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여론조사는 빗나가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치러진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친(親)러시아-반(反)미국 성향의 정당인 '사회민주당'(SD·스메르)이 당초 예상대로 승리했다. 동유럽의 민주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체크'와 '슬로바키아'로 나뉘는(1993년) 바람에 '작은 나라'가 된 슬로바키아의 총선이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끈 것은, 친러 정당의 승리를 예상한 여론조사 때문이었다.
영국 가디언지은 총선 전 "슬로바키아 (총선)는 유럽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며 "총선 결과는 국경 너머까지 느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곧 (유럽 연대에) 새로운 말썽꾼이 나타날 수 있으며, 피코 전 총리가 승리하면 나라가 180도 바뀌고, 푸틴 대통령을 지지할 위험도 있다"고 우려했다.
슬로바키아의 존재감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크게 부각됐다. 나토(NATO) 회원국 중 맨 먼저 소련제 S-300 방공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고, 미그-29 전투기도 넘겨주는 등 국제사회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앞장섰다. 또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적 요인을 적극 활용해 대우크라 군사 지원 물자들의 공급 루트이자 병참 허브 역할을 맡아왔다.
슬로바키아 총리 시절의 피초 스메르 당수/사진출처:크렘린.ru
이같은 상황에서 친러 정당인 '스메르'의 총선 승리는 '나토의 이단자'격인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에 이어 대우크라 지원의 훼방꾼이 또 하나 등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메르'를 총선 승리로 이끈 로버트 피초 전 총리(58)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중단을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가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해 총리 자리에 앉는다면, 유럽연합(EU)과 나토의 대우크라 지원은 피초의 재등장 '전과 후'로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 예상된 총선 결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온라인 매체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피초 전총리가 이끄는 '스메르'가 23.29%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 전체 의석 150석 중 42석을 확보했다. 2위는 친미 자유주의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17.06%). '스메르'와 한때 연대했고, 앞으로도 연대 가능성이 높은 '흘라스'(HLAS, 목소리라는 뜻, 14.95%)가 3위, 올해 5월 사임한 에두아르트 헤거 총리의 '보통 사람들'(Obyčajní ľudia, 9%)이 4위를 각각 차지했다.
이제 관심은 주자나 세푸토바 대통령으로부터 연립정부 구성을 의뢰받은 피초 전 총리가 '흘라스'와 국우 성향의 정당들과 함께 순조롭게 첫 연정을 출범시킬 수 있을 지 여부로 쏠린다. 사실상 '캐스팅 보트'를 쥔 '홀라스'가 득표 2위의 '진보 슬로바키아'와 손잡고 기독민주당(KDH) 등을 규합해 연정 출범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기대에 불과하다.
피초 전 총리는 총선 승리후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모두에게 큰 비극"이라며 "우리가(스메르당) 정부를 구성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키예프(키이우)-모스크바 간 평화 협상을 시작하도록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슬로바키아가 우크라이나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지원은 인도적인 분야에 그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스스로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총선에서 승리한 '스메르'의 피초 전 총리/사진출처:스트라나.ua
피코 전총리의 승리는 같은 성향의 오르반 헝가리 총리로부터 격한 환영을 받았다. 오르반 총리는 SNS를 통해 "누가 돌아왔는지 맞춰보라"며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승리한 로버트 피초를 축하하고, 애국자와 함께 일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고 밝혔다. 독일 TV 채널 '도이체 벨레'는 총선 전에 "스메르가 승리하면 오르반 총리는 처음으로 '비셰그라드 4개국'(Visegrad Four, 폴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동맹 그룹) 중에서 친구를 얻게 된다"고 밝혔다.
반면, 미 뉴욕 타임스(NYT) 등 서방 언론은 유럽의 대우크라 연합 전선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워싱턴 포스트(WP)는 "피초 전 총리의 승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유럽의 생활고와 국민 불안을 자극한 포퓰리즘 세력이 발호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라며 "새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EU의 제재를 막으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이체 벨레는 "슬로바키아와 우크라이나의 거의 무한한 연대는 곧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슬로바키아의 새 정부는 만장일치 제도의 허점을 파고 들어 EU와 나토의 대러 제재, 대우크라 지원 결정을 무력화할 수 있고, 우크라이나로의 군수 물자 운송 금지도 가능하다.
◇ 피코 전총리는 누구?
