다.
동동 : 제가 받아쓰기 아직 잘 못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어요?
태영 : 야, 이게 구두를 따겠다는 거냐? 닦겠다는 거냐? 그리고 500원을 주워달라는 거냐? 뭐냐?
삼월 : 난 무슨 뜻인지 다 알겠구만 그러네. 글자 늦게 깨치는 건 하과장 어릴 때랑 똑같네.
태영 : (동동 머리 쥐어박으며) 임마, 크리스마스 선물로 에비 망신을 주냐.
주정E : 어머, 오빠는 공짜예요?
#.21 씬. 만기의 방.(아침)
만기 : 난 500백원 달라는 말은 없다.
태영, 동동 들여다보는.
태영 : 할아버지는 공짜로 해드리는 거냐?
동동 : 같은 방 쓰는 정이야.
만기 : 고맙다.
#.22 씬. 마루.(낮)
동동, 식구들 구두 모두 가지고 앉아서 닦고 있는.
삼월 : (옆에 앉아서 걸레질 하면서) 우리 동동이 고생하네.
동동 : 이렇게 한꺼번에 다 닦아달라고 할 줄은 몰랐어요.
삼월 : 그러게나 말이다. 하루하루 돌아가면서들 닦아달라고 할 것이지.
동동 : 할머니? 어깨 주물러 드리는 건요, 공짜예요. 그 쿠폰 아무 때나 사용하셔도 되요.
삼월 : 난 같은 방 쓰는 정도 없는데 어째 공짠구?
동동 : 밥 해주시는 정이예요.
삼월 : 어이구. 우리 동동이 말 하는 것도 어찌 이리 이쁘누.
석호, 영인, 주정, 수영, 태영, 단아 각자 방에서 나오는.
주정 : 다 닦았니?
동동 : 다 돼가요. (침까지 뱉어가면서 열심히 닦는)
태영 : (쥐어박으며) 자식아, 드럽게.
동동 : 원래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삼월 : 제대로 하고 있구만 왜 쥐어박누.
주정 : 자 5천원.
동동 : (놀라서) 500원 주셔도 되고, 안주셔도 되는데요?
주정 : 크리스마스 보너스다.
동동 : (얼른 받고 인사하며) 고맙습니다, 대고모 할머님.
수영 : (만 원 짜리 주는)
동동 : 으악.
수영 : 큰 아버지 스케일 크지?
동동 : 네.
주정 : (수영에게) 너 고모 할머니 기죽인다.
수영 : 동동이한테 5천원 거슬러 받을까요?
주정 : 야, 그럼 나만 더 미움 받지.
단아 : 고모는 500원 대신 만화책 사다줄게.
동동 : 네, 고맙습니다. 아빤?
태영 : (500원 주는)
동동 : (흘겨보는)
태영 : 500원 줘도 되고, 안줘도 된다면서? 싫으면 다시 줘.
동동 : 아빤, 스케일 진짜 무지 작은 거 알지?
영인 : 자, 할머니 선물이다. (뒤에 감추고 있던 상자 꺼내주는)
동동 : (보면)
영인 : 게임기야.
동동 : 우와. 할머니 짱이세요. 할머니?
영인 : 응?
동동 : 제가요, 밖에 나가선 꼭 아줌마라고 불러드릴게요.
#.23 씬. 강석의 집 식당.(아침)
천갑, 영자, 강석, 혜주 식사하고 있는.
천갑 : (혜주를 보면서) 저 놈의 자식, 어젯밤부터 왜 저렇게 마음에 들게 구나 모르겠네.
영자 : (혜주 보면서 흐뭇하게) 이제 시집가겠다고 마음먹으니까
식구들하고 한 끼라도 더 같이 먹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뭐.
그래, 혜주야, 좀 좋아. 이렇게 식구들끼리 다 모여서 밥 먹으니까.
강석 : (그런 혜주가 안타까운 느낌으로 보는)
영자 : 시간 없으니까 오늘은 나가지 말고, 엄마랑 피부 관리 받으러 가자.
천갑 : 옷도 좀 사줘. 구두도 좀 사주고. 아, 그래, 쟤 목걸이 반지 그런 거 별로 없잖아?
사파이어랑 루비랑 그런 거 구색 맞춰서 좀 사줘.
영자 : 그러지 뭐. 봐라, 네가 곰살 맞게 구니까 아버지랑 엄마랑 뭐든 해주고 싶어서 이 난리잖아?
혜주 : 고맙습니다.
천갑 : 이 놈아. 너무 깍듯하게 그러지 말고. 아빠, 고마워용. 그런 식으로 좀 해.
강석 : (혜주가 못내 마음 아프고)
#.24 씬. 종가 앞.(아침)
석호, 영인, 수영, 태영, 주정, 단아 나오는.
석호 : 방학인데도 계속 학교에 나가야 하는 거니?
단아 : 네, 논문 준비도 해야 하고, 박물관에도 계속 체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석호 : 너무 무리하지마라. 다리가 또 말썽이라면서?
단아 : 다 나았어요.
영인, 차에 타려다가. 차 뒤에 붙어있는 스티커 보는. ‘임산부가 타고 있습니다’라는 스티커.
영인 : 이게 뭐야? 누가 이런 걸?
태영 : 어머님. 소자의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영인 : (어이가 없고) 이런 거 달아놓으면 차에서 내릴 때 사람들이 누가 임산부야 하는 눈길로 볼 거 아냐?
태영 : 그게 왜요? 어머님?
영인 : 몰라서 물어요, 작은 아드님?
태영 : 회사 홍보지에 임신했다는 말씀 못하신 걸 차마 억울해 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일부러 고른 선물인데요.
