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김도영
구운 토마토 외
갑자기 억울한데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삼키지 못한 죄는 언제나 당신의 기분처럼 몸에서 덩어리째 튕겨 나옵니다. 세탁소 옷걸이에서 떨어진 가루를 곱게 모아 절구통에 담습니다. 알약과 옷걸이의 잔재가 뒤섞인 백색 소음이 입안 가득 물처럼 차오릅니다
그거 아세요? 토마토는 클수록 영양소가 많대요. 난 아직 어려서요. 작은 토마토 대신 커다란 알약을 삼켜봅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 동그란 알약이 둥둥 떠오르면 꿀꺽 삼키려고 합니다만, 뜨거운 숨결 속에서 물러 터진 알약이 부스러기를 퍼뜨리며 유영합니다. 구운 토마토가 케첩이 될 때 새금한 거 아시죠? 캑, 뱉어냅니다. 삼키겠다는 다짐이 목구멍을 막아서면 어린 토마토는 영양소도 없이 단단해지기만 합니다
덩어리가 몸으로 들어오는 상상은 글쎄요, 언제나 나를 구석으로 내몰고, 꿀꺽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절구통에 찧어진 정제 가루가 입에 쓸려옵니다. 당신의 사랑은 가끔 나를 찾아오고, 절구통에 들어간 구운 토마토가 으스러져 분리수거되는 꿈을 꿉니다. 나도 옷걸이처럼 잠시 휘어집니다. 절구통도 함께 구부러집니다
절구통에 갇힌 나를 망치로 살살 두드리면, 가루가 벽면에 모조리 끼어 남습니다. 감기는 꽃가루처럼 언제나 내 주변을 맴돌고 나는 오랫동안 비염을 앓습니다
옷걸이가 내 목을 삿대질을 하면 학교에 갑니다. 학교에서는 알약 삼키는 법을 가르쳐 주고요. 쪽지시험에서 백 점을 받으면 나는 한껏 물러져 버립니다. 내가 나 자신조차 삼키지 못하면 당신은 절구통을 꺼내는 수고를 하고, 그 덕에 당신의 삶에는 흙가루가 내려앉기도 했습니다
옷걸이에 당신의 걱정을 조용히 걸어 곱게 다립니다. 토마토는 클수록 영양소가 많다고 하는데요. 나는 이제 무럭무럭 자라 당신의 걱정에게 기꺼이 붉고 무른 몸을 내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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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에는 체리 향이 나지 않는다
언니 집 방바닥에 두고 온 체리 말이야, 아직 먹을 수 있어? 나 원래 이렇게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었나? 언니는 아무리 치워도 불쑥 나타나는 체리 같아. 자꾸 치워도 금세 다시 보이는 거 있지. 내 머리카락은 잡초 같아서 흘리는 이야기도 잡스럽다고 언니는 깔깔 웃었잖아
그나마도 덜 떨어뜨리고 사는 게 제대로 살아가는 거라고 말해준 거 이제는 알아. 오늘은 오래된 체리를 깨끗하게 씻어 냉동실에 넣어두면서 언니 생각을 했어. 잡초가 내 머릿속 깊이 뿌리내릴까봐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두게 돼
체리를 버리는 상상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은 더 길게 자라는 것 같거든. 언니, 길어질수록 체리 향이 나는 것 같지 않아? 그 향기는 왜 상하지 않을까? 언니 머리카락을 떠올리다가, 체리 향이 날거라고 함부로 짐작했어. 언니도 내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오래된 믿음도 실은 마음대로 넘겨짚은 거야
꼭지에 두 갈래로 붙은 탱탱한 얼굴을 언니와 내가 톡톡 따먹곤 했던 거 기억나? 언니는 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겨주기도 하잖아. 아마 체리가 우는 걸 봤겠지. 그때 이제 끝이구나, 라고 말했겠지
깜짝 놀라던 동그란 얼굴도 눈동자도 눈물도 그냥 질끈, 양 갈래로 묶어두자, 하나의 꼭지에. 근데 언니, 우는 체리의 눈물에서조차 체리 향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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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 2021년 <천년의 시작>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