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목적은 자유다. 종 되었던 몸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고, 자유를 얻은 백성에게는 사명이 주어진다. 사명은 수동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생존으로 살지 않고 사명으로 산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고전9:16) 사명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 게을러터진 사람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불이 없는 것이다(매튜 팍스). 게으름의 반대말은 부지런함이 아니라 불꽃이다. 내 안에 있는 불을 발견해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
사명자의 목적은 사람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고자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살았고, 이방인들을 얻고자 이방인처럼 살았으며, 제사 음식이나 관습에 예민한 사람들을 얻고자 그들에게 맞춰 살았다(고전9장).
교회는 사람을 구원해야 사역을 잘하는 것이지 사람은 얻지 못하고 조용히 잘 굴러가는 것은 무덤의 영성이다. 무탈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으면 깨끗하겠지. 그런데 소를 키우는 외양간인데 더러우면 어떻고 시끄러우면 어떤가. 부작용이 있어도 살려내고 건져내는 게 교회의 목적이다. 사람을 살려내는 일이 우리의 소명이자 사명이다. 잘 보이는 것은 정죄하고 비난하라고 보여 주신 것이 아니고 그곳에 들어가서 살리라는 것이다. 살리라고 보냈는데 죽이면 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촉이 있다.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몰려왔을 때 사람만 10만 명이 넘게 죽었는데 동물의 사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동물들은 쓰나미가 오는 것을 알고 피했다는 것이다. 파도가 밀려오는 쓰나미 소리를 들어도 알고, 멀리서 일어나는 파도를 보고도 안다. 그런데 먹고살기 바빠서 주변도 살피지 않고 인생을 사니까 임박한 죽음을 모른 것이다. 짐승들은 알고 피했는데 사람만 10만 명이 넘게 죽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감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고된 일이 아니고, 헛된 일이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보면 시지프가 돌을 산꼭대기로 굴려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지고 이 일을 계속 반복하는 신들의 형벌을 받는다. 힘들지만 의미가 없는 일, 무의미의 지옥이다. 그런데 사명자는 열매 없는 일을 위해 뛰는 것이 아니고 목표가 있기에 헛되지 않다.
목표가 있으면 절제할 수 있다. 어떤 요리사는 절대 미각을 위해서 술과 담배를 다 끊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도 끊지 못하고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가치가 술과 담배나 자기의 죄와 욕심보다 하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높은 가치, 높은 비전이다. 그럼 절제가 가능한 인생이 된다. 어떤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확한 플랜과 넉넉치 않은 시간이라 한다. 넉넉치 않은 시간 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뛰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달음질하라는 것. 쫓기듯이 종말 의식을 가지고 달음질해야 한다. 그래야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하고 끝까지 겸손을 유지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주님 바라보고 사명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