아,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영인의 손에 쥐어주는)
영인 : 이건 또 뭐예요?
태영 : 휴대폰 전자파 방지 스티커예요. 꼭 붙여주세요, 어머님.
주정 : 왠지 선물 치곤 열 받게 하는 구석이 좀 있어 보인다.
태영 : 어머나, 그러세요, 할머니? 전 절대 그런 마음 없는데.
석호 : (영인 팔 끌면서) 가지.
영인 : (석호에게 귓속말하는 느낌으로) 나 저 작은 아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태영 : 어머님, 다 들리거든요.
#.25 씬. 박물관.(낮)
단아, 전시품 닦고 있다가, 생각에 잠기는.
전시품 닦다가 떨어뜨리던 강석의 모습이 떠오르고.
노래방에서 ‘허니’ 부르며 춤추고 있던 강석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미소가 지어지는데.
남교수E : 이번 전시품이 그렇게 마음에 드니?
단아 : (생각에서 깨어나 돌아보는)
남교수 : 그렇게 좋아? 혼자 실실 쪼개구?
단아 : 네, 좋아요. 이번 전시품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남교수 : 그 싸가지가 기부한 돈으로 구입 한 거지? 이것들?
단아 : 네.
남교수 : 단아야?
단아 :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 알아요.
남교수 : 너 정말 그 싸가지한테 마음 있는 거니?
단아 : ......
남교수 : 왜 대답 못해?
단아 : 그냥 만나보고 있는 중이에요.
남교수 : 너도 알잖아? 걔 너랑은 안 어울린다는 거?
단아 : 저랑 어울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요?
남교수 : 마음이 따뜻한 사람.
단아 : (보고)
남교수 : 걘 첫만남부터 그거하곤 거리가 멀다는 거 알아봤잖니? 우리? 노교수님 찾아와서 한 짓도 그렇구.
단아 : 어쩌면....
남교수 : 어쩌면 뭐?
단아 :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남교수 : 전부가 아니면?
단아 : ......
남교수 : 너 정말 그 사람한테 뭔가 느끼고 있는 거니? 그런 거야?
단아 : 그냥.....그 사람하고 있으면 시간이 잘 흘러가줘요. (전시품 들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남교수 : (안쓰러운 느낌으로 보는) 단아야?
단아 : ....
남교수 : 너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다는 거 알아. 그렇지만 시간이 잘 흘러가준다는 것 때문에
네 마음 착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럼. 더 상처 받을 테니까. (나가는)
단아 : 그래도 진하 오빠 갔을 때보다 더 아프진 않을 거잖아요.
#.26 씬. 커피숍.(낮)
현규, 책을 보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
현규 : (고개를 들면)
들어서는 강석.
현규 : (일어나는)
강석 :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현규 : .....
강석, 현규 앉아있는.
강석 :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거, 어쩌면 염치없을 수도 있다는 거 모르지 않아. 그런데도 올 수 밖에 없었다.
현규 : ......
강석 : 혜주 그 자식 결혼하겠다고 한다.
현규 : (무슨 말인가 하는 느낌으로 보는)
강석 : 지가 빠져주면 내가 하교수와 같이 있는 모습 네가 안 봐도 될 거라면서.
현규 : 진짜 이상한 동생을 두셨네요.
강석 : 그래, 아주 이상한 놈이지, 내 동생이란 놈. 근데, 그게 그 녀석 방식의 사랑인 거 같다.
현규 : 혹시 지금 자백 하러 오신 겁니까?
강석 : (보면)
현규 : 동생 때문에 하교수와 쇼를 했는데, 일이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 네가 좀 어떻게 해봐라.
강석 : 하교수와 나, 니들이 생각하는 쇼 같은 거 아니다.
현규 : .....
강석 : 그래서 염치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다고 한 거구.
혜주와 너 때문에 어렵게 시작한 그 여자와 헤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현규 :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강석 : 그 자식 말려줄 사람은 너 밖에 없어서 찾아왔다.
그 자식, 사기꾼이라도 상관없고, 평생 천치라고 업신여길 놈이라도 상관없다고 한다.
난 내 동생이 사랑 때문에, 인생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건 보고 싶지 않다.
현규 : 그래서요? 그건 본인이 선택해야 할 일 아닌가요?
강석 : 네가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 둘 거다, 그 놈.
현규 : 무지하게 이기적이시네요. 난 하교수와 헤어질 생각 전혀 없다 그러면서,
나더런 자기 동생 인생 잘못 되지 않게 말려 달라, 그래서 나한테 남는 게 대체 뭡니까?
강석 : 아무 것도 없겠지. 너만 바라보는 혜주 그 놈 계속 보는 것도 부담스럽다는 거 알아.
하지만, 결혼하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그 놈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어서 찾아온 거다.
현규 : 동생을 위해서 뭔가 좀 더 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강석 : (보면)
현규 : 그 사람과 끝내겠다, 그럼 나도 그쪽 동생을 말려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강석 : (보다가 일어서며) 미안하다. 내가 잘못 찾아온 거 같구나.
네가 내 동생을 말려줄 이유가 없다는 거 잘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와 본 거다. (나가는)
현규 : (답답하고 화가 나는 심정으로 보는)
#.27 씬. 박물관.(낮)
단아, 전시창을 닦고 있는데, 걸어오는 강석.
단아 : (보고) 이 시간에 또 웬일이에요? 현규랑 혜주 방학해서 학교에도 없을 텐데.
다른 작전 짜기로 했었던 거 아니에요?
강석 : (전시품 쪽으로 시선을 돌려 서면서) 혜주, 그 놈이 아무 놈하고나 결혼을 하겠답니다.
단아 : ......
