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논단] 유식론과 신경과학 / 강병조
[열린논단] 5회 - 2009년 4월 24일
I. 서론
저자는 불교신도로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마음을 전공하는 정신의학도로서 근 40년간 학문의 길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스님들과 불교학자들로부터 설법도 듣고, 경전도 공부하고, 불교관계 서적들도 보면서, 저자가 전공하고 있는 의학적인 관점과 다른 점이 많이 있음을 느껴왔다. 특히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유식학의 견해가 최근에 발달한 신경과학적 견해와는 완전히 다름을 알고 있다.
보통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적 관점도 현대 정신의학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종교와 과학은 별개의 문제이며, 다른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과학적인 종교이건 비과학적인 종교이건 인간은 종교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종교는 과학적이고 지식층의 신자들이 믿을 것이고, 비과학적인 종교에는 그에 상응하는 계층들이 믿게 될 것이다.
불교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가장 과학적인 종교이다. 비과학적인 종교인 기독교는 과학을 받아들이고 있다. 전 교황 바오로 2세가 1996년 진화론을 인정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리도 과학의 발달에 따라 그 교리해석을 달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승려교육에서 과학교육을 많이 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요청이다. 그러나 현 우리나라의 승려 교육이 그렇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과학을 전공하는 많은 불자교수들의 논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드려 불교교리를 재해석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면 다른 종교에 뒤 처지지 않고 신도들을 현명하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유식론이 틀렸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4-5세기에 유식학이 대두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도 또한 그만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뇌과학 즉 신경과학은 최근 20-30년 사이에 많이 발달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뇌를 전공하지 않는 스님들, 불교 학자님들, 나아가 일반 신도들은 뇌과학의 최신 지식을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과 신경과학의 주장을 비교하며 고찰하는 것이 유식학의 재해석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 논문을 시도하였다.
II. 유식론
1. 유식사상의 출현 배경
불교 사상은 붓다의 열반 후 수 백여 년 동안 수십 개의 부파 불교로 분열되어 각 부파별로 나름대로의 불교 사상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두 개의 큰 줄기가 있었다. 하나는 구전되어 암송되어 온 붓다의 전통적 가르침에 비교적 충실하려는 철학적․분석적 상좌부(上佐部) 불교 즉 소승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적이고 신앙적 색채를 띠는 대중부(大衆部) 불교 즉 대승불교가 그것이다.
유식학파는 대중부 계열에 속하는 학파로서 유가행파(瑜伽行派 : 요가행파)라고도 부른다. 이는 공(空) 사상을 핵심 사상으로 하는 공관(중관)학파와 함께 대중부 계열에 속하는 것이며, 이 두 학파의 사상은 후대에 대승 불교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고, 이들의 사상에 근거하여 상좌부에서 편찬한 팔리어로 된 초기 불교 경전과는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산스크리트어로 된 대승 불교 경전이 편찬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유식계열의 경전이 공관학파의 공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반야계 경전(금강경, 반야심경, 유마경)보다 나중에 편찬된다( 임원택 435쪽).
유식사상은 소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 등의 사상을 배척하고, 또한 유식사상 보다 앞서 유행했던 반야경 계통의 공사상이 그 진의를 상실하고서 지나치게 공허한 사상으로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식사상이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만, 14쪽)
그러나 이와 같은 공사상이나 유식 사상은 붓다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임원택, 436쪽).
2. 유식사상의 사상가들 및 경론
이 사상은 미륵(彌勒, Maitreya, 270-350)과 무착(無着, Asanga, 310-390) 그리고 세친(世親, Vasubandhu, 320-420)등에 의하여 성립되었다. 중요한 경론(經論)으로는 해심밀경(解深密經),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Yogācārabhūmi), 섭대승론(攝大乘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성유식론(成唯識論), 여래장경(如來藏經), 대반열반경(大槃涅槃經), 승만경, 불성론(佛性論), 능가경,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을 들 수 있다(이만 14쪽, 임원택 435-442쪽).
3. 유식사상의 주장에 대한 신경과학의 입장
1) 마음, 유식 즉 아뢰야식이 하나의 자기동일성(identity)을 갖는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주장.