2006년~2010년, 2012년~2018년 두차례 총리를 역임한 피초는 자신과 '스메르' 소속 인사들의 부정부패를 취재하던 탐사보도 기자의 살해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대규모 반부패 시위에 밀려 2018년 3월 사임했다. 당시 27세의 젊은 기자는 피초 총리 정부와 이탈리아 마피아와의 검은 커넥션을 파헤치다 그의 약혼자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그는 슬로바키아 정부의 친미, 친우크라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트위터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은 2014년 '우크라이나 나치 세력'에 의해 시작됐으며, 합병된 크림반도를 반환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또 키예프 인근 '부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우크라이나 주장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고, EU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의 군사 기관이 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의 큰 손 조지 소로스와 반 슬로바키아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2016년 푸틴 대통령과 회담하는 피초 당시 총리/사진출처:크렘린.ru
그는 소련제 S-300 방공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제공에 관한 비밀 데이터를 SNS에 올려 '러시아 간첩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슬로바키아는 지난 2022년 S-300 방공 미사일을 처음으로 키예프로 이전했고, 나토 국가에서는 두번째로 MiG-29 전투기 13대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피초 전총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더 많이 죽이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앞으로 10년 동안 서로를 죽이도록 하는 것보다, 10년 동안 평화협상을 하고 적대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선거 전 인터뷰에서는 "총리가 된다면, 우크라이나에 '단 한 발의 탄약도 더 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형제에 관한 논문을 쓴 형법 전문가이자 변호사다. 공산당원 출신으로 '벨벳 혁명'(민주화 운동)이 성공하고, 공산주의 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이후 온건 좌파 정당에 가입했다가 '스메르'를 창당했다.
체코 잡지 리스펙트(Respekt)는 "피초와 오르반 총리는 푸틴 대통령을 존경한다"며 "그의 권력 복귀는 유럽 전체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스메르 총선 승리 요인은?
그의 총선 승리는 몇가지 요인이 겹친 것으로 분석된다. 인구의 80% 이상이 슬라브계인 슬로바키아는 전통적으로 친러 정서가 강한 편이었다고 한다. 또 기존 친서방 정부의 부패와 실정, 정치적 혼란에 유권자들이 지쳤고, 러시아의 선전전까지 가세하면서 '승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한 슬로바키아 여론은 '스메르'편이다. 현지 싱크탱크 글롭섹(Globsec)의 지난 3월 여론조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책임이 러시아에 있다고 응답한 슬로바키아인은 40%에 불과했다. 폴란드인 85%, 체코인 71%와 완전히 딴판이다. 동맹국인 미국을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는 슬로바키아인도 무려 50%에 이르렀다고 미 CNN 방송은 전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유로바로미터(Eurobarometer)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슬로바키아인의 57%가 우크라이나 난민이 국가 경제에 피해를 주고 있다고 대답했다. 난민에게 식량과 일자리를 빼앗기고, 지쳤다는 것. 또 전쟁이 슬로바키아로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협상에서 양보하고 휴전해야 한다고 믿는 이유다.
슬로바키아 위치. 왼쪽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오른쪽에 우크라이나, 북쪽에 폴란드, 남쪽에 헝가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네이버 지도 캡처
정치권 일각에서는 러시아 선전선동으로 가짜뉴스가 퍼지면서 '스메르'의 지지율이 올랐다고 보고 있다. 야로슬라우 나트 전 슬로바키아 국방부 장관은 '스메르'을 '러시아의 트로이 목마'로 규정하며, '스메르' 세력 측에 후원금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스메르'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반미 매체 '흘라브네 스프라비', 크렘린 후원 마피아와 연계된 바이커 그룹의 '브라트 자 브라타' 등이 가짜 뉴스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흘라브네 스프라비'의 한 기자는 올해 러시아 군부로부터 돈을 받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돼 간첩 혐의로 추방되기도 했다.
◇ 총선까지 계속된 정치적 혼란
이번 총선에 앞서 슬로바키아는 극심한 정치 혼란을 겪었다. 2020년 총선에서 '스메르'를 밀어내고 집권한 친서방 중도우파 정당 '보통사람들'과 '독립적 인격'(OLaNO-NOVA) 연정은 부정부패 척결 등에서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내분과 실정으로 스스로 주저앉았다.
이고르 마토비치 총리가 2021년 3월 러시아산 신종 코로나(COVID 19) 백신 도입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 끝에 사임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유럽에서 정부가 붕괴한 첫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이후 발찬 농림부 장관이 부패 스캔들로, 카체르 외무장관은 에두아르드 헤거 총리와의 갈등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작년 12월에는 헤거 총리가 이끄는 4개 정당 연립정부가 의회의 내각 불신임으로 무너졌다. 총선 전까지 과도 정부를 이끌기로 한 헤거 총리도 지난 5월 손을 들었다. 이후 등판한 구원 투수(총리)는 슬로바키아 중앙은행 부총재 출신의 루도비트 오도르. 슬로바키아에서 첫 총리직에 오른 헝가리계 인사다.
현지 정치 전문가는 "기존 친서방 정부의 각종 내분에다 코로나19, 고물가, 에너지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등 외부적 요인들이 피초 전 총리의 재부상을 도왔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