#.28 씬. 회사 지하 주차장.(낮)
수영, 걸어오는.
수영 : (멈춰서는)
진아, 수영의 차를 물걸레로 열심히 닦고 있다.
수영 : (다가오면서) 뭐해요?
진아 : (돌아보고, 당황하면서) 근무 시간에 왜 내려오셨어요?
수영 : 외부에 나갈 일이 좀 있어서요. 그런데 지금 뭐하는 거예요?
진아 : (미소 지으며) 저도 자주 얻어 타는 찬데, 택시비도 안내고 얻어 타는 게 미안해서요.
수영 : 자동 세차 하는데 가서 하면 되는데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해요. (걸레 뺐으려고 하면서) 그만 해요.
진아 : 됐어요, 다 했어요. 번쩍 번쩍 광이 나죠?
저 보면 볼수록 못하는 게 없다, 속으로 감탄하시죠? 지금?
수영 :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음식 솜씨는 꽝이잖아요.
진아 : (곱게 흘겨보며) 사람 약점 가지고 공격하는 거 비열한 거거든요.
수영 : 살면서 못해본 일 다 해 보려구요.
진아 : 와, 진짜 알차게 뽑아 먹으신다.
수영 : (차 문 열면서) 이따 6시쯤에 돌아올 거니까, 여기 내려와 있어요.
진아 : 6시면 퇴근 시간인데, 다시 돌아오시려구요?
수영 : 세차비는 줘야 할 거 아니에요. (차타고 출발하는)
진아 : (웃으면서 보고 있는)
#.29 씬. 박물관.(낮)
단아, 강석 앉아있는.
단아 : (어두운 느낌으로)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랑 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혜주.
강석 : 어려서부터 좀 이상한 놈이었어요.
단아 : 이상해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강석 : (보면)
단아 : 그런 거 보면, 우린 다 너무 이기적이에요. 다들 그러잖아요.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널 사랑할게.
그건 어쩌면 진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건 어쩌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거래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는데.
강석 : 그쪽도 그랬습니까?
단아 : (보면)
강석 : 네가 정말 단아니, 라고 불렀던 사람이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나도 사랑해보지, 하면서 시작한 거냐구요?
단아 :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강석 : ......사랑 한다는 말도 한 적이 없었단 겁니까? 그럼, 대체 어떻게 안겁니까?
단아 : 그런 건 말 안 해도 아는 거잖아요.
강석 : 모르겠네요, 나 같은 놈은. 내가 사람들이 말 안 해도 느끼는 건,
저 인간들이 날 까칠한 놈이라고 기분 나빠하는구나, 그런 거 정도니까.
그럼, 대체 언제 안겁니까? 말도 안하는데, 언제 어떻게 저 사람이 날 사랑하는구나, 하고 느꼈냐구요?
단아 : 방학 때마다 청학동으로 내려와서 며칠씩 지내다 갔어요, 그 사람.
강석 : 아, 방학 때 딴 데로 놀러가지 않고, 이 재미없는 산골짜기까지 찾아오는 거 보니까,
날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가. 사진만 구한말이 아니라, 정서도 무지 구한말 적이네요.
단아 : 그랬을지도 몰라요, 제가 워낙 촌스러우니까.
강석 : 웬일입니까? 순순히 인정을 다하고.
단아 : 15살 여름이었을 거예요. 서울로 가면서 작은 시집 한 권을 줬어요.
바이런 시집이었는데, 이렇게 써있었어요. 선한만큼 강해져라, 단아야.
강석 : .....
단아 : 그때 생각했어요, 아, 이 오빠도 나한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강석 : 참 애매한 사랑들 하셨습니다.
단아 : (보는)
강석 : 비위가 상해서 그래요. 난 15살 때, 우리 아버지가 큰 돈 버신 기념으로
학교에 그랜드 피아노를 기부하셨는데, 그걸 가지고 자식들이 졸부 아들이 어쩌구, 저쩌구
뒤에서 수군거리는 바람에 학교 애들 거의 전부를 상대로 1년 내내 쌈질을 한 적이 있어요.
누군 15살을 그렇게 살벌하게 보냈는데, 누군 시집 주고받으면서 연애질이나 하고.
단아 : 연애질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강석 : 누가 봐도 그거 연애질이거든요.
단아 : (보는)
강석 : 비위가 상해서 깐죽거리는 거니까, 얘기나 계속 해요.
그럼 대체 언제 진짜 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그랬던 겁니까?
단아 : .....
강석 : 깐죽거리지 않을 테니까 얘기해 봐요. 입 닥치고 있을 테니까.
단아 :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서울로 왔어요. 개학하기 며칠 전이었는데,
어느 날 밤에 참고서 살 게 있어서 집을 나왔는데, 오빠가 서있었어요.
어떻게 왔냐구 물었더니, 그랬어요. 며칠 됐어. 며칠 동안 혹시 만나질까 하고 집 앞에서 매일 서 있었다구.
어른들 보시면 창피할까봐 어른들 나오시면 전봇대 뒤에 몸도 숨기고 그랬다구.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죠, 그랬더니. 그냥 만나졌으면 했다구.
그러면서 그랬어요. 넌 밖에 진짜 안나오더라,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내가 좋았다구.
그날 밤, 일기에 썼어요. 이 세상에 날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좋았다구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강석 : 그런 기억들이 당신을 붙잡고 있는 겁니까?
단아 : (보는)
강석 : 기억이란 거,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는 거 아닌가?
단아 : (일어서는데)
강석 : 희미해 질까봐 겁난 적 없습니까?
단아 : .....
강석 : 희미해지면, 잊혀질까봐 두려워서?
단아 : (전시대 앞으로 걸어가는데)
강석 : (일어나서 단아 옆으로 가서 팔목을 잡고 걸어가는)
단아 : 왜 이래요?
