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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3월26일 (자)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수원] 우리가 하느님의 인맥을 넓혀주는 자녀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신명 4, 1. 5 - 9
† 복음 : 마태 5, 17 - 19
★ 모세가 백성에게 율법의 준수를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실천하라고 내려 주신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켜야 한다. 이 백성의 위대함과
지혜로움은 오로지 주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그분께서 명하신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제대로 듣고 실천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이나 예언서를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로 말미암은 폐해에 대하여 자주 듣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강하게 비판하신 것을 알기에 오늘 복음 말씀은 오히려 낯설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가장 깊은 지혜를 깨치는 것이자 온전한 생명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며, 주님의 법을 제대로 깨닫고 몸과 마음에 새기는 '의로움'을 키우라고
격려하십니다(마태 5,20 참조).
사실 『탈무드』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인들이 긴 세월 동안 율법을 배우며
연구하고 실천해 온 역사는 인류에게 큰 지혜의 샘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통에 따르면, 율법을 배우는 것은 언제나 그 율법을 가르쳐 주는 이를
스승으로 삼아 절대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본의 문학인 우치다
다츠루가 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이라는 책을 보면, 『탈무드』의
주석자로 현대 철학의 거장인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유다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율법을 배우는 전통이 어떻게 그의 철학에 영향을 미쳤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평생 단 한 명만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하는데 그
스승은 놀랍게도 그가 여러 대학에서 만난 철학의 석학이나 교수가 아니라,
비견하기 어려운 '라삐', 곧 율법 학자였다고 합니다.
철학자 레비나스에게서 보듯이, 사실 스승과 함께해야 비로소 앎이 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가 잘 표현한 것처럼, 우리가 책을 선택해서
읽듯이 자신의 기존의 지식과 앎을 '자신의 눈높이에서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앎이 아니라, 수직적 차원의 앎은 스승에 대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배움을 통하여 자신의 사심과 편견에 따른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펴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무지함과
무도함과 무력함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율법을
읽고 깨쳐야 생명의 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도 이처럼 진정한 스승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모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신의 앎을 확장하거나
보완하고 충족시키는 가르침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그분의 길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움에서 우리의 영적 생명에 생기를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내 자리가 꽃자리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2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신명4,1.5-9 마태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마태 5,17-19
내 자리가 꽃자리
시내 한 복판 수도원에 있어도 문을 닫아 걸고 있으니 깊은 산 속 절간
같습니다. 어디서나 환대는 눈물겨운 고마움입니다.
따뜻한 환대 자체가 위로와 평화, 그리고 치유입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곳이고 사람 살고 있는 곳입니다.
바로 내 지금 이 자리가 하느님 안배하신 꽃자리입니다.
길은, 답은, 구원은, 기쁨은,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지금 여기가 그 자리, 제자리입니다.
삶의 진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구체적 삶의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는 것이요 하느님과 이웃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 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하느님만이, 하느님의 말씀만이 영원하다는 고백입니다.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규정이나 법규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실로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하늘나라는 먼데 있는 것도, 죽어서 가는 것도 아닌 바로 눈만 열리면 바로
지금 여기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눈이 열린 슬기로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늘 나라의 선물입니다.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말로가 아닌 계명의 실천으로
가르치는 일이 제일입니다. 이런 이가 진정 우리를 감동시키는 삶의
스승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계명을 잘 지키고 실천할 때 주변의 모든 이들은 우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자랑이듯 우리는 하느님의 자랑입니다.
이런 긍지보다 힘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구구절절 공감이요 심금을 울립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어디서나 매일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우리가 두 눈으로 본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베풀어 주신
은총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진정 믿는 이들에게 '만약'은 부질없는 상상이요 유혹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은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매일 지금 여기서 체험하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래야 긍정적 낙관적 삶입니다. 삿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세상
죄악으로부터 초월하여 영적고공비행의 삶을 삽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 은총의 체험들이 평생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런 삶 자체가 구원이요 이웃에게 주는 좋은 가르침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주님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는 꽃자리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신비가로 불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진실하게 살 때 주어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2014년 가해 3월2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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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글자나 활자에 묶이셨던 분이 아니라, 내용에 스스로 묶이셨던
분이셨다. 그분께서는 철저하게 글자만을 바라보며, 그 내용을 잃고 사는
이들에 대해 안타까워하셨다. 가장 대표적인 자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율법 조항이 나열한 글자들에 묶여버려 그 조항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이들이었다.
그 조항들로 기득권을 유지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이를 율법정신이 아닌 율법주의(RABBINISM / LEGALISM)라 한다.
율법의 정신은 간단하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정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613개의 율법조항이다.
그리고 이 조항들로부터 갈래를 친 것들은 셀 수조차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만든 조항들이, 거짓 하느님을
만들어 냈고, 이웃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 족쇄가 되고 만 것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당신께서 아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참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율법의 올바른 정신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었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은
자연스럽게 십자가의 죽음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늘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이 삶 안에서도 율법주의와 같은 모습은 부지기수로 눈에 들어온다.