유식학파에서는 물질로 된 모든 대상 즉 세상의 모든 물질적 존재가 비실재(無, 空)이기에 모두 텅 비었다는 데까지만 공관학파의 공사상에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즉 정신까지도 공하다는 것에는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만약 마음이 비실재인 공이라면 모든 이성적인 사유나 추론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생각, 즉 분별과 사고를 통한 모든 이론적 주장과 견해는 역시 거짓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공관학파에서 주장하는 공사상도 마찬가지로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까지도 비실재인 공이라고 한다면 공사상 자체가 부정되는 것인 만큼 인간의 생각인 사유와 사고, 그리고 그 논리와 주장을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식(識: 마음․인식)의 실재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들은 마음으로 인식하는 외부의 모든 물질적 대상은 그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즉 실재한다는 증거를 댈 수가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마음의 작용에서 나타나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는 마음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비실재이고 거짓이며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심밀경>에서는 마음 중에서도 잠재의식이고 무의식인 제8식 아뢰야식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하게 되는 것이며 차츰 마음이라는 유일한 실재를 절대화시켜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에게는 초자연적이고 영원한 절대 정신인 佛性이나 如來藏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세상에는 오직 마음(정신, 영혼)만이 유일한 실재다. 그리고 그 밖의 물질적 대상은 공이다’라는 유식학파의 사상은 관념론이고 唯心論이다. 이 사상은 붓다 탄생 수백 년 전부터 고대인도 사회를 지배해온 철학사상인 절대적 관념론인 우파니샤드의 사상에 현혹된 후대의 대승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임원택 435-465).
신경과학적 입장 : 정신이니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뇌의 기능(활동)일 뿐이지 하나의 실체(identity)를 가지고 있는 실재는 아니다.
이만은 유식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음을 떠나서 모든 것이 그대로 의연하게 존재한다는 實在論에 관한 인식 그 자체도 사실은 마음이 만들어낸 表象에 불과하며, 외계의 실재가 마음에 影寫되어 표상이 형성된 것이 아니고, 마음 스스로가 표상을 만들어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존재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마음의 주체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아뢰야식에 관한 내용이다. 이 아뢰야식은 인간존재의 근저에 항상 상존해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으며, 그 흐름은 일생 동안 끊어지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생존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쳐서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중생이 어떤 행위나 행동을 하는 한 그것은 대개 선업이거나 악업을 지어서 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에 아뢰야식이 업력의 귀의처로 사용되어 그 속에 心種子가 잠재하고 있다가 그에 알맞은 환경이나 조건 등의 緣을 만나면 모든 것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서 현상계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 - 업에 의하여 오염된 마음 -을 정화시켜 주는 종교적인 실천덕목인 수행이 필요한데 그것이 다름 아닌 yoga행이다(이만, 15-25쪽).
신경과학적 견해:
업력의 귀의처는 뇌의 기억과 관계되는 부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억은 의식적인 기억(어의적, 사실적 기억)과 무의식적인 기억(절차적, 기술적 기억)이 있다. 선업이건 악업이건 인간의 경험은 인간 뇌의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 사람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심리적인 업은 유전되지는 않는다. 경험과 학습은 DNA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나 DNA가 mRNA를 거쳐 단백질로 표현되는 과정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즉 학습이나 경험은 유전은 되지 않으나 뇌에는 영향을 주어 뇌의 기능인 마음에는 영향을 준다고 본다.
참고로 기억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억 형성에는 특히 내측 측두엽, 간뇌핵(diencephalic nuclei), 기저, 전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측 측두엽은 해마와 연결되어 있고 그 앞쪽에 편도가 존재한다. 이들 부위가 모두 기억에 많이 관여하는 부위들이다.