강석 : (단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면서) 뭐가 걱정입니까?
나 같은 놈 때문에 그 가슴 저린 기억들이 희미해질 것도 아닌데?
단아 : 일 해야 해요.
강석 : 답답해요. 나가서 바람이라도 쐽시다.
#.30 씬. 마루.(낮)
병도, 카메라 들고 있고, 그 옆에 주정 다이어리 들고 앉아서 메모하고, 삼월 앉아있는.
주정 : 그래서 할멈? 17살에 시집오는 애기씨를 따라서 시집을 왔는데?
삼월 : 근데, 이런 게 정말 도움이 되긴 하는 거야? 나 같은 사람 얘기 들어서 뭐하려구?
주정 : 말했잖아. 종가에서 한 평생을 보낸 한 여인이 보는 종가 문화란 무엇인가 그것도 재미있을 거 같다구.
삼월 :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 재밌어 할라나.
주정 : 시집가는 애기씨 따라가겠다구 울고불고해서 따라왔는데.
아, 참 그때 우리 오빠랑 애기씨 결혼하는 날은 어땠어?
삼월 : 뭐가 어때, 혼인하는 날이야, 다 똑같지?
주정 : 그래도, 같은 해에 태어난 애기씨는 시집가는데,
부엌살이 하러 가야 하는 심정이 과히 좋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삼월 : 왜 안 좋아. 우리 봉숭아처럼 어여쁜 애기씨가 관옥 같은 신랑님한테 시집을 가시는데.
주정 : 관옥? 우리 오빠가? 젊었을 땐 그렇게 인물이 좋았다구?
삼월 : 그럼. 멸문한 가문에 종손이라고 하지만, 우리 애기씨 아버님께서 빈한한 집안이라는 것도 아시면서
시집을 보내셨을 때는 신랑감 됨됨이 하나만 보셨다는 건데, 관옥 같으셨구 말구.
초례청에 턱 하니 나오시는데, 열 일 곱 소년이 어쩌면 그렇게 의젓하시고, 당당하시던지......
주정 : 할멈? 그때 우리 오빠한테 반한 거 아냐?
삼월 : (놀라서) 세상에 무슨 그런 망측한 소리를.
(벌떡 일어나면서) 괜히 일하는 사람 불러 앉혀놓고 흉한 소리를 하네.
만기, 들어오는. 주정, 병도 일어서고.
주정 : 평촌 어르신 편찮으셔서 문병 가셨다면서요? 어떠세요?
만기 : 말씀은 괜찮다고 하시는데, 기력이 많이 쇠하신 거 같더구나. (방으로 들어가는)
#.31 씬. 하옹의 방.(낮)
병도, 카메라로 찍고 있고, 그 옆에 서있는 주정.
주정 : 이런 인서트는 나중에 찍어도 된다니까.
병도 : 회장님 고단하셔서 인터뷰 못 하신다잖아. 놀면 뭐해, 장독이라도 깨는 거지. 그런데 선배?
주정 : 뭐?
병도 : 저 삼월 할머님 말이야.
주정 : 삼월 할머니가 뭐?
병도 : 진짜 회장님을 짝사랑 하셔서 평생 이 집안 부엌일이나 하시면서 사신 거면,
인간 다큐 제대로 하나 만들 수 있을 텐데?
주정 : (쥐어박으며) 삼월 할멈 놀리느라 한 소리다, 이 멍청한 인간아.
우리 삼월 할멈은 애기씨 말고는 사랑한 사람이 없는 양반이야.
#.32 씬. 부엌.(낮)
삼월, 그릇을 만지면서.
삼월 : 애기씨, 귀 씻으세요. 어째 그리 흉한 말을 입에 담는지. 죄송하고, 면구스럽네요, 애기씨.
#.33 씬. 병실.(낮)
말순, 만화책 보고 있는데, 들어오는 태영.
말순 : 벌써 퇴근이야?
태영 : 현장 나갔다가 회사로 안 들어와도 된다고 해서 왔다.
말순 : 나 밥 사주라.
태영 : 너 아주 이젠 엉겨 붙는다.
말순 : 내 처지 다 뽀록났는데, 얹혀 갈란다.
태영 : 참, 인생 지 맘대로 편하게 살아요.
말순 : 삼계탕 먹자.
태영 : 어제 밤에도 먹었잖아.
말순 : 몸에 좋은 거 자꾸 먹어야 빨리 나을 거 아냐.
(침대에서 내려오며, 태영 어깨에 팔 척 두르며) 가자, 친구.
태영 : 나 왜 말리는 느낌이 드냐?
#.34 씬. 삼계탕 집.(낮)
말순, 삼계탕 맛있게 먹고 있는.
태영 : (보고 있는) 천천히 좀 먹어라. 어젯밤에도 한 그릇 뚝딱 해치우더니. 진짜 잘 먹는다.
말순 : 공짜로 얻어먹으니까 술술 넘어간다.
태영 : 너 나 같은 친구 없었을 땐, 무슨 맛에 살았냐?
말순 : 그러게.
태영 : (물끄러미 보는)
말순 : (먹다가 고개 들고) 왜?
태영 : 나 친구 삼으니까 좋냐?
말순 : 응.
태영 : 자식, 솔직할 때가 다 있네.
말순 : 내가 밥 사주지 않아도 되는 친군데 그럼 내가 왜 싫겠냐?
태영 : 너 연애도 한번 못해봤지? 남자가 사주는 밥 같은 거, 한번도 먹어본 적 없지?
말순 : (화들짝) 내, 내가 왜 연애를 못해봐?
태영 : 그럼 해봤냐?