열거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뒤돌아보자.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가지고 있는지, 찾아야 할
것을 찾고 있는지, 꾸어야 할 꿈을 꾸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알맹이와 껍데기가 바뀐 삶이라 한다면,
결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언제나 올바른 목적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식별하는 삶이어야 한다.
이틀 전, TV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진행자 중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성공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해 하는 삶이라 성공한 것이 아닌지?”
그렇다. 그 행복은 무엇보다도 진실하게 살아야 주어지는 행복이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있을 지 모르지만,
내 안에 제대로 된 행복이 있다면 제대로 성공한 삶임을 믿어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가 하느님의 인맥을 넓혀주는 자녀들
2014년 가해 3월2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복음 : 마태오 5,17-19
< 우리가 하느님의 인맥을 넓혀주는 자녀들 >
일본에서 남매 쌍둥이 아이들을 키우는 어느 어머니의 사연입니다. 어느 날
오후가 되었는데도 초등생 딸아이가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나.’ 노심초사 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돌아왔습니다. 아이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엄마의 말이 튀어나갔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니?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딸은 조심스레 늦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엄마, 근데... 오늘 우리 반 아이가 넘어져서 입에 피가 났어. 그 아이 데리고
간호실에 가서 치료하고, 집에까지 바라다 주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엄마는 착한 일을 하고 온 아이에게 더 이상 나무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딸이 도와 준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외국인에게 전화하는 것이 많이 망설여졌겠지만 그 어머니는
그렇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학교에서 만날 때도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학부형들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주위 한국 어머니들이 이렇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일본 아줌마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꿈도 꾸지 마. 외국인인 우리들과는 잘
안 어울리려고 그래.”
그러나 쌍둥이 어머니는 예외였습니다. 주위에 일본 학부모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이 어머니를 좋아했습니다. 모두가 착한 쌍둥이 아이들
덕분이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도와주고, 전학 온
아이에게도 먼저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 아이들 덕분에 한국인이지만
쌍둥이 어머니는 남부럽지 않은 일본인 인맥을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출처: TV 동화 행복한 세상, 어머니의 인맥]
이 어머니는 남의 나라 땅에 가서도 남부럽지 않은 인맥을 형성했습니다.
그것은 이 어머니가 일본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자녀들이 작은 선행들을 반 친구들에게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느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작은 선행들을 우리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하고 산다면 그분의 인맥도 커져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인맥이 줄어든다는 뜻은, 즉 냉담자가 많아지고 입교자가
줄어든다면, 어쩌면 우리들의 작은 선행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도 ‘작은 것을 작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작은 계명을 어기고, 또 남에게 그렇게 하도록 한다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란, 작은 것을 결코 작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작은 것이란 결코 없습니다. 아주 작은 미소로도 한 사람을
평생 친구로 만들 수 있고, 아주 작은 찡그림으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최초의 흑인 선수는 재키 로빈슨입니다. 그는
조지아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군에 입대해 장교가 되었지만 인종차별 문제를 항의하다가
명예전역 조치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차린 브루클린 다저스
감독 리키는 1947년에 그를 선수로 영입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첫 흑인
선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타석에 서면 상대 선수는 물론 관중까지도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같은 편 선수들도 그를 왕따 시켰습니다. 점점
주눅이 드는 그는 그 날 경기에서 잡기 쉬운 공을 몇 번 놓쳤고, 또 헛스윙
삼진도 여러 번 하면서 풀이 죽어 벤치에 앉았습니다. 운동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장이 서서히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자리로 갔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자기에게 관심 가져 주는 팀 동료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이 힘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 타석에서 그는 장외홈런을
날립니다. 결국 그는 2년 만에 메이저리그 최고 선수가 되었고 1962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어깨에 손을 얹는 이 하나의 몸짓만으로도 한 사람의
일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서 엄마의 인맥을 넓혀 주었던
쌍둥이 아이들처럼 작은 눈짓이라도 주위를 밝혀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이 어머니가 쌍둥이를 대하듯,
하늘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녀로서 대해주실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내 마음 천심이길 바랍니다.
2014년 가해 3월2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마태 5,17-19
내 마음 천심이길 바랍니다.
하늘의 운행이 심어준 것과 세상사회변화가 그려준 것은 많이 다릅니다.
이것을 민심천심이라 말하며 무언가 상관이 있다고 모두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기분이나 이득을 앞세운 감정은 민심과 안 맞을 겁니다.
그러니 개인의 생각을 민심에 맞추면 천심에도 맞는 다는 거 아닙니까.
내 생각에서 주어가 내가 아닌 민심이며 천심이 될 때 신앙은 커지지요.
천심과 통할 수밖에 없는 나를 가꾸어 가는 길이 오늘의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 5,17)”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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