기억의 종류에는 수초간 기억되는 즉시기억, 수분에서 수 일전의 기억인 최근 기억, 수개월에서 수 년 전까지 지속되는 장기기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시기억과 최근기억에 관련된 개념으로 음운을 통한 기억과 시공간적 요소가 포함되는 작업기억이 있다. 이는 전화를 걸면서 들은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처럼 잠시 동안만 정보를 저장하며, 응고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곧 잊혀지게 된다. 단기기억은 응고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장기기억으로 저장된다. 작업기억과 같은 단기 기억은 신경전달물질을 통하여 짧은 시냅스 회로의 흥분으로 급속한 신경 활동이 일어나며 특히 배측 전전두피질의 신경세포가 작업 기억의 정보를 기억하는데 중요하다. 한편 기억의 강화는 단백질의 조합과 신경원의 시냅스를 통한 연결이 변화되면서 생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24-25쪽).
다음으로 유식론의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 두 가지만 들어서 저자의 견해를 밝혀 보겠다.
(가) 6조 해능의 마음관.
“바람이 부니까 깃대가 나부끼는 것도 아니고, 깃대가 나부끼니까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있어서 깃대가 나부끼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란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우주를 이루고 있는 근본 소립자(입자 또는 파장)를 마음이라고 본다면, 바람이나 깃대나 우리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뇌나 모두 ‘이러한 소립자’에서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주의 근본 물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해석은 틀렸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우주를 이루고 있는 근본 소립자를 마음이라고 볼 수도 없다.
둘째, 바람이 부는 것도 깃대가 나부끼는 것도 그것을 지각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는 역시 주관적인 해석이지, 나의 마음이 있어서 깃발이 나부끼는 것은 아니므로 틀렸다고 생각된다. 나의 마음이라는 존재가 그 곳에 없어도 바람이 불면 깃대는 나부끼기 마련이다.
셋째, 나의 마음이 존재해서 나의 마음이 깃발을 나부끼게 만들고, 바람도 불게 만든다고 해석하는 경우인데, 이는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 나의 마음의 존재가 깃발과 바람에 약간의 영향(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줄 수는 있겠으나, 나의 마음이 깃발을 나부끼게 만들고 바람을 불게 만들지는 못 한다.
(나) 一切唯心造
첫째, 이 의미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외계는 달리 보인다고 생각하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한 부인 환자가, 마음을 돌려 먹으니 남편이 자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며 자기를 진정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때 이런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즉 마음의 기능 또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뜻이다.
둘째, 마음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이 마음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뜻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현대 과학적으로 볼 때 틀렸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실체는 없고 마음이란 단지 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셋째, 내가 죽고 없으면 이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니, 내게는 세상이 없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너무 주관적이며, 한 사람이 죽는다고 이 세상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일체유심조의 문구를 첫 번째의 해석으로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2). 8식의 구조
5가지 감각기관(5根): 안, 이, 비, 설, 신.
감각기관의 대상(境) : 색(물질), 성, 향, 미, 촉
5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6식 : 의식. 의근에 의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킴 .
이 의식은 우리 신체외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분야로서, 눈 등의 감각기관으로는 볼 수가 없고 만져 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앞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저 깊은 곳에서 항상 동반하여 일어나거나 아니면 독단적으로 활동하는 정신적인 소산을 말한다. 그리고 이 의식의 대상을 法境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법이란 일체제법(一切諸法)과 같은 존재로서 유형적인 모든 사물은 물론이고, 무형적인 관념까지도 포함해서 말하는 그런 존재를 말한다.
소승불교 시대에는 6식설만 가지고도 우리들의 인식활동의 원리를 대변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대승불교시대에 들어서는 인간의 궁극적 실체로서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변화하지 않고 상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상정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다름 아닌 제8식 아뢰야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은 우리들이 잠을 잘 때나 심지어 죽어서 혼백(魂魄)이 떠돌아다닐 적에도, 내지는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을 때에도 그 활동은 계속한다는 것으로 육도(六道) 윤회의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제8식 아뢰야식을 일으킨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일부러 어떤 의도적인 행위,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전인수격으로 끊임없이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 및 아애(我愛) 등 4종의 근본 번뇌와 항상 같이 하면서 업을 일으킬 때에, 이들에 의한 인상(印象)이나 여운 등을 그대로 흡수하여 저장하는 장소로서 아뢰야식이 활용되는데,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정신은 제6 의식보다는 깊고 제8 아뢰야식 보다는 얕은 제7 말나식(末那識manasovijñāna)이라는 의식이 상정됨으로 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7식 말나식을 일컬어서 ‘자아의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에 의하여 업을 지어서 우리 중생들이 결과적으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제8 아뢰야식은 이렇게 모든 업의 산물들을 스스로 저장하는 능장(能藏)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세력들을 소장(所藏)할 장소로서의 처소로도 제공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아뢰야식은 앞에서와 같이 항상 제7 말나식의 집착력과 아집 등에 의하여 유린당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이럴 경우 제8 아뢰야식은 집장(執藏)의 뜻이 강하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유루법(有漏法)이 현행하는 사이, 곧 아집 등이 활동하는 위치까지 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아집 등이 없는 성인위(聖人位)에 오르면 이 識의 이름은 자연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만. 18-22쪽).
