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Chapter 3 마리우스
두 별의 만남
1년 전부터 마리우스는 뤽상부르 공원의 인적 없는 오솔길이나 묘목으로 울타리를 친 작은 길에서, 한 사나이와 소녀가 웨스트 거리 쪽의 가장 호젓한 오솔길 가장자리의 벤치에 앉아 있곤 하는 것을 보아 왔다. 마리우스가 이 사잇길에 올 때마다 거의 일과처럼 하는 일은 그들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사나이는 60세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슬픈 표정이었으나 정직해 보였다. 호인이지만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 같았고, 누구와도 결코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머리는 백발이었다.
맨 처음 소녀가 그 사나이를 따라와 마치 자기네 것으로 정해 놓기라도 한 듯이 벤치에 앉았을 때에는 13-14세쯤 되어 보였다. 너무나 말라 추해 보이기까지 했고 무척 볼품없는 소녀였지만 눈만은 꽤 아름다워질 것 같았다. 그 눈은 거부감이 일어날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복장은 수녀원의 기숙생처럼 소녀다워 보이는 동시에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들은 아버지와 딸인 듯싶었다.
마리우스에게는 이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소녀의 복장과 노인의 머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딸을 ‘검정 아가씨’ 아버지를 ‘하얀 신사’라 이름 붙였다. 아무도 그들을 몰랐고 본명도 알 수 없었으므로 이 별명이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마리우스는 처음 1년 동안 거의 날마다 같은 시간에 그들을 만났다. 마리우스는 아버지에게는 상당한 호감이 갔으나 딸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마리우스의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는 버릇이 잠시 중단되어 근 반년 가까이 그 사잇길에 발을 들여 놓지 않다가, 어느 날 거기에 가 보았다. 맑게 갠 여름날 아침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마리우스도 기분이 좋았다. 귀에 들려오는 새들의 속삭임,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창공의 푸르름이 자기 마음속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곧장 ‘그의 오솔길’로 갔다. 길이 끝날 때쯤 해서 그는 여전히 같은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노인은 틀림없이 그 사나이였으나 딸은 다른 아가씨인 듯이 보였다. 마리우스가 본 여자는, 소녀의 소박함과 성숙한 여성이 갖는 매력이 한데 결합된 바로 그런 시기에 있는 아름답고 키가 큰 여인이었다.
처음 마리우슨느 그 아가씨가 노인의 또 다른 딸, 앞서 본 소녀의 언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책할 때면 언제나 하던 버릇으로 재차 벤치 곁에 가서 주의해 보고 같은 아가씨임을 알 수 있었다. 반년 동안에 그 소녀가 아가씨로 성장해 있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다. 여자에게는 눈 깜짝할 사이에 피어나서 갑자기 장미꽃이 되는 그런 시기가 있는 법이다. 이제까지는 어린애로 알았던 것이 오늘에 와서 보니 자꾸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기숙생 같은 벨벳 모자, 메리노 옷감으로 된 옷, 학생 구두에 빨간 손을 하고 있던 그런 차림이 아니었다. 아름다움과 함께 취미도 바뀌었던 것이다. 간소하면서도 세련되고, 꾸민 티가 없으면서도 산뜻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검은 비단옷에 역시 비단 케이프를 걸치고 흰 크레이프 모자를 쓰고 있었다. 흰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은 중국제 상아로 된 양산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단 구두는 그녀의 발이 얼마나 자그마한가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의 곁을 지나니 그 몸 전체에서 젊고 강렬한 내음이 발산되었다. 사나이 쪽은 전과 마찬가지였다.
얼마 뒤의 일이었다. 날을 따스하고 뤽상부르는 빛과 그림자로 넘치고, 하늘은 아침나절에 천사들이 씻어 놓은 듯이 맑게 개고, 참새들은 마로니에 나무 그늘에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마음속으로부터 자연을 받아들이며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면서 벤치 곁을 지나노라니 소녀가 눈을 들었다. 드디어 시선이 마주쳤다.
그 여인의 시선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마리우스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고 또 모든 것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기묘한 섬광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숙였고 그는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이튿날, 같은 시간에 마리우스는 벽장에서 새 윗도리와 바지, 새 모자와 신발을 꺼냈다. 그는 말쑥하게 차려 입고 장갑까지 낀 다음 뤽상부르 공원으로 나갔다.
둘째 주일도 다 지난 어느 날, 마리우스는 언제나처럼 벤치에 앉아 책을 펴들고 있었다. 하지만 두 시간이 지나도록 한 장도 넘기지를 못 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솔길 저쪽에서 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얀 신사와 딸이 벤치에서 일어나 손을 잡고 마리우스가 있는 오솔길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잇었던 것이다. 마리우스는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펴고는 억지로 읽어 보려 했다. 그는 떨고 있었다. 후광이 곧장 나에게로 다가온다. 아아! 이를 어쩐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세를 바로 잡을 시간도 없었다.
그동안에도 백발의 사나이와 젊은 여인은 계속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10년같이도 생각되고 한순간의 일같이도 생각되었다.
‘무엇하러 이리 오고 있을까? 아아, 저 여인이 내 앞을 지나간다. 저 여인이 바로 눈앞에서 땅을 밟고 지나간다!’
가슴이 설레었다. 크게 거드름을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십자 훈장이라도 달고 있었으면 싶었다. 그들의 조용하고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신사가 자기에게 성난 시선을 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저 사람이 내게 말을 건네 줄 것인가?’
