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만에 돌아왔지만 익살스런 표정은 그대로
1988년 도난된 나한상·제석천상, 사립박물관장 수장고서 회수
조선 후기 전라도 대표 조각승 색난 스님이 제작에 참여한 성보
지역 특색 담겨 중요 작품이지만 나한상 4구 여전히 행방 묘연
사진1) 천은사 나한상과 제석천상, 1694년, 높이 75cm 및 80cm.
1988년 2월23일 전남 구례 천은사 응진전(應眞殿)에 봉안됐던 목조나한상 7구와 목조제석천상 1구가 도난됐다. 33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나한상, 제석천상은 지난해 서울 한 사립박물관장 은닉처에서 발견됐다. 나한상 2구와 제석천상 1구가 발견된 이후, 나한상 1구를 추가로 회수하였다(사진 1, 2). 이는 지난해 1월 모 경매회사에서 경매진행 예정이었던 ‘포항 보경사 불화’ 2점을 확인하고, 도난 불교문화재 17건 33점을 압수하면서 관련자들을 지속적으로 수사한 성과다.
구례 천은사(泉隱寺)는 828년(신라 흥덕왕 3년)에 덕운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감로사(甘露寺)라 불렸다. 사찰 창건과 관련된 내용은 1774년 중수된 극락보전 상량문에 처음 나온다. “당 희종 건부 2년(875) 연기 조사가 가람을 창건하고 후에 덕운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천은사는 또 1898년에 지은 시집 ‘매천집’ 제3권에 “구례군 광의면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처음 세워졌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간행된 ‘구례군지’(구례군지편찬위원회, 2005)에 연기 조사는 도선 국사(道詵國師, 827~898)의 호로 천은사의 창건주로 전해진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개창됐다는 사실이다.
사진 2) 천은사 나한상, 1694년, 높이 78cm.
고려시대에 이르러 충렬왕 때에는 남방제일(南方第一) 선종사찰로 지정되어 주요 수행처로서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불타버렸다. 다행히 1610년 주지였던 혜정 스님이 중창하고 1679년 단유 스님이 중수하면서 사찰 이름을 천은사로 바꿨다. 원래 이 절에는 맑고 차가운 감로천이 있었는데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돌로 구렁이를 죽였더니 이후 감로천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 천은사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1774년에 이르러 혜암 스님이 천은사를 크게 중창하여 현재 모습을 하고 있는데, 경내 전각들은 대부분 이 시기 중건된 것이다. 극락보전을 비롯해 목조보살상 2구, 불화, 괘불탱, 금동불감 등 보물로 지정된 것만 해도 다섯이나 된다.
회수한 천은사 나한상 3구의 높이는 모두 75cm로 특징도 같고 파손 부위도 거의 없지만 나무 틈이 심하게 벌어진 상태다. 다만 나한상 2구는 도난된 후에 개채되었는데 양 볼에 붉은 색까지 칠하여 예스러운 멋이 적어져 생경하다. 또다른 나한상 1구는 채색이 박락되었지만 가사와 신발 등에 정교한 문양이 남아 있어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나한상 머리는 몸에 비해 큰 편이며 얼굴은 네모난 형태로 천진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몸에는 화려한 색의 가사와 장삼을 입고 있는데 둥근 깃이 있는 내의를 입은 나한상과 내의를 입지 않은 나한상이 있다. 앉아 있는 자세와 상서로운 서수(瑞獸) 모습도 다양하다. 나한상은 바위 형태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거나 한쪽 다리만 내린 반가좌를 하고 있다. 또 온갖 잡귀를 막아주는 벽사(僻邪)의 의미를 가진 호랑이와 같은 서수는 무릎 위에 놓여 있거나 무릎 사이로 머리를 들어 올리고 양 발로 서 있는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둥근 깃의 내의를 입고 화려한 가사를 걸친 착의법이나 호랑이의 양 발을 잡고 있는 자세 등에서 조선 후기 요소가 엿보인다. 조선 후기 나한상은 이전에 비해 화려하고 장식적인 옷을 입고 있으며 동적이면서도 해학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스타일의 나한상은 17세기 후반 제작된 ‘강진 정수사 나한상’이나 ‘고흥 능가사 나한상’ 등과 매우 유사하다.
사진 3) 천은사 나한상 복장구멍.필자 제공
천은사 나한상 3구의 뒷면 머리와 등부분에는 복장구멍이 있는데 내부에서 조성발원문, 후령통, 다라니 등의 복장물이 나왔다(사진 3). 조성발원문의 내용도 유사하다. “1694년(숙종 20) 지리산 감로사에서 석가, 가섭, 아난과 함께 십육성중, 좌우 제석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으며 색난, 득우, 웅원, 추붕, 추평 스님 등 7명의 조각승이 참여했다”는 기록이다. 특히 색난 스님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까지 전라도 지역에서 많은 불상을 제작했던 대표 조각승이다.
또한 나한상 3구 가운데 2구는 대좌 정면에 ‘제일(第一)’ ‘제팔(第八)’이란 묵서가 있어 존명을 확인할 수 있다. 16나한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인 제1존자 빈도라발라타사(賓度羅跋囉惰闍)와 제8존자인 벌사라불다라(伐闍羅弗多羅)에 해당된다. 반가좌를 한 나한상의 대좌에도 글자가 적혀 있으나 현재는 지워진 상태라 확인하기가 어렵다.
제석천상(帝釋天像) 1구는 높이 80cm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내려뜨린 모습이 자연스럽다. 전반적으로 개채되어 얼굴에는 호분이 칠해져 있고 옷은 붉은 색과 녹색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나한상에 비해 색감이 단조로운 느낌이다.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어깨 위에는 긴 보발이 내려와 있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온화한 인상이다. 몸에 걸친 옷은 불, 보살상과는 달리 소매가 긴 포를 입고 어깨 위에는 구름 모양의 운견(雲肩)을 둘렀으며 다리 사이로 허리를 묶은 매듭끈이 길게 내려와 있다. 특히 정강이 부분에 표현된 장식띠는 17세기의 조선 후기 보살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왼손은 가슴 위로 올리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고 있는데 대개 설법인을 하고 있으나, 연꽃 또는 모란꽃을 쥐고 있거나 합장한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상의 뒷면에는 복장 구멍이 있으나 복장물은 없어진 상태이다.
제석천은 고대 인도의 신이 불교로 수용되면서 범천(梵天)과 짝을 이루어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모든 신중 중에서 으뜸이다. 불교경전에서 범천은 부처가 성불한 후 설법하기를 주로 권청하며 제석천은 불사리와 부처의 손톱, 발우, 가사 등 성물(聖物)을 안치하고 예배하는 것이 주요 역할이다. 이러한 제석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사찰에서는 주로 불법을 지키거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기복적인 의미로 나한전이나 응진전에 나한상과 함께 봉안되었다. 조각상의 예는 매우 드문 편이나 조선 후기의 불화 형식으로 많이 남아 있다.
천은사 나한상 3구와 제석천상 1구는 조성발원문에 의해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색난을 비롯한 조각승들의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조형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도난된 나한상 7구 중 3구만 제자리로 돌아왔고 나머지 4구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꼭꼭 숨어 세상에 나오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당당하게 등장할 것이라 기대한다.
법보신문 /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