“아뢰야식에는, 그 파악하는 각도에 따라서 <이숙식>, <종자식>이라고 부르는 방법도 있으며, 또 <집장>이라고 보는 방법도 있으나, 그것은 각각 보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뢰야(ālaya)란 어느 곳에 ‘자리잡다’, ‘정착하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a-li'로부터 나온 파생어로서 ’주거‘, ’용기‘, 藏을 의미한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경험이 뒤에 남긴 여력이, 잠재의식으로서 저장되는 장이 아뢰야이다 (고재욱, 257-264쪽. 太田久紀, 117-150쪽, 현남규 384쪽).
한편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아뢰야식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제8식 가운데는 모든 업의 세력들이 풍부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면 이것은 진여(眞如)나 법성(法性)과 같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아뢰야식이 만일에 진여와 같이 변하지 않아서 무위법(無爲法)이 된다면, 여기에는 본래 작용이 없고, 또한 오고 감이 없으며, 변하지 않는 진리와 같기 때문에 여기서는 현상계의 제법이 생성될 수가 없다(無位無作用設 : 眞如의연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성의 것은 반드시 현상계를 낳을 수 있는 유위법의 것이어야 한다. 이에 반하여 대승불교 전반에서는 이러한 아뢰야식에 眞如性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잡념법으로 취급하고 이보다 더 깊은 불멸의 어떤 것을 상정하여 제9 아마라식(阿摩羅識, amala-vijñāna)을 세우는데, 이는 오염되지 않아 깨끗하다는 의미에서 무구식(無垢識)이라고 하거나 혹은 백정식(白淨識)이라고 한다(이만. 22-24쪽).
신경과학적 견해 :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 눈을 통해서 뇌로 보고, 귀를 통해서 뇌가 듣고 하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6식인 의식도 뇌의 기능이다. 7식인 마나식의 아집도, 8식인 알라이야식의 저장도 모두 뇌에서 일어나는 기능들일 뿐이다.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는 제9식인 무구식 또는 백정식은 신경과학적으로 볼 때 이치에 맞지 않으며 단지 인간이 창조한 하나의 개념인 “하느님”처럼 하나의 개념 내지 관념일 뿐이다.
3)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는 주장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이 진짜로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여 죽은 후에 이것이 다음 세계로 윤회한다고 믿고 있다.
이 윤회(輪廻)사상은 불교 이전에 인도의 베다 종교 또는 우파니샤드의 사상이다. 베다 종교는 인도의 카스트제도 (4 계급이 있음)를 유지하기 위해서 윤회사상을 받아들였다. 즉 천민계급으로 태어나도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이 생에 천민으로 태어났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든 제도이다.
석가모니는 이 윤회사상을 거부하였다. 다음 간단히 붓다의 윤회관을 보겠다.
붓다 탄생 당시인 기원전 6세기에는 원시 이래로 내려온 영혼을 주체로 한 윤회 개념이 베다 종교와 우파니샤드 사상에 의하여 지적 엘리트들인 사상가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사실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명상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이 기능하는 모습을 관찰하여 원리이자 사실인 자연법칙을 발견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붓다는 당시에 사실처럼 인정되는 미혹한 관점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바차고타라는 수행승은 ‘인간이 죽고 나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붓다에게 물었다. <아함경>에서 붓다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불타는 땔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즉 “사람이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땔감이 다 타서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꺼진 불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따라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이와 같으니, 죽은 자가 어디로 간다느니 가지 않는다느니 설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러한 붓다의 말에서 우리는 또다시 이성적이고 실증적이며 과학적인 그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임원택, 372-375쪽).