말순 : 그, 그럼.
태영 : 언제? 어떤 놈하구?
말순 : 그. 그게. 그게 말이야.
태영 : 더듬지 말구.
말순 : 내가 악착같이 돈 벌어서 뒷바라지 한 놈이 있었거든.
태영 : 식구들 뒷바라지에 남자 뒷바라지까지, 너도 팔자 어지간하다. 그래서?
말순 : 진짜 뜨겁게 무섭게 사랑했는데.
태영 : 했는데?
말순 : 취직을 한 거야, 무지하게 크고 좋은 회사에, 그런데 그 회사 사장 딸이 내 애인을 뺏은 거야.
진짜 피눈물 나더라. 내가 그 인간 어머니 병원비 대느라 전세도 뺐었거든.
근데 그 자식이 그 여자랑 잘 되면서 나한테 그 돈을 돌려주는 거야.
근데 더 웃기는 건, 그 자리에 그 여자를 불러내서 나를 비참하게 만든 거지.
태영 : (갸우뚱하면서) 야,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말순 : 응?
태영 : 너 그거, 너랑 나랑 처음 경찰서에서 만난 날 어떤 여자애랑 남자애 잡혀 와서 했던 그 스토리 아니냐?
말순 : (무안해서 눈만 꿈뻑이는)
태영 : 맞지? 그 얘기지?
말순 : 너도 그때 같이 있었냐?
태영 : 뭐 이런 애가 다 있냐. 지어내려면 영화 같은 거나 베끼던지.
나 머리 나쁘다고 구박은 억시게 하면서 지도 오십 보 백보네.
말순 : 다 먹었다, 가자. (일어서면)
태영 : 세상에 얼마나 경험이 없으면 그런 얘기까지 베껴 먹냐? 너도 진짜 한심 무인지경이다.
말순 : 가자니까.
태영 : (따라가면서) 너 연애 해본 적 없지? 없지? 그렇지?
말순 : 있어. 있다구, 너무 가슴 아픈 얘기라서 차마 말을 못하는 거다.
태영 : 해봐, 해봐.
말순 : (버럭) 해 떨어질 때 됐는데, 왜 자꾸 해는 보라구 난리야?
#.35 씬. 야외 장소.(낮)
강석의 차 세워져 있고, 강석, 운전석에, 단아 그 옆에.
강석 : (뒤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단아 : 바람 쐬자면서요? 안 내려요?
강석 : 어젯밤에 혜주 자식 때문에 머리 아파서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해요.
다시 운전해서 가려면 잠깐 눈 좀 붙여야 할 거 같아요.
단아 : 그런데 뭐하러 여기까지 와요?
강석 : 당신도 그렇고 헤주 놈도 그렇고. 난 정말 여자라는 인간들을 잘 모르겠습니다.
단아 : (보는)
강석 : 그깟 사랑이 대체 뭐라구, 그렇게 절절 매는지.
인생에 사랑 말고, 할게 얼마나 많은데 그깟 사랑 하나에 다 걸고 살아가는지.
단아 : 여자만 그런 거 같아요?
강석 : (눈 뜨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단아 : .....
강석 : 그 사람도 그랬습니까? 추운데 있다는 그 사람도, 사랑 하나에 다 거는 그런 인간이었습니까?
단아 : ....(차에서 내리는)
단아, 내려서 걸어가는.
강석 : (눈을 뜨고 걸어가는 단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36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천갑, 연속극을 보는. 들어오는 영자와 혜주, 쇼핑 가방 잔뜩 들고.
영자 : 당신 일찍 들어왔네?
천갑 : (건성으로) 응. 응.
영자 : (다가와서) 연속극만 해주는 데가 당신 때문에 생긴 걸 거야. 여보, 여보. 오늘 돈 좀 썼어.
천갑 : 응. 잘 했어, 잘 했어.
영자 : 오는 길에 아파트도 하나 보고 왔어.
천갑 : 잘 했어, 잘했어.
영자 : 혜주 신혼 살림할 아파트도 보고 왔다구.
천갑 : 잘했다니까.
영자 : 정말, 연속극만 하면 정신을 못 차리지. 혜주야, 사 온 거 가지고 올라가. 오늘부턴 잠도 푹 자고 그래야 해.
괜히 맞선 보는 날 얼굴에 뾰루지 나고 그러면 골치 아파.
혜주 쇼핑 봉투 들고 올라가는.
영자 : 혜주 쟤가 어쩐 일인지 모르겠어.
천갑 : 아, 쟨 저기서 팍 소리를 질러야 감정이 사는데.
영자 : (버럭) 여보?
천갑 : (놀라서) 왜?
영자 : 혜주 쟤가 진짜 시집가기로 마음을 먹은 거 같다니까.
결혼하면 사줄 아파트 보러 가자는데도 아무 소리 안하더라니까.
천갑 : 간다잖아, 시집.
영자 : 아, 살면서 매일 오늘만 같으면 원도 한도 없겠다.
#.37 씬. 혜주의 방.(낮)
혜주, 상자에 그동안 모아들인 병들, 종이컵들 담고 있는. 침대 위에 쇼핑백이 놓여져 있고.
혜주 : (천천히 담다가, 현규에 대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웃으며 농구하던 모습. 술에 취해 싸우던 모습, 소리 지르던 모습 등등.
갑자기 울음이 터지면서 주저앉는 혜주.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38 씬. 야외 장소.(낮)
강석, 차에서 잠이 들어있고, 단아 차에 올라타는.
강석 : (잠에서 깨어나 바로 앉으며) 얼마나 잔거예요?
단아 : 한 시간쯤 됐어요.
강석 : 왜 안 깨웠어요?
