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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선조이시며 저의 시댁인 백강 가문과는 불가분의 관계인 청음 김상헌 선생의 졸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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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8권, 3년(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6월 25일(을축) 1번째기사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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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의 석실(石室) 별장에서 죽었다. 죽음에 임해서 상소하기를,
“신은 본래 용렬한 자질로 여러 조정에서 다행히도 은혜를 입어 지위가 숭반(崇班)에 이르렀는데도 작은 공효도 이루지 못하고 한갓 죄만 쌓아 왔습니다. 병자년 정축년 난리 이후로는 벼슬에 뜻을 끊었는데 중간에 다시 화를 당하여 온갖 어려움을 갖추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도 선왕(先王)께서 초야에 있던 신을 부르시어 태사(台司)에다 두시기에, 은명에 감격하여 힘든 몸을 이끌고 한번 나아갔으나, 흔단만 쌓은 여생이 힘을 다할 희망이 없어,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고향 땅에 물러나 지내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는 남다른 은총을 과분하게 받아 노쇠한 몸이 보답할 길이 없기에, 다만 사류(士類)를 현양하고 강유(綱維)를 진작시켜 새로운 교화의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보답코자 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뜻을 조금도 펴보지 못하고 외로이 성덕을 저버린 채 낭패하여 돌아왔습니다. 질병과 근심 걱정이 점점 깊이 고질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목숨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거듭 천안(天顔)을 뵙기에는 이 인생 이제 희망이 없으니 멀리 대궐을 우러러보며 점점 죽어갈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처음 왕위를 물려받으시던 때의 뜻을 더욱 가다듬으시고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바꾸지 마시어, 선한 사람을 등용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루시고 실제적인 덕업을 잘 닦아 왕업을 넓히소서. 그리하여 우리 동방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의 기반을 크게 마련하시면 신이 비록 죽어 지하에 있더라도 거의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 기운이 없어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하늘이 사람을 남겨두지 않고 내게서 원로를 앗아갔으니 매우 슬프고 슬프다. 이 유소(遺疏)를 보니 말이 간절하고 훈계가 매우 지극하다. 나라 위한 충성이 죽음에 이르러서 더욱 독실하니 매우 가상하다. 가슴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근신에게 하유한다.”
하였다.
김상헌은 자는 숙도(叔度)이고, 청음(淸陰)이 그의 호이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오십 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였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하였다.
광해군 때에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을 무함하여 욕하자 이에 진계하여 변론하였다. 윤리와 기강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야인담록(野人談錄)》을 저술하여 뜻을 나타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이 있자, 대사간으로서 차자를 올려 ‘여덟 조짐[八漸]’에 대하여 논한 것이 수천 마디였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고 절실하였다. 대사헌으로서, 추숭(追崇)이 예에 어긋난다고 논하여, 엄한 교지를 받고 바로 시골로 돌아갔는데, 오래지 않아 총재(冢宰)와 문형(文衡)에 제수되었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또 물러나 돌아갔다.
병자년 난리에 남한산성에 호종해 들어가,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는 계책을 힘써 진계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세자를 보내 청나라와 화해를 이루기를 청하니, 상헌이 통렬히 배척하였다. 출성(出城)의 의논이 결정되자, 최명길(崔鳴吉)이 항복하는 글을 지었는데, 김상헌이 울며 찢어버리고, 들어가 상을 보고 아뢰기를,
“군신(君臣)은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 성을 지켜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물러나 엿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아니했다. 또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죽지 않았다.
상이 산성을 내려간 뒤 상헌은 바로 안동(安東)의 학가산(鶴駕山) 아래로 돌아가 깊은 골짜기에 몇칸 초옥을 지어놓고 숨어 목석헌(木石軒)이라 편액을 달아놓고 지냈다. 늘 절실히 개탄스러워하는 마음으로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풍악문답(豊岳問答)》을 지었는데, 그 글에,
“묻기를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에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나랏님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이다. 옛 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군자(士君子)의 나가고 들어앉은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적이 물러간 뒤에 끝내 문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뜻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변란 때에 초야에 낙오되어 호종하지 못했다면 적이 물러간 뒤에는 의리로 보아 마땅히 문안을 해야 하겠거니와, 나는 성안에 함께 들어갔다가 말이 행해지지 않아 떠난 것이니,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어찌 조그마한 예절에 굳이 구애되겠는가. 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603) 옛 사람들은 출입하는 즈음에 의로써 결단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자네가 대의는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그 말은 옳으나, 대대로 봉록을 받은 집안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조종조의 은택을 생각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내가 의리를 따르고 명령을 안 따라 이백 년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려 하는 것은 선왕께서 가르치고 길러주신 은택을 저버리지 아니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가 평소 예의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하루아침에 재난을 만나 맹세코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임금에게 다투어 권하여 원수의 뜨락에 무릎을 꿇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대부를 볼 것이며 또한 지하에서 어떻게 선왕을 뵙겠는가. 아, 오늘날 사람들은 또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했다.”