저자의 견해:
현대의학은 정신과 신체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정신이란 뇌의 기능>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런데도 정신이니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여 죽으면 이것이 내세로 윤회한다고 생각하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많다. 죄를 짖지 말라고 유치원생에게 가르치는 권선징악적인 교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교리를 믿는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나 사회에는 유익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이 무엇인가? 하고 벽을 마주하고 참선을 아무리 많아 하여 보았자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서점에 가서 마음에 관한 과학 서적 한 권 사보면 빨리 깨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윤회 사상을 받아드려 불교의 없어서는 안 될 교리로 생각하고 있다. 각묵스님은 불교신문 교리문답에서 “자아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 윤회한다”고 말씀하셨다 (각묵스님, ibulgyo, 2005.5.7). 이 흐름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나는 이 흐름을 에너지의 흐름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가장 과학적이다. 내가 죽어 나의 시체를 개가 뜯어먹으면 나의 에너지는 개에게로 흘러간다. 그래서 내가 개가되는 것이다. 나의 시체를 사과나무의 거름으로 쓴다면 내가 사과가 되는 것이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도 맞고 과학적이다.
또한 이 윤회를 마음의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죄를 짖고 나면 죄의식으로 불안해하는 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냐. 몰라서 죄를 지었다면 그 몰랐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無明이 아니냐. 육도 윤회설도 모두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 윤회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4) 선정 체험으로 유식을 확증한다는 생각.
유식을 선정 체험으로 확증할 수는 없다. 유식 즉 마음은 뇌의 기능이므로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선정으로는 밝혀낼 수 없다. 다만 선정을 함으로서 생기는 새로운 경험과 뇌의 변화들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뇌의 영상연구로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5) 아뢰야식의 기능들은 뇌의 기능으로 설명된다.
<성유식론> 제3권에서는 아뢰야식의 별명을 다음의 일곱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즉 i) 心(citta) ii) 아타나(阿陀那, ādāna-vijñāna ) iii) 소지의(所知依) iv) 종자식(種子識, bijakah-vijñāna) v) 아뢰야(阿賴耶, ālaya-vijñāna ) vi) 이숙(異熟, vipāke) vii) 무구식(無垢識, amala)이다 (고재욱. 257쪽).
心, 아뢰야, 무구식은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으므로 설명을 생략하고, 설명되지 않은 몇 가지만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다.
(가) 아타나
아뢰야식은 아타나식으로도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이다. 이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이란 전문적으로는 <집수(執受)>라고 한다. 상세히 말하면 아뢰야식은 육체의 감각기관, 五根(眼,耳,鼻,舌,身)을 집수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생리적 有機的인 측면에서 <안액동일(安厄同一)>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心身同一을 설명하기 위한 안액동일이란 한쪽이 양호한 상태라면 다른 쪽도 양호하며 한쪽이 나쁜 상태라면 다른 쪽도 나쁜 상태라는 의미이다 (고재욱. 259쪽)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의 역할을 하는 아타나식은 바로 뇌의 기능임을 말해준다. 오근의 기능을 하는 곳도 바로 뇌요,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도 뇌의 생명중추인 뇌간 (brain stem)이다. 안액동일도 뇌로 설명된다. 뇌의 상태가 나쁘면 정신상태도 나쁘고, 정신상태가 나쁘면 뇌의 상태도 나빠지기 마련이다.
(나) 소지의(所知依)
소지의란 지식, 사량식이 의지하는 곳. 의식의 주체인 7식 마나스식이 의지하는 곳이란 뜻이다. 지식이 저장되는 부위는 뇌의 피질이다. 7식인 자아의식을 담당하는 부위는 두정엽과 측두엽을 중심으로 하는 뇌의 부위이다 (Sadock BJ & Sadock VA, 566-574쪽).