단아 : 피곤해서 자야겠다고 했잖아요?
강석 :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구.
단아 : (커피 캔을 건네는) 따뜻해요, 마시고 출발해요.
강석 : (커피 캔을 받는) 나 자는 동안 뭐 했어요?
단아 : 그냥 걸어 다녔어요.
강석 : 추운데 왜 걸어 다녀요. 그냥 차 안에 있지.
단아 : 사람 옆에 있으면 깊이 못 자잖아요.
강석 : (보고)
단아 : 마셔요.
강석 : 그럼 왜 아주 푹 자게 두지, 차에 올라타서 깨웁니까?
단아 : 얼어 죽을까 봐요.
강석 : (웃으며 커피 캔 따서 마시는) 나에 대한 애정의 한계는 1시간이다 그거지.
단아 : (보는)
강석 : 왜 애정이라는 말이 섬뜩합니까?
단아 : 그냥 자게하고 싶었는데, 지금 출발해야 과외 시간에 늦지 않을 거 같았어요.
강석 : 내가 긴장 시키겠다고 해서 그쪽도 그런 겁니까?
단아 : 네?
강석 : 나에 대한 애정의 한계가 1시간이냐고 하니까 더 자게 해주고 싶었다면서요?
단아 : .....
강석 : 그런 말 사람 무지하게 헷갈리게 한다는 거 알아요?
단아 : 게임의 규칙은 공정해야 하는 거잖아요. 내 말 한마디도 믿지 마세요. 특히 헷갈리게 들리는 말은.
강석 : (보다가) 아, 저 필살기. (커피 캔 내려놓으려는데)
단아 : (캔 잡으면서) 다 먹고 출발해요. 운전하다가 졸면 어쩌려구 그래요?
강석 : 나랑 같이 죽을까봐 겁납니까?
단아 : .....
강석 : 마음에도 없는 놈하고 죽으면서 스캔들 될까봐?
단아 : 죽는 건 겁 안 나는 거 같은데, 그쪽하고 같이 죽는 건.....
강석 : 겁납니까? 인생 지저분하게 장식 될까봐?
단아 : 같이 죽으면, 죽어서도 만날까봐서요.
강석 : (의미있는 눈길로 보는)
단아 : (커피캔 들어서 주는) 마셔요.
강석 : (받아 마시는) 죽어서까지 만나기 싫은 인간이다. 이강석 인생 진짜 비참해지는군.
단아 : (앞만 보고 있는)
#.39 씬. 회사 주차장.(밤)
진아, 서있는, 수영의 차 다가오는.
수영 : (차에서 내리는) 미안해요.
진아 : 뭐가요?
수영 : 5분 늦었잖아요.
진아 : (웃고) 진짜 너무 모범생 스타일이시다.
수영 : 나 약속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사람인데.
진아 : 모범생이신 거 안다니까요.
수영 : 세차비에 늦은 벌금까지 저녁 비싼 거 사줘야겠다.
진아 : 아니 그렇다면, 컵라면에 삼각 김밥, 거기에 어묵까지 사주시겠다는 말인가?
수영 : (웃는)
#.40 씬. 레스토랑.(밤)
진아, 주위를 둘러보며 황송한 느낌으로 앉는. 수영 그 앞에 앉는.
진아 : 왜 이렇게 비싼 데 와요?
수영 : 벌금까지 보태야 하니까요.
진아 : 저 이런 데 처음이에요. 그냥 가요, 아저씨, 우리 편의점 가서.....
수영 : 나도 자주 오는데 아니에요. 외국에서 손님들 오셨을 때 몇 번 접대하러 와봤어요.
진아 : 그런 델 뭐하러 오세요?
수영 : 세차 해줬잖아요?
진아 : 무슨 세차비가 이렇게 비싸요.
수영 : 밥 사줄 거 아닌데.
진아 : 네?
수영 : (웃으며) 그냥 쥬스 한잔 사줄 건데. 나 월급 많지 않아요.
#.41 씬. 병원 복도.(밤)
말순, 뚫어지게 장기를 보고 있는.
장기 : 걔가 세 번째 애였거든요.
말순 : 너 두 번째까지처럼 맹숭스러우면 죽는다.
장기 : 이번엔 화끈하다니까요. 제가요, 교통계 처음 나왔던 날인데. 그 여자애가 음주로 걸린 거예요.
진짜 몸도 못 가눌 만큼 얼마나 마셨던지.
말순 : 음주 단속된 애랑 연애를 했단 말이야?
장기 : 들어 좀 보세요, 화끈하다니까요. 단속을 했는데, 너무 취해서 도저히 그냥 보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경찰서까지 데리고 와서 의자에서 좀 자게 했거든요.
말순 : 그래서?
장기 : 근데 새벽에 퇴근하려고 하니까 줄래줄래 쫓아오더라 그거예요.
말순 : 왜?
장기 : 왜긴요? 저한테 한눈에 뻑이 간 거죠.
말순 : 그게 말이 되냐?
장기 : 그만 할까요?
말순 : 아냐, 아냐, 그냥 해봐.
장기 : 그래서 어째어째 하다가 같이 해장국 집에를 갔다 그겁니다.
해장국을 먹다 보니 서로 말이 좀 통하는 거예요.
그런데 얘가 아 나 너무 어지럽다, 어디 좀 가서 눕고 싶다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능글맞게 웃으면서) 모텔로 갔는데....(갑자기 말순을 끌어안으며) 아, 몰라, 몰라.
태영, 장기의 목 뒤를 잡아 일으키며.
태영 : 지금 뭐하는 거야?
장기 : (놀라서 올려다보는)
말순 : (장기 얼굴 때리면서) 이게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장기 : 연애 얘기 해달라면서요? 그때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건데.
