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일, 쳇바퀴 속에서 만나는 평화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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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수도원 수사들이 성당에서 시간전례를 바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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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들이 배즙 포장 작업을 하고 있다. 수도복을 벗으면 영락없는 이웃집 아저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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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대해 수사는 요셉 수도원에서 만든 소시지가 우리나라 최고라고 자부했다. |
불암산 자락에서
4일 새벽 4시 50분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불암산 자락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쏟아질 듯 겨울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초롱초롱하다. 원래 저렇게 별이 많았던가 싶다. 싸늘한 공기는 얼마나 상쾌한지….
숙소를 빠져나와 옆 건물에 있는 성당으로 하나둘 모여든 수사들이 제대 십자가 앞에 엎드려 큰절을 한 뒤 제대 양쪽에 자리를 잡았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아침기도. “주님, 내 입시울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
수사들이 한목소리로 바치는 기도가 성당에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하느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는 경건함과 성스러움이 가득한 시간, 수도원의 하루를 여는 아침기도는 그렇게 40여 분 이어졌다.
아침기도가 끝나고 30여 분이 지난 아침 6시. 이제는 또 미사다. 이렇게 오후 7시 45분 하루를 마무리하는 끝기도 시간까지 공동체는 매일 6차례 정해진 시간에 시간전례를 바친다. 한창 자라는 청소년은 밥 먹기가 무섭게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지만 이곳 수사들은 기도하고 돌아서면 금세 또 기도 시간이다.
김기룡(스테파노) 수사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하나도 지겹지 않다”면서 “성당에 앉아 기도하자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베네딕도회의 모토는 잘 알려진 것처럼 ‘기도하고 일하라’이다. 따라서 기도를 제외한 수사들의 나머지 일과는 일, 즉 노동으로 채워진다. 요셉 수도원의 일은 다름 아닌 배 농사. 곁들여 피정의 집도 운영한다. 요셉 수도원 식구 14명 가운데 한 명은 현재 안식년으로 미국 뉴튼 수도원에 가 있고, 지원자 한 명은 군 복무 중이다. 팔순을 넘긴 노 수사부터 30대 젊은 수사까지 나머지 12명 가운데 주방과 피정 관리소임을 제외한 절반가량이 배 농사에 매달린다.
수사들은 7만 6000여㎡ 넓이의 배밭에서 매년 10월께 20개들이 2만 상자를 수확한다. 이 가운데 3000상자 정도는 곧바로 판매하고 나머지는 배즙으로 만들어 이듬해 6월까지 판다고 한다. 수도원의 안정적 수입원으로, 덕분에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는다. 농사철이 아닌 겨울은 이듬해 농사를 준비하고 그동안 미뤄뒀던 일을 하는 시간이다.
1987년 설립 이래 배 농사만 짓던 수도원이 최근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소시지 만드는 법을 배우고 돌아온 안대해(마르코) 수사를 중심으로 소시지 공방을 차린 것이다. 독일에서 기계도 들여왔다. 한 달에 한 차례 500∼600개 정도 만들 계획이다. 안 수사는 “독일에서 귀국한 후 20여 년 동안 이날만을 기다려왔다”며 “우리나라 최고 품질의 소시지를 만들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수도원이 배 농사를 짓고 소시지를 만드는 이유는 가장 먼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다른 데 손 벌리지 않고 수도원을 운영하려면 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급자족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노동은 수입원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자연법칙에서 비롯된 노동은 하느님의 뜻에 상응하는 행위(2테살 3,6-12)라는 것이 베네딕도회 정신이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삶인데, 수사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안 수사는 “매너리즘에 빠져 침체될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심을 보여주시고 나를 책임져주셨다”면서 “그렇게 다시 힘을 내고 살다 보니 지금은 더없이 행복하다”며 활짝 핀 웃음으로 답했다.
이광식(예로니모) 수사는 “종신서원 전에는 내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수도자인지 의심스럽고 흔들린 적도 있었다”면서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이유를 깨달은 지금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는 수도원 형제들과 함께하는 삶이 정말 좋다”고 털어놨다.
이상헌(엘리야) 신부는 저녁 미사 강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베네딕도회는 나가서 선교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수도회 안으로 불러들여 자연스럽게 복음화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향기를 품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체험한 하느님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하느님 사람이 되고자 기도와 노동으로 하루를 바쁘면서도 여유롭게, 그리고 기쁘게 사는 사람들. 요셉 수도원에 사는 12명의 수사 이야기다.
글ㆍ사진=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최종근 원장 신부
“베네딕도회는 수도회들의 줄기세포 같은 존재입니다. 모든 수도회의 생활 양식이 베네딕도회에서 출발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만큼 전통과 기본에 철저한 수도회입니다.”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원장 최종근(파코미오) 신부는 베네딕도회가 지닌 위상을 ‘줄기세포’라는 말로 함축했다. 특정 카리스마에 따라 사도직을 펼치는 수도회가 생기기 전에는 베네딕도회처럼 수도원장을 중심에 두고 규칙에 따라 공동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노동으로 자급자족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도승의 생활이었고, 이것이 중세 이후 수없이 생겨난 수도회에 하나의 모델이 됐다는 설명이다.
“공동 생활은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다 드러냅니다. 공동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인간적 약점과 갈등을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로 성화시켜야 합니다. 나쁜 동료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잣대로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최 신부는 “겉으로 드러나는 활동이 많으면 그만큼 거품도 많고 부침도 크다”면서 “베네딕도회가 부침이 적고 튼튼한 것은 수도생활이 하느님께 순종의 노고로 나가는 신앙 행위라는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베네딕도회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떠나 사막으로 나가는 것을 지향합니다. 세상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배밭이 사막입니다. 그 사막에서 수도승의 삶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도직 활동보다도 하느님과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베네딕도회의 소명입니다.”
성 베네딕회란
6세기 이탈리아 베네딕도 성인이 쓴 「수도 규칙」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들의 연합을 일컫는다. 남자 베네딕도회는 자치 수도원들의 연합 형태인 20개의 연합회와 5개의 자치 수도원, 2개의 예속 수도원으로 이뤄져 있으며, 회원은 전 세계적으로 9000여 명이다. 여자 베네딕도회 회원은 1만 7000여 명에 이른다.
한국 교회에서 베네딕도 규칙을 따라 생활하는 공동체는 요셉 수도원을 비롯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고성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