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가 편하지 않으면 안에서 눌리는 발의 부위가 아프다가 굳어지면서 그 부위에 티눈이 생긴다.
별로 개의치 않고 보행하는 내 발에 이렇게 한두 군데 티눈이 생기면
커터칼로 티눈 부위를 잘라내어 한 동안은 아픔 없이 걷다가 얼마 후 다시 그 부위가 티눈으로 변한다.
그럼 또 다시 잘라내는 행동을 그 구두를 교체할 때까지 한다.
짧은 머리카락이 발가락을 1cm 정도 뚫고 들어갔을 때의 신랄함도 경험한 적이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선인장 가시나 유리 조각 침투도 보행은 큰 지장을 받는다.
나무를 절단하면 그 절단 면에 박힌 옹이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옹이란 말하자면 성장한 나무의 티눈 같은 것이다.
내 사무실 벽에 덧댄 미송의 인테리어를 둘러보니 이런 모양의 옹이들이 보인다.
소용돌이 모양, 동전 모양, 절편 모양, 고양이 눈 모양.
나무가 자라면서 줄기에 가지들이 생기는데 그 가지가 시작되는 그루터기 부분이 옹이다.
이 나무를 잘라서 세로로 켜면 거기엔 여러 모양의 옹이들이 나타나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이다.
나무가 감각체라면 이 옹이들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아팠을 것이다.
우리에게 사랑니가 생길 때 그 부위가 아프듯이. 나무줄기에 가지가 생겨나고
그 가지에 또 다른 가지들이 생겨나면서 거기에 수많은 나뭇잎이 매달려 이루는 전체 형상,
그러다가 거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고, 그렇게 수십 년을 지나는 것이 나무의 일생이다.
우리의 일생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떡갈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영근 도토리가 떨어져 머리를 맞는 귀여운 일부터 시작해서,
성장통 사랑 고통 질병 실패 불운 등 생사의 문턱을 넘나드는 개인사와
흉년 재난 전염병 국가적 위기 전쟁 등 공동의 불행을 겪기도 하는 등,
우리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발적 또는 인과적으로 이런 사건에 휘말리곤 한다.
이런 사연들은 우리의 인생을 위협하기에 우리는 피하고 싶어진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고, 자동차가 흙탕물을 튀기고 가는 일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기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라는 정체성에는 특별함이 있으며, 그 특별함 속에는 특별한 손길이 작용하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옹이가 생기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신자라는 나무 속에 생기는 옹이는 그냥 우발적이기만 하고 무의미한 것은 없다.
티눈이 생길 때처럼, 사랑니가 생길 때처럼, 몸에 커다란 종기가 생길 때처럼 존재는 통렬하지만,
크고 딱딱하고 날카로운 이물감처럼 내 안에 불편함을 초래하고 그래서 우리는 조개처럼 아파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이것은 우리의 싱겁고 밋밋한 존재 속에 심오한 무늬를 새겨넣는다.
오히려 그 옹이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자는 더욱 하나님의 자녀다운 존재가 된다.
카페나 식당이나 사무실에 놓인 원목 테이블을 눈여겨보라.
옹이가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옹이가 있는 것이, 물결 무늬가 없는 것보다는 물결 무늬가 있는 것이
더 그윽하고 친화적인 매력이 있지 않은가?
지금도 우리 안에는 조용히, 은밀하게 주님께서 만드시는 옹이가 있다.
2024. 11. 9
이 호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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