마리우스는 고개를 숙였다. 마리우스가 머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바로 곁에 와 있었다. 여인이 스쳐 갔다. 그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바라보는 그 정다운 시선에 마리우스는 온몸이 떨렸다. 그가 너무나 오래도록 그녀 곁에 가지 않아 ‘그래서 제가 온 거예요’하고 책망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리우스는 광명과 심연을 아울러 간직한 그녀의 눈동자 앞에서 눈이 멀 것 같았다. 머릿속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여인이 자기에게로 오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니! 그녀는 지금까지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하얀 신사도 뭔가 눈치챘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우스가 나타나면 그 노인은 언제나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앉던 벤치에서 멀리 떠나 길 반대쪽 끝에 있는 검투사 동상 곁의 벤치에 앉곤 하는 것이었다.
마리우스가 뒤를 따라오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마리우스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뒤를 따라가는 과오를 범했다. ‘아버지’는 공원에 오는 일이 불규칙하게 되었으며 ‘딸’을 데려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가 혼자 오는 날이면 마리우스도 곧 돌아갓다. 이것도 그의 실수였다.
마리우스는 이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인 추세로, 그는 소심한 단계에서 맹목적인 단계로 옮아가고 잇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사랑이 움트고 있었다. 매일 밤 그녀의 꿈을 꾸었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그것은 불에 기름을 붓고 눈을 어둠으로 가리는 듯한 것이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 그는 하얀 신사와 그 딸이 앉았다가 간 벤치에서 손수건 하나를 발견햇다. 수도 놓지 않은 평범한 손수건이었으나, 희고 고상했으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향기가 풍겨 오는 듯했다. 그는 정신없이 이것을 집었다. 손수건에는 U. F.라는 머리글자가 들어 있었다.
마리우스는 지금까지 그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도 집도 모르고 있었다. 이 두 글자는 그가 그녀에 대해 알게 된 최초의 것이었다. 이 아름다운 머리글자를 토대로 갖가지 꿈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U.는 분명히 이름일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위르쉴라일까!’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그는 손수건에 입을 맞추고 냄새를 맡았다. 낮에는 가슴에 품고 다녔으며 밤에는 입술에 올려놓고 잤다. 그는 외쳤다.
“그녀의 온 영혼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손수건은 노인의 것으로서 어쩌다가 주머니에서 떨어뜨린 것이었다. 마리우스는 손수건을 주운 후부터 뤽상부르에 갈 때에는 반드시 거기 입을 맞추거나 가슴에 품어 보이곤 했다. 아름다운 그 여인이 은근한 신호로 자기에게 뜻을 알리는 것이라 여겼다.
마리우스는 말했다.
“아아, 부끄러워라!”
욕망은 사랑에서 나온다. 여인의 이름이 위르쉴라임을 안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마리우스는 3-4주 동안에 그 행복을 모두 맛보고 말았다. 또 다른 행복이 필요했다. 주소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첫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검투사 동상 곁의 벤치에서 계략에 빠졌던 것이다. 두 번째도 실수했다. 하얀 신사가 혼자 왔을 때 뤽상부르 공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세 번째도 실수했다. 대단한 실수였다. 위르쉴라의 뒤를 밟았던 것이다. 그녀는 웨스트가에서 사람의 왕래가 가장 적은, 어느 수수한 4층 건물의 새 집에 살고 있었다.
이튿날 하얀 신사와 딸은 뤽상부르 공원에 잠시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어둡기 전에 돌아갔던 것이다. 마리우스는 다시 웨스트가로 그들을 미행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하얀 신사는 딸을 먼저 들여보내고 잠시 서 있다가 뒤돌아서서는 마리우스를 노려보았다.
그 다음날 두 사람은 뤽상부르 공원에 오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하루종일 기다렸지만 헛수고였다. 날이 저문 뒤 웨스트가로 가 보니 4층 창문에 불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이 불이 꺼질 때까지 길에서 서성거렸다.
그 다음날에도 그들은 뤽상부르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밤이 되자 다시 웨스트가의 4층 건물로 갔다. 그리고 밤 10시까지 그 앞에서 서성거렸다.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갔다. 하얀 신사와 딸은 뤽상부르 공원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슬픈 추리를 했다. 그렇다고 대낮에 정문에서 서성거릴 수는 없었다. 밤에 찾아가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빨간 불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끔 불빛에 그림자가 스치는 것을 보고는 가슴을 두근거렸다.
8일째 되는 날이었다. 웨스트가의 4층 창문을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중얼거렸다.
“저런, 아직 불이 켜지지 않았군. 벌써 어두워졌는데 외출한 걸까?”
마리우스는 기다렸다. 밤10시가 되고 12시가 되었다.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꼬박 기다렸다. 그러나 4층에는 여전히 불이 켜지지 않았고 아무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침울한 가슴을 안고 돌아갔다.
그는 이튿날을 위해서만 살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는 오늘이란 것이 없었다. 이튿날에도 다시 그 이튿날에서 뤽상부르에서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날이 저물자 또 그 집으로 찾아갔다. 창문에는 역시 불빛이 없었다. 겉창까지 닫혀져 있었다. 4층은 캄캄했다. 마리우스는 4층 건물로 뛰어 들어가 문지기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4층에 사는 분은 어찌 됐습니까?”
문지기가 대답했다.
“이사했어요.”
마리우스는 비틀거리면서 겨우 말했다.
“그게 언제입니까?”
“어제요.”
“어디로 이사했나요?”
“모르겠는걸요.”
“새 주소를 알리지 않고 이사했나요?”
“네.”
문지기는 고개를 들어 마리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아, 당신이군요. 역시 경찰에서 나오신 분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