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燈)에 부침/장석주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 뛰어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나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한국인의 애송시 II, 신예시인 48인선 중에서, 청하]===
장석주(張錫周):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詩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청순한 의식과 탄력 있는 상상력으로, 탁월한 세계 속에서의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삶과 찢긴 자아를 비극적으로 드러내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햇빛 사냥』『완전주의자의 꿈』『그리운 나라』『어둠에 바친다』외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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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낙엽이 보입니다.
초겨울에 밤, 자정이 지나 눈이 옵니다.
등을 켜고 누이에게 편지를 쓰시는
장석주 시인님께서도 전깃불이 없는 곳에서 자라셨군요.
초등학교 시절, 저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다리 짧은 책상에 앉아 등잔불을 앞에 두고
공부를 하다 지쳐 꾸벅꾸벅 졸기도 하였습니다.
졸다 잠든 나를 새벽까지 지켜주다가
심지가 다 타서 불은 죽었습니다.
잘못하면 앞마당에 있던 무궁화 나뭇가지를 꺽어 오라던 아버지.
농기구를 장난감 삼아 놀은 것이 잘못이라고
종아리 걷어 붙이고 매를 맞은 것이 못내 원통했습니다.
어머니는 울면서 말렸습니다.
비바람이 회초리 되어 나무를 때리면
종아리를 맞던 그 때가 행복했다고
지그시 눈을 감아봅니다.
이번주에는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예보입니다.
폭우에 폭염이 기승이지만
건강하시고 한 주 힘차게 행복하게 시작합시다.
=적토마 올림=
첫댓글 장석주님의 시를 읽고 또 읽고 시심에 젖어 듭니다.
좋은시 올려 주시는 적토마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