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레앙 여행2 - 오를레앙 거리를 걸어서 잔다르크를 보고는 옛일을 회상하다!

10월 25일 오를레앙 의 호텔에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직은 어두운 레퓌블리크 거리
Rue de la Republique 를 걸어 마르트루아 광장 Pl. du Martroi 으로 향하는데
우리는 오늘 아침 나절에 오를레앙 시가지 를 구경하고는 기차로 파리 로 가서는 그간
파리에 3번이나 갔는데도 미처 보지 못한 특별한 곳을 보려고 합니다.

바로 파리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공동묘지 인 페르 라세즈 묘지 를 보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옛날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 을 올렸던 유서 깊은 도시인 랭스 로 가서 관광까지 해야 합니다.

오를레앙 거리 를 남쪽으로 걸어서 마르투아 광장 에 이르니 어둠 속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말 위에 올라 탄 처녀 잔다르크 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새벽 이라 너무나도 추워 우선 근처 카페 에 들어가 커피 카페라떼 를
시켜서는 언 몸이며 손가락 부터 녹이고 봅니다. 가을 인데도 이토록 춥다니......

다시 나와서는 제네랄 드골 광장 Pl. du General de 에 이르러... 잔다르크의 집
Maison de Jeanne d'Arc 을 보는데 너무 일찍은 시간이라 아직은 문이 닫혔네요!

여긴 1429년 4월 29일 부터 5월 9일 까지 잔다르크가 지냈던 집 으로 현재는
박물관인 데, 중세 갑옷과 투구 그리고.....
잔다르크에 관한 자료와 초상화 및 17세기 태피스트리 가 진열되어 있답니다.

그러고는 루아얄 거리 Rue Royale 를 걸어 샤틀레 시장 Halles Chatelet 을 볼까 하다가
역시나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 그냥 내처 걸어서.....
루아르 강 La Loire 조르주생크 다리 Pont George 에 이르니 강변에는 숲이 우거졌는데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자니 동녘 하늘이 불그스레지는게 이제사 해가 뜨는 모양이네요?

처녀 잔다르크 가 등장하는 100년 전쟁 은 1337년 부터 1453년 까지 116년 동안
프랑스 땅에서 영국과 프랑스 가 전투와 휴전을 되풀이한 오랜 전쟁 입니다.

일찌기 백 수십년 전에 프랑스의 세느강 하구에 정착한 바이킹의 후예 인 노르망디공
윌리엄 이 1066년 5천명의 기사등 1만 5천 을 이끌고....
바다 건너 영국으로 진격해 노르만 왕조 를 세운이래 프랑스에도 영토를 소유 했습니다.

그후 노르만 왕조 마지막 왕 헨리 1세 가 후사가 없자 이혼한 딸 마틸다 를 프랑스의 앙주
백작 에게 시집 보내니 헨리 2세 가 태어나게 됩니다.

앙주 백작 을 계승한 헨리 2세 총각이 파리 궁정에 신년 세배 드리러 갔다가 프랑스의
왕비 엘레노어 와 눈이 맞아 버립니다!

헨리 2세 총각은 한참이나 연상인 엘레노어 를 이혼 시켜서는 결혼하니 그녀의 친정
땅인 보르도의 가스코뉴와 아키텐, 키엔느 를 상속하고.....
거기다가 외가인 영국 으로 진격해 왕 에 올라 플랜타지넷 왕조 를 열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헨리 2세 잉글랜드 왕 은 프랑스 내에 노르망디, 앙주 및 아키텐등 3차례
에 걸쳐 획득한 엄청난 땅 을 소유하니.....
왕권 신장을 노리는 프랑스왕 과는 끊임 없는 분쟁 을 겪어 오던 중에.......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 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 하자, 그의 4촌 형제
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 가 왕위 에 오르니 프랑스에 발루아 왕가 가 출현하게 됩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 는 그의 모친이 카페 왕가 출신 ( 샤를 4세의 누이 ) 이라는
이유로 잉글랜드 왕인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 을 빚게 됩니다.

에드워드 1세를 이어 프랑스 왕위 를 노리는 플랜타지네트 왕조의 영국왕 에드워드 3세
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 에 빠뜨리기 위하여......
프랑스가 지배 하던 플랑드르(벨기에 북부)에 수출해오던 양모 공급을 중단 합니다.

그 보복 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 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키엔느와 가스코뉴 의
몰수 를 선언하게 되니....
마침내 1337년 에드워드 3세 는 필리프 6세 에게 공식적인 도전장 을 띄우게 됩니다.

플랑드르(벨기에) 는 프랑스 왕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공급국인 영국 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 하고 있었습니다.

보르도 가 속한 프랑스 서남부 아키텐과 끼엔느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 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으니.....
100년 전쟁 의 근본적 원인은 프랑스와 영국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루아르 강 을 떠나 루아얄 거리 를 걸어 만나는 도로인 잔다르크가 Rue Jeanne d'Arc
를 오른쪽으로 걸으니 생트 크루아 광장 Pl. Sainte Croix 이 나오는데.....
어떤 청사 건물 앞에 아침 부터 사람들이 줄 서 있는데 무슨 이민국 같은 것일러나?


그 앞에 높은 첨탑 을 가진 건축물이 생트 크루아 대성당 Cathedrale Sainte Croix 인데
14세기에 세워진 후에 화재 등을 여려차례 겪은 후.....