하였다. 상소하여 산성(山城)의 상자(賞資)를 사양하였는데, 그 상소에,
“신은 머리를 뽑으며 죄를 청한 글에서【항복하는 글.】 마음이 떨어졌고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즈음에 천성을 잃었습니다. 형체는 있으나 정신은 죽어 토목과 같습니다. 바야흐로 성상께서 산성에 계실 때에 대신과 집정자들이 출성(出城)을 다투어 권했는데도 신은 감히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고 탑전에서 망령되이 아뢰었으니 신의 죄가 하나요, 항복하는 글이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초고를 손으로 찢어버리고 묘당에서 통곡했으니 신의 죄가 둘이요, 양궁(兩宮)이 몸소 적의 진영으로 갈 때에 신은 말 앞에서 머리를 부딪쳐 죽지도 못하였고 병이 들어 따라가지도 못했으니 신의 죄가 셋입니다. 이 세 가지 죄를 지고도 아직 형장(刑章)을 면하고 있으니 어찌 끝까지 말고삐를 잡고 수행한 자들과 더불어 감히 은수를 균등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은 삼가 듣건대,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않으면 가죽옷과 갈포옷을 없앨 수 없고 적국이 없어지지 않으면 전쟁과 수비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와신상담하는 뜻을 가다듬으시고 보장(保障)의 땅을 증수하시어, 국가로 하여금 다시 욕을 당하는 일을 면케 하소서.
아, 한때의 강요에 의했던 맹약을 믿지 마시고 전일의 큰 덕을 잊지 마소서. 범이나 이리같은 나라의 인자함을 지나치게 믿지 마시고 부모와 같은 나라를 가벼이 끊지 마소서. 누가 이것으로써 전하를 위해 간절히 진계하겠습니까. 대저 천리 강토로 원수의 부림을 받는 일은 고금에 부끄러운 바입니다. 매양 선왕(先王)의 주문(奏文)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이 있음을 생각하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하였다. 그 뒤 유석(柳碩)·이도장(李道長)·이계(李烓) 등이, 임금을 버렸다는 것으로 논하여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삭직하라고만 명하였다.
청인(淸人)이 장차 우리 군대로 서쪽 명나라를 치려 했는데, 김상헌이 글을 올려 의리로 보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극언하였다. 그 상소에,
“근래 거리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을 따라 장차 군대 오천 명을 발동하여 심양(瀋陽)을 도와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움과 의혹스러움이 진정되지 않은 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따를 만한 일도 있고 따라서는 안 될 일도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비록 계씨(季氏)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그들도 따르지 않을 바가 있음을 칭찬했습니다.604) 당초 국가가 형세가 약하고 힘이 모자라 우선 목전의 위급한 상황을 넘길 계책을 했던 것인데, 난을 평정하고 바름으로 돌이키신 전하의 큰 뜻으로 와신상담한 것이 이제 3년이 흘러, 치욕을 풀고 원수를 갚는 일을 거의 손꼽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갈수록 더욱 희미해져서 일마다 굽혀 따라 결국 못하는 일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은 없었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죽는 것과 망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있지만 반역을 따르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께 아뢰기를 ‘원수를 도와 부모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전하께서는 필시 유사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말을 잘 꾸며 스스로를 해명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시고 필시 왕법으로 처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에 통용되는 도리입니다. 오늘날 일을 계획하는 자들은, 예의는 지킬 것이 없다고 합니다만, 신이 예의에 근거하여 변론할 겨를도 없이, 비록 이해만으로 논해 보더라도, 강한 이웃의 일시의 포악함을 두려워하고 천자(天子)의 육사(六師)의 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정축년 이후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그 구제하지 못하고 패하여 융적(戎賊)에게 절한 것이 본심이 아니었음을 특별히 이해해 주었습니다. 관하(關下) 열둔(列屯)의 병사들과 바다 배 위의 수졸들이 비록 가죽 털옷이나 걸치고 다니는 오랑캐를 소탕하여 요동 땅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나, 우리 나라가 근심거리가 되는 것을 막기에는 넉넉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이 호랑이 앞에서 창귀(倀鬼) 노릇을 한다는 것을 들으면 죄를 묻는 군대가 우레나 번개처럼 치고 들어와 바람을 타고 하루만에 해서(海西) 기도(圻島) 사이에 곧바로 도달할 것이니, 두려워할 만한 것이 오직 심양에만 있다고 하지 마소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니 어기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만, 신은 명분 대의가 매우 중하니 범하면 또한 재앙이 있으리라 여깁니다. 