(다) 종자식
불교의 근본사상의 하나는 業思想이다. 즉 현재의 상태는 과거의 업의 결과이며 현재의 업은 미래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종자란 아뢰야식 속에서 자기의 果를 산출하는 <功能差別>이라고 정의된다. 여기서 공능이란 力, 能力을 의미하며, 차별이란 <특수한>, <우세한> 것을 의미한다. 즉 <종자란 자기를 산출하는 특수한 힘>이다. 그것은 에네르기와 같이 하나의 힘인 것이다. 그것은 사물에 작용하고 있는 顯在的 에네르기가 아니라 원자핵과 같은 핵에네르기처럼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잠재적이며 정신적인 에네르기이다 (고재욱. 265-267쪽).
종자를 자기를 산출하는 특수한 힘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유전인자를 의미할 것이다. 유전인자는 계속 자기를 복제하려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인간의 뇌도 이 유전인자의 영향을 받게 되며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라) 이숙(異熟)과 無記
불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記別할 수 없는 것(無記)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표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적 가치관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왜 아뢰야식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무기인가? 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요컨대 아뢰야식의 특성은 i)異熟되는 것 ii) 선도 악도 아닌 무기 iii) 훈습(熏習)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숙의 원래의 뜻은 <前의 원인과 다른 결과를 성숙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전의 원인이란 과거의 카르마이며 <성숙된 결과>란 아뢰야식이다. 과거의 카르마가 선하든 악하든 그 결과를 낳지만 아뢰야식은 선도 악도 아니다. 요컨대 무기라는 것이다. (고재욱. 259-260쪽)
확실히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카르마에 의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것에 속박되어 있다. 과거의 선악이 뇌 속의 기억중추에 저장되어 있지만, 마음을 돌이켜 먹으면 그 선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기이지, 선과 악이 기록되지 않는 실체가 뇌 아닌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 無始 이래의 훈습(熏習)
훈습이란 과거의 행위가 남긴 인상이다. 무시이래의 훈습은 바로 진화를 의미한다. 인간의 뇌는 진화의 산물이다. 훈습과 학습을 하면 인간의 뇌는 그쪽으로 발달한다. 이것은 뇌의 유연성(plasticity) 때문이다. 피아노를 열심히 치면 피아노 치는 손가락을 담당하는 뇌 부위의 신경뉴런이 가지를 많이 치고 발달하게 된다 (Gerald M. Edelman, 146쪽).
III. 마음이란 무엇인가?
1. 마음이란 뇌의 기능(활동)이다.
마음이란 실체는 없다. 영혼이란 실체도 없다.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뇌의 기능일 뿐이며, 하나의 작용이나 개념(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DNA 구조의 공동 발견자인 프랜시스 크릭은, 최근 자신의 저서 <놀라운 가설>에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의 뇌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경 세포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들끼리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이해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Gary Marcus, 7쪽).
마음이 뇌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크릭은 정확했다. 그러나 마음을 전공하고 있는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놀라운 사실이 아니며 상식에 속하는 말이다. MIT의 인지과학자 스티븐 핀커의 말을 빌리자면 “뇌가 하는 일이 바로 마음이다”.
오늘날 뇌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증거는 도처에 널려있다. 항우울제인 프로작이 뇌를 자극하여 기분을 바꾼다거나, 발작을 하면 뇌 손상이 일어나 행동방식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 뇌의 각 부분이 각기 서로 다른 인지 기능에 참여한다는 것- 음악을 들을 때는 우측 뇌, 연설을 할 때는 좌측 뇌, 공포를 느낄 때는 편도채, 오르가즘을 느낄 때는 우측 전두엽 피질- 등을 과학이 보여 주었다.
그런데, 마음의 기원이 뇌라는 사실은 대부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어도, 또 다른 사실, 즉 뇌의 기원은 유전자라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는 사람은 훨씬 적다. 50년 전에 크릭이 해독해낸 분자는 그간 과학, 의학, 심지어 법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마음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만큼은 유전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Gary Marcus, 7-8쪽).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음이란 실체가 존재하며 이 실체가 뇌 안에 존재해서 뇌를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 아니라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sum, ergo cogito)“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나 융이 말한 것처럼, 겉으로 보면 일원론 같이 보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이원론인 ‘속성 이원론’도 틀렸다. 프로이트가 말한 ‘개인 무의식’도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기능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기능은 뇌의 피질하 부위에서 담당한다. 융이 이야기 하는 ‘집단 무의식’ 역시 뇌를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과 같은 뇌의 기능이 있을 뿐이다. 이 역시 뇌의 피질하 조직의 기능에 불과 하다.