부르봉 왕조 를 연 앙리 4세 와 메디시스의 명 으로 1601년에 착공해 1829년에 완공
되었다는데 높이 81m 의 파사드와 탑 은.....

그 훗날인 18세기 건축물 로 곡선 장식이 아름다운 고딕양식 의 중심부분 이며 그리고 19세기에
완성된 스테인드 글라스 에는 잔다르크의 생애 가 묘사되어 있다지만 아침이라 문이 닫혔있네요?

잔다르크 는 농민의 딸 로 1429년“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 을 듣고 고향을 떠나
루아르 강변의 시농 성(城)에 있는 샤를 황태자 ( 뒷날의 샤를 7세 ) 를 방문 합니다.

헨리 5세 는 1415년 아쟁쿠르 전투 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니 뇌질환을 앓던 샤를 6세를
대신해서 420년에 왕비 이자보 와 부르고뉴공 은 평화를 위해 공주 카트린 을 영국왕
헨리 5세에게 시집보내고는 그 후손이 프랑스를 통치 한다는 트루아 조약 을 체결합니다.

프랑스땅은 서부 및 북부 를 영국군 및 부르고뉴파 군대 가 점령하고 있었고 왕위도 트루아 조약 에 따라 프랑스왕 샤를 6세 사후 에는 영국왕 헨리 5세가 계승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헨리 5세가 먼저 죽으니 수포로 돌아갔고 아르마냐크파는 왕세자 샤를 7세를 지지 하는데
아르마냐크파는 오를레앙공의 인척 인 베르나르 7세를 중심으로 부르고뉴파와 대립 했습니다.

그러니까 환자인 프랑스왕 샤를 6세만 죽으면 프랑스 왕위는 자연히 영국왕이 차지 하는지라
의기소침했던 샤를 황태자를 격려한 잔다르크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나가
영국군을 격파하여 여기“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찌릅니다.

아르마냐크파 는 잔다르크를 앞세워 영국군과 부르고뉴파 에 맞서 샤를 7세 왕세자
를 지지했으니 흰 갑주 를 입고 선두에 선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는데..... 내친김에 프랑스 동북지방인 랭스 까지 진격합니다.

잔 다르크 는 그녀가 수복한 프랑스 동북지방의 랭스 대성당 에서 프랑스의 오랜 전통적인
전례 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 을 거행토록 주선 하였습니다.

이후 잔 다르크 는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하다가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 에서 부르고뉴파 군대 에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집니다.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는 원래 부르군드족 나라 에서 유래하지만 오래전에 프랑스에 병합
되어 프랑스의 왕자 가 다스렸는데 프랑스 왕과 불화로 영국과 손을 잡았던 것입니다!


1431년 성당의 종교 재판 에서 잔다르크 는 사악한 마녀 로 낙인 찍혀 이단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 을 당하였는 데......
프랑스 왕실 과 가톨릭 교회 는 참으로 후안무치하니, 야비하게도 이에 동조합니다.


하기사 옛날부터 중국에 말이 있으니.... 전장에 나간 장수의 공 이 너무 높으면....
"하늘도 시기하고 임금도 질투" 한다고 했던가요?
하여 이순신 장군 도 노량 해전에서 자살 하여 자식과 조카 나마 구했던 것이지요!!!
아마도 전쟁 후 까지도 살아 있었으면 험한 꼴을 당했을 것 입니다?

후일 25년이 지난 1456년에야 샤를 7세 는 앞서의 유죄(마녀) 판결을 파기 하여 그녀의
명예를 회복 시켰지만, 가톨릭 교회는 잔다르크의 마녀 판결이 정당 하다며.....
아집과 고집으로 버티다가 5백년 이나 지난 1920년에야 그녀를 성녀로 시성 하였습니다.

여기 오를레앙 미술관 Musee des Beaux Arts d'Orleans 에는 16 ~ 19세기말 이탈리아,
플랑드르 및 프랑스 회화 5만점 을 소장하고 있으며 파스텔화 컬렉션 이 풍부하답니다.

하지만 역시 아침 일찍은 시간이라 문이 닫혀있어 현관에 있는 조각 몇 점 과 말에
올라 깃발을 치켜 든 잔다르크의 그림 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랩니다.

건너편에 시청 Hotel Groslot 건물이 보이는 데, 1550년에 지어진 대관의 집 으로
1790년 이후 시청 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견학은 무료 라지만 역시나.....

다시 길을 걸어 호텔 로 돌아오면서 보니 큰 도로에 공사중 인 데.... 아마도 트램
노선을 하나 새로 깔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라베유 호텔 de L'Abeille Hotel 로 돌아와 체크아웃 을 하고는, 철도파업 으로
여기 오를레앙역은 기차가 운행하지 않으니.....

어제 처럼 4km 떨어진 Gare de Fleury Les Aubrais 역으로 가기 위해 트램 을 타기로
하고 길거리에 있는 티켓 자판기 를 살펴 봅니다.


불어 로 되어 있기는 하나 짐작컨대 동전이나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교통 카드 같은 것을 사용해서 티켓을 구입하는 것 같아 포기할 수 밖에 없네요?


마침 트램 이 도착하기로 그냥 올라타서는 유로화 동전 을 운전수에게 직접 건네려고
하니 유리 칸막이 가 되어 있어 불가능 합니다?


동전을 들고 난처한 표정 을 지으며 둘러보니 승객들의 웃는 모습에..... 돈을 내지
말고 그냥 타고 가라고 격려(?) 하는 것 같아 쑥스러운 마음에 그냥 안으로 들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