대의를 저버리고 끝내 위망을 면치 못할 바엔 바른 것을 지켜서 하늘에 명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는 것은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일이 순리를 따르면 민심이 기뻐하고 민심이 기뻐하면 근본이 단단해집니다. 이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태조 강헌 대왕께서 거의(擧義)하여 회군(回軍)을 하시어 이백 년 공고한 기반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겨 임진년에 구해주는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만약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거조를 한다면, 비록 천하 후세의 의논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서 선왕을 뵐 것이며 또한 어떻게 신하들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즉시 생각을 바꾸시고 큰 계책을 속히 정하시어 강한 이웃에게 빼앗기는 바 되지 마시고 사악한 의논을 두려워 마시어, 태조와 선조의 뜻을 이으시고 충신과 의사의 여망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흉인(兇人)이 유언 비어로 청인에게 모함하여, 구속되어 심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길이 서울을 지나게 되자 상이 특별히 초구(貂裘)를 내려 위로하였다. 심양에 이르러 청인이 심하게 힐문하니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기를,
“내가 지키는 것은 나의 뜻이고 내가 고하는 분은 내 임금뿐이다. 물어도 소용없다.”
하니, 청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하기를,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
하였다. 오랜 뒤 비로소 만상(灣上)으로 나왔는데, 그 뒤 신득연(申得淵)·이계(李烓)의 무함을 받아 또 심양에 잡혀가 있게 되었다. 모두 6년 동안 있으면서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인조 말년에 좌상에 발탁되었는데, 와서 사례하고 바로 돌아갔다.
상이 즉위하여 큰 일을 해보려고 다시 불러 정승을 삼았는데, 청인이 잘못된 논의를 하는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다고 책망을 하여, 상헌이 드디어 속 시원히 벼슬을 털어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끝내 그 뜻을 펴보지 못했으므로 조야가 애석히 여겼다.
그의 문장은 간엄(簡嚴)하고 시는 전아(典雅)했다. 《청음집(淸陰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일찍이 광명(壙銘)을 지었는데, 그 명에,
지성은 금석에 맹서했고
대의는 일월처럼 걸렸네
천지가 굽어보고
귀신도 알고 있네
옛것에 합하기를 바라다가
오늘날 도리어 어그러졌구나
아
백년 뒤에
사람들 내 마음을 알 것이네
하였다. 죽을 때의 나이는 여든 셋이요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사신은 논한다. 옛 사람이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 고 했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5책 562면
【분류】 *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역사-사학(史學) / *외교-명(明) / *외교-야(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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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03]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 :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계평자(季平子)를 토벌하다가 실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할 때 자가기가 따라갔다. 소공이 간후(乾侯)에서 죽은 뒤,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씨가 자가기를 불러들여 함께 정치를 하려 하였는데, 자가기가 이런 말을 하였다. 《좌전(左傳)》 정공(定公) 원년(元年). ☞
[註 604]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비록 계씨(季氏)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그들도 따르지 않을 바가 있음을 칭찬했습니다. : 자로와 염구는 공자의 제자로서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었다. 계자연(季子然)이 공자에게 이들을 대신(大臣)이라고 할 만하냐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대신이라는 것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되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니, 지금의 자로와 염구는 구신(具臣)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묻기를 “그렇다면 계씨가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자들입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아비나 임금을 시해하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들이 비록 대신 노릇은 제대로 못하나, 군신의 의리를 잘 알기 때문에 시역하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