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마 18:1-14)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없음)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기독교는 공동체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선한 일을 하며 기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동체 신앙은 연대와 책임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성을 심판하겠다고 할 때,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청을 합니다.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용서하시겠습니까? 악인들 때문에 의인이 함께 희생 당하면 정의에 어긋난다고 협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오십 명에서 다섯이 부족하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열 명까지 낮추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겠다고 했지만, 의인 한 명을 찾을 수 없어 소돔은 멸망합니다. 의인 한 사람이 한 성읍을 구할 수 있습니다. (창 18:16-33)
이와는 반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여리고 성을 점령합니다. 그때 아간이라는 사람이 물건을 훔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이 성을 공격하는데 실패합니다. 원인을 찾으니 아간의 범죄가 드러납니다. 여호수아는 약속을 어긴 아간을 처벌합니다.(수 7장) 한사람의 범죄로 공동체가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공동체가 되어 연대와 책임을 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신앙을 신학적으로 조금 더 발전시킨다면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라고 증언합니다. 곧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믿고 복 받고 영생을 얻고 살면 그만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기복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 신앙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웃은 모든 사람이 내 형제와 자매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 사랑은 거짓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혹시 이웃이 잘못된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교만은 세상의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내가 잘 믿어서 복을 받고, 성공하고 출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가끔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면 ‘잘 믿어서 복 받았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정말 잘 믿는다면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해야지요. 형제자매가 굶주리고, 전쟁과 폭력, 차별로 고통받고 있는데 ‘나는 복을 받았다’고 자랑하면, 그것이 과연 축복일까요?
잘못 믿는 그리스도인이 있다기보다는 잘못 가르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앙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지도자는 목회자와 교사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입니다. 복음을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설명하면 그가 교사입니다. 물론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목사와 교사들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도자들,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오늘 말씀은 지도자들을 위한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장이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권위 있는 지도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끼리 서열을 정해 높고 낮음을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견을 묻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입니까?’ 천국은 하나님 나라이면서 이 땅 위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제자들은 공동체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제자라는 특권을 누리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16장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십니다. 곧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마 16:19)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지기처럼 천국 문을 열고 닫을 특권을 주신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주님의 대리인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큰 사람이냐?’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고, 교회에서 큰 사람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 두 가지를 말한다면 ‘겸손과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엄청난 능력과 권위를 가지셨음에도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11:23) 주님의 순종은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빌 2:5-8)입니다.
겸손은 남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는 작은 아이일 수도 있고, 작은 자, 보잘것없는 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는 공동체 안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 실족하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한 사람이 걸려 넘어진다면, 그 책임은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것이라고 합니다. ‘화가 있다’(7절)고 하십니다.
7절 말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고 하셨는데, 실수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실수하지 않도록 깨어 근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실수할 수 있는데 실수하면 멸망해’라는 뜻입니다.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려면, 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항상 살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혼자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기 때문에 지도자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면 그 책임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실족하게 했으니 무거운 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길 잃은 양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작은 자, 보잘것없는 이를 공동체 안에서 잘 양육하고 성장하게 하는 책임이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그 책임을 감당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이들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섬김은 자기희생입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섬김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겸손과 순종을 가르치시는데 교회의 지도자는 주님을 닮지 않고, 교만과 특권만 내세웁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를 섬기지 않고 자기 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작은 이들을 실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이웃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웃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착각합니다. 저도 젊었을 때 세상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하여 틀린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잘못한 것을 알려주려고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내 말로 인해 누군가 실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만은 이처럼 위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이웃 사랑의 마음으로 도와주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은 사랑 없이는 가질 수 없는 마음입니다. 모두가 내 형제, 자매라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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