에이, 진짜. 해달라고 조를 땐 언제고 때리긴 왜 때려. (일어나서 뛰어가는)
말순 : (태영 눈치 보면서) 쟤가 은근히 날 여자로 좋아하는 거 같아.
태영 : 얼씨구.
말순 : 끌어안고 그러는 거 봤잖아. 만화책 빌려 왔어? 타짜 3권 빠진 거 빌려왔어?
태영 : (옆에 앉으며. 만화책 봉투 내려놓으면서) 그냥 안 해봤으면 안 해봤다고 해라.
어떻게 저런 친구 연애담까지 베껴먹으려고 그러냐?
말순 : 왜 자꾸 안 해봤다고 그러는데?
태영 : 얘야. 말순아? 촌스러운 이름 말순아?
말순 : 이름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태영 : 너 나 같은 남자하고 친구 먹는다는 것만 봐도, 너 연애 안 해본 애야.
말순 : 뭐?
태영 : 보통의 여자들은 그렇거든. 나 같은 남자하고 절대 친구 안 해.
왜냐? 친구를 하기엔 욕정이 너무 들끓거든.
보통의 여자들은 나 같은 남자를 보면 무조건 저 품에 뛰어들고 싶다 그래지거든.
말순 : 얼씨구, 절씨구다.
#.42 씬. 레스토랑.(밤)
진아, 수영 식사하고 있는.
진아 : (배시시 웃으면서) 쥬스 한잔만 사주시겠다더니.
수영 : 반전의 묘미요.
진아 : (웃고) 근데, 이거 정말 얼마나 하는 거예요? 무지하게 비싸죠?
수영 : 그냥 먹어요.
진아 : 와, 오진아 인생 진짜 화려해진다. 이렇게 근사한데 와서 이렇게 비싼 음식도 먹어보고.
아저씨 아니면 제가 언제 이런 데 와보고, 이런 거 먹어보겠어요.
수영 : (표정 어두워지는)
진아 : (눈치 보고) 제가 뭐 말 잘못 한 거예요?
수영 : 어쩌면 그 친구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진아 : .....
수영 : 남들이 보면, 우리 원조교제 그런 느낌 들 수도 있을 텐데.
진아 : 사람들 눈길 부담 되세요?
수영 : 난 그냥 진아씨한테 좋은 음식 먹여주고 싶었던 건데,
사람들이 보면, 나이 먹은 놈이 어린 아가씨한테 수작 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진아 : 저한테 수작 거시는 거세요?
수영 : .....
진아 : 아니시잖아요. 제가 보기에 아저씨 그럴 주제도 못되세요.
수영 : .....
진아 : 제가 말 너무 막하는 거예요?
수영 : 살짝 삐치려고 하네요. 내 주제가 그렇게 한심한가 해서.
진아 : 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가슴에 꼭 하나 새기고 사는 말이 있어요. 나만 아니면 된다.
수영 : .....
진아 : 학교 때요, 반에서 뭐만 없어지면 애들이 고아원 애라고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
커서도 그랬어요. 알바 할 때도,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돈 사고만 나면 제일 먼저 절 의심하더라구요.
그때마다 저 자신한테 말해줬어요. 나만 아니면 된다.
그러니까요, 아저씨, 우리 그렇게 해요. 우리만 아니면 돼. 사람들 자기들 보고 싶은 대로 봐라.
수영 : (물끄러미 보는)
진아 : 너무 깡 있어 보이세요?
수영 : 가끔은, 진아씨가 나보다 어른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난 나이만 먹었지 대체 뭐 하나 제대로 하면서 살아오긴 한 건가 하고.
진아 : 그래서 저 만나셨는지도 모르잖아요? 세상에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만나는 법은 절대 없대요.
수영 : (그런 진아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43 씬. 강석의 집 거실.(밤)
강석, 단아 들어오는데, 울면서 뛰쳐나가는 혜주.
강석 : 혜주야.
단아 : (놀라서 뛰쳐나가는 혜주를 보는데)
간부1 : 이러시는 거 아닙니다, 회장님.
간부1,2,3,4 격앙된 느낌으로 서있고,
천갑, 영자 당황한 모습으로 서있는.
천갑 : 아, 왜들 그러나? 앉아서들 얘기해, 앉아서들.
간부1 : 저희가 그동안 회장님과 사장님 어떻게 모셨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강석 : 무슨 일들이십니까?
간부2 : 몰라서 물으십니까? 사장님?
강석 : 앉아서들 얘기하시죠.
천갑 : 그래, 앉아들, 앉아.
간부1 : 저희 다 해고 됐습니다. 간부들은 회사 인수 과정에서 다 모가지 날아 갔다구요.
어떻게 저희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강석 : 간부로 승진하실 때 그거 모르셨습니까? 회사가 나가달라고 하면 언제든 나가야 한다는 거.
그래서 평직원보다 월급도 많이 받으시고, 권한도 많이 드린 거 아닙니까?
간부3 : (강석 멱살 잡으며) 그래, 우리 월급 좀 많이 받았다, 이 자식아.
천갑 : 아, 왜들 그래.
영자 : 여보, 여보. 경찰 불러. 경찰.
간부3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니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하루아침에 길바닥으로 나앉게 만들면 내 식구들은 어떻게 사냐?
강석 : (단아를 살피는)
단아 : (놀란 표정으로 보고 있는)
강석 : (멱살 잡은 손 잡으며) 그건 본인들이 계획을 세워 사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간부3 : 내가 그랬지, 이 새끼는 절대 말로 해선 안 된다구. (주먹을 날리려고 하면)
강석 : (팔을 잡고) 이런 식으로 행패 부린다고 해결될 거 같습니까?