2. 뇌라는 물질이 어떻게 작용해서 ‘마음’이라는 현상(기능)을 나타내게 되는가?
이는 뇌의 구조를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뇌는 침팬지의 뇌와 98.7%가 유전적으로 같다. 다만 1.3%가 다른데 이 1.3%에 해당하는 언어유전자, 생각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진화의 산물이며,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인간의 뇌는 국소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뇌는 그룹으로 작용한다. 즉 스위스 군인들의 칼처럼 여러 가지 기능을 하는 신경원들의 집단이 회로를 형성해서 작용한다. 예를 들면, 보는 신경회로, 듣는 신경회로, 말하는 신경회로, 생각하는 신경회로, 감정을 느끼고 감정을 발산하는 신경회로, 사랑하는 신경회로, 두려움을 느끼는 신경회로, 피아노를 치는 신경회로, 기억을 담당하는 신경회로, 꿈을 꾸는 신경회로, 판단하는 신경회로, 자유의지 와 동기를 담당하는 신경회로, 종교적 사고와 행위를 담당하는 신경회로 등등.
뇌가 죽으면 마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이 있어서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하는 것도 과학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인간의 뇌는 1000억개의 뉴론과 100조개의 신경결합으로 되어있다.
신경다윈주의자 Gerald M. Edel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유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입자들은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은 진화적으로 유효하다. 세계는 마음에서 독립해 존재하고 존속되며, 마음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뇌는 선택계이며, 튜링 기계 (turing machine)가 아니다. 감각 자료는 마음의 토대가 아니다. 지난 300년에 걸쳐 과학은 지구중심설, 생기론, 그리고 단순한 기계론과 같은 편협한 사상들을 이미 붕괴시켜 왔다.
마음은 물질의 특별한 형태가 아니라, 물질의 특별한 배열에 따른, 특별한 종류의 과정이다. 특별한 종류의 생물학적 구성이 정신적 과정을 낳는다.
의식이 자연선택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은 그 존재와 기능에 있어 의식에 의존한다. 지각과 개념 형성, 기억 사이의 특수한 관계 집합에서 의식이 생겨난다.
에델만 생각의 핵심은 뉴런 집단선택설(Theory of Neuronal Group Selection)이다. 이는 유전자와 유전형질에 의해서 신경망이 형성되며 신경조직이 집단화된다.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 시냅스의 선택과정이 생기게 된다. 즉 뇌는 신경 유연성 (neural plasticity),이란 것이 있어서, 경험과 훈련에 의해서 그 쪽 신경들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진화의 결과이지 神에 의한 논리적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음을 낳는 뇌는 그 형성 방식에 있어 컴퓨터보다는 정글과 유사한 원형적인 복합계이다.
뇌는 자연선택과 체성선택 등의 두 가지 선택과정을 겪는다. 결과는 회로와 층들로 가득 찬 오묘하고 다층적인 것이다.
이러한 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학자들이, 분자적인, 장 이론적인 또는 생리학적인 용어만 가지고 사람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간단히 설명될 수 없다. 개인의 행동에 대한 이론을 분자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이론으로 환원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는 영혼 불멸을 바라는 사람들이 영원한 정신을 계속 상정하는 것이나 뭐가 다른가? (Gerald M. Edelman, 19-308쪽).
IV. 결론
불교 교리에서 비과학적 교리는 버리고 새로운 현대 과학에 맞는 교리로 재해석하여야 한다. 그 중 유식사상이 가장 비과학적이다. 유식사상의 주된 기능은 뇌의 기능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식 즉 8식인 아뢰야식이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며, 이것이 윤회의 주체로서도 활동한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현대 신경과학은 동의할 수 없다. 여기서 그것을 논하여 이 교리를 현대 신경과학에 맞게 재해석을 시도하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