영자 : 여보, 경찰 부르라니까.
천갑 : 이 사람들 너무들 하는구만.
간부3 : 그래, 이 새끼야. 넌 에비 잘 만나서 사람들이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무슨 고생을 어떻게 하면서 사는지 모르지. 너 같은 새끼가 우리 같은 사람들 처지 알기나 하겠어?
강석 : 동정을 바라십니까? 그럼 잘못 찾아오신 거 같군요. 제가 어떤 놈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간부3 : 그래, 이 새끼야, 와봐야 소용없다는 거 알면서도 왔다.
네 놈 죽이고 나도 죽자고 작정하고 왔다, 이 새끼야.
영자 : (수화기 들고 버튼 누르며) 경찰이죠? 여기 우리 집에 사람들이.....
천갑 : 무단가택침입이라고 해, 무단.
영자 : 무단가택 침입을 해서 우리 아들을 마구 때리려고 하고.
간부1 : (간부3 팔 잡으며) 그만 하게. 이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나. 가세, 가자구.
간부3 : 나 이 새끼 죽이고....
간부1 : 가자구. (억지로 뜯어말리는)
간부2 : 회장님, 진짜 서운합니다. 전 회장님까지 이러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천갑 : 나도 자네들이 이럴 줄은 몰랐네.
#.44 씬. 천갑의 방.(밤)
영자, 누워있고, 천갑, 괴로운 심정으로 앉아있는.
영자 : (울면서) 어떻게 지들이 우리한테 이래. 어떻게 우리 강석이한테.
천갑 : 그만 좀 울어라, 머리 아프다. 이런 꼴 한두 번 당해보냐.
영자 : 그래도 우리 강석이 멱살까지 잡히는 일은 없었잖아.
천갑 : 다 넘어야 할 산이다, 산이야. 이보다 더한 일도 겪고 살았으면서.
영자 : 강석이 때문에 속상해서 그러잖아.
천갑 : 저도 예상은 하고 있었을 거야. 그만 일로 우리 강석이 놈 기죽고 그러지 않아.
영자 : 하교수한테 쪽팔리잖아.
#.45 씬. 길. (밤)
강석, 운전하고 있는. 단아 그 옆에.
강석 : (차 세우는) 미안합니다, 오늘은 집까지 못 데려다주겠네요.
단아 : (차 문 손잡이 잡다가 놓는)
강석 : 전철 타고 가요.
단아 : 집에 들어가실 건가요?
강석 : .....
단아 : 지금 기분으로 운전하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강석 : 이 근처에서 술 한 잔 하고 들어갈 겁니다.
단아 : 가세요, 그럼.
강석 : 안 내립니까?
단아 : 술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잖아요? 말려드릴게요.
강석 : .....
#.46 씬. 스탠드 바 정도.(밤)
강석,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옆에 앉아있는 단아.
강석 : 꼴좋다 그러죠? 사람 가지고 노는 재미로 살더니 그렇게 망신을 당하는구나.
단아 : .....
강석 : (술을 따라 마시는) 근데 더 웃기는 건, 그 자리에 당신이 없었으면 나 망신이라는 생각도 안했을 거야.
못난 인간들 못난 짓거리 하는구나, 웃어버렸을 거라구.
단아 : 왜 솔직하게 말 안 해요?
강석 : (보면)
단아 : 나도 이런 내가 마음에 안 든다.
강석 : 아니, 난 그런 생각 안 해. 난 이렇게 생겨먹은 나란 놈이 마음에 들어.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나같이 사는 게 옳다, 그러거든.
단아 : 그럼 왜 술을 마셔요?
강석 : .....
단아 : 괴로워하는 거잖아요?
강석 : 예전에 유학 할 때, 크라잉 게임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거기 나오는 얘긴데.
전갈이 강을 건너고 싶지만 수영을 못해서 개구리한테 부탁하죠.
하지만 개구리는 거절해요. 왜냐 전갈이 찌를지 모르니까.
전갈이 말하죠, 나도 죽을 텐데 왜 내가 널 찌르겠냐구.
그래서 개구리가 전갈을 업고 강을 건너는데 물살이 거세지죠.
그러니까 전갈은 겁이 나서 개구리를 찔러버립니다.
개구리가 죽어가면서 묻죠. 왜 같이 죽을 줄 알면서 찔렀냐구?
전갈이 슬피 대답하죠. 나도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천성이야.
단아 : .....
강석 : 다른 장면은 다 잊어버렸는데, 그 얘기만은 잊혀지질 않아요.
전갈 그 자식이....그 미련하고 우스운 그 놈이 말하는 그 천성이라는 게, 잊혀지질 않아요.
단아 : 전갈도 슬피 대답했다면서요?
강석 : (보면)
단아 : 그런 천성을 타고 난 자신의 운명이 전갈 자신도 슬펐다는 거잖아요.
강석 : .....
단아 : 멈추는 법을 몰라서 이렇게 갈 수 밖에 없는 거라고,
그래서 나도 조금은 슬프다고 말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
강석 : 조심하라고 경고 했을 텐데.
단아 : .....
강석 : 나에 대해서 아는 척 하지 말라구.
단아 : .....
#.47 씬. 술집 앞.(밤)
강석, 단아, 나오는데, 눈이 내리고 있는.
단아 : (하늘을 올려다보는)
강석 : .....
단아 : 눈이 오시네요.
강석 : (단아의 팔을 잡는)
단아 : (보는)
강석 : 한번만, 오늘 한번만 참아주겠습니까?
단아 : .....
강석 : (단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단아 : (멍한 느낌으로 있다가, 천천히 눈을 감는)
눈 오는 거리에서 그렇게 서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