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루가 13,10-17)
“Woman, you are set free of your infirmity.” He laid his hands on her, and she at once stood up straight
and glorified God.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서로 용서하라고 권고한다. 또한 그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 허리가 굽어 고생하는 여자를 고쳐 주시자 회당장이 분개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기에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일깨워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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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공동체에게,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라고 권고한다.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 가는 삶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는 여인을 고쳐 주신다. 회당장이 이를 보고 분개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위선자’라고 나무라신다. 참된 사랑은 위선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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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쳐 주시는 내용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회당장과 안식일 논쟁을 하시게 됩니다. 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께 병을 고쳐 주십사고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으로 고통 받는 한 인간의 가엾은 처지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병이 치유된 여인은 사람들 앞에 똑바로 서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녀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한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회당장은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을 보고도 율법을 내세워 예수님께 따집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에는 안식일에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고 병을 고치는 것은 생업이 아니고 날짜를 따져서도 안 됩니다. 병을 고쳐 주는 것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여인처럼 잔뜩 움츠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물리적인 이유나 심리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살아갑니다. 경제적인 문제나 심리적인 열등감도 그러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들의 움츠린 허리를 펴게 하여 존엄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조건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고 일으키는 데에 굳이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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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불륜을 저지르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 숭배자라고 말합니다.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에서 받을 몫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허황한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그런 자들과 상종하지도 말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몹쓸 병에 걸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여인을 병마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오히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다고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주님께서는 그 회당장과 같은 자들을 향하여 ‘위선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위선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바로 그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때와 장소가 필요치 않습니다. 자비와 자선을 베풀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건을 따지고 경우를 살펴서 베푸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체면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면이나 조건을 따진다면,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행동, 하느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적이고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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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뒷산에 ‘열 개의 거울’이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안을 들여다보고는 신기해합니다. 자신을 닮은 강아지들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는 눈을 찡긋합니다. 그러자 열 마리의 꼬마 개들이 눈을 감으며 웃어 줍니다. ‘멋진 친구들이군.’ 강아지는 반가워합니다. 또 다른 강아지가 ‘열 개의 거울’이 있는 집을 들여다봅니다. 그는 화가 나 있습니다. 안을 보는 순간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열 마리의 작은 개들이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아지가 앞발을 내지르자, 그들도 발을 굴립니다. ‘기분 나쁜 녀석들이군.’ 강아지는 홱 돌아섭니다. 만나는 사람은 모두가 거울입니다. 내 모습을 비춰 줍니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웃으면 그들도 웃고, 내가 화내면 그들도 화냅니다.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복음의 회당장은 예수님께 불평을 드러냅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립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예수님의 질책에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허리가 굽었던 여인은 몸을 떨며 감격해합니다. 여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은혜의 안식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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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여인은 십팔 년 동안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녀에게는 안식일도 일상의 나날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쉬어야 한다는 것은 본인과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회당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고 기도하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녀가 안식일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낫게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여인을 붙잡고 있던 병마를 한마디 말씀으로 몰아내셨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안식일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살아 있는 은총을 만난 그 여인이야말로 어떤 율법 학자보다 더 깊이 안식일의 해방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행위에 분개하며 군중에게 말하였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회당장의 이러한 태도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가까운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모르고 있는 회당장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주일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양승국신부-
<우리 삶의 중심>
아이들이나 형제들과 운동을 할 때 마다 겪는 일입니다. 나이를 좀 생각해서 적당히 살살 무리하지 말면서 운동을 해야 될 텐데, 그게 또 쉽지 않습니다. 즐기자고 하는 운동인데,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인데, 하다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강한 승부욕과 오기가 발동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이겨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다보면 무리를 하고 오버를 하게 되지요.
언젠가 한 아이와 몸싸움까지 하면서 볼을 서로 차지하려고 기를 쓸 때였는데, 어느 순간 온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느꼈는데, 심한 충격과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습니다. 몸이 유연한 아이는 툴툴 털고 일어났지만, 저는 허리 부분에 심한 통증과 함께 들것에 실려서 운동장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며칠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한의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 제대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허리의 중요성! 허리가 온전치 못하다보니 걷기도 힘들고, 물건을 들기도 힘들었습니다. 양말 하나 신는 것, 신발 신는 것까지 힘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냥 드러누워 있게만 되더군요. 만사가 귀찮았습니다. 결국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다보니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이 그랬습니다. 그녀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허리 부분의 병이었습니다. 얼마나 통증이 심했던지 허리가 완전히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거의 90도로 휜 허리로 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늘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쳤겠지요. 정말 다른 사람처럼 똑바로, 당당히 한번 서고 싶은데,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씩씩하게 대로변을 걷고 싶은데, 이런 상태로 살아봐야 뭐하나, 하면서 살아온 햇수가 18년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의 고통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당신 가까이로 부르십니다. 그 여인에게 손을 얹어 안수하십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녀 삶의 중심, 그녀의 허리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든든한 삶의 지주가 되어주시니 더 이상 끔찍한 통증도, 악몽 같던 18년 세월도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여인은 이제 누구를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병고의 세월을 거두어가시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예수님만이 인생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이란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온전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어떤 것,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만이 우리 삶의 중심이요 기초임을 기억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18년 세월 동안 병마에 시달려온 여인이 말끔히 치유 받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하느님은 아무리 오래되고 깊은 상처라 할지라도 깔끔하게 치유시켜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아무리 망가지고 허물어진 우리라 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원상복귀, 혹은 완벽한 ‘리모델링’을 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고통 속에서 선을 이끌어내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때로 우리가 겪게 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면서 치유의 길에 동반해주심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봐?~
- 박향숙 수녀-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디로 갔을까?? 영과 육의 조화가 깨진 채 땅에 몸을 싣고 살아온 지 18년. 무엇이 그 여인을 억누르고 있었을까?? 이 여인의 삶을 회복시켜줄 이는 누구인가?? 복음 안으로 들어가 보자. 한 여자가 회당 한구석에 허리를 구부린 채 땅에 머리를 박고 있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그 여자를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시며 가까이 부르신다. 그리고 가장 아픈 곳, 상처의 깊숙한 곳에 손을 대며 말씀하신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는 바로 그 자리를 지배하던 사탄의 무리를 향해 소리 지르신 것이다. 주님은 나를 향해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고정관념?·?업신여김?·?판단?… 이런 것들이 바로 한 사람을 묶어 놓았고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사슬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금방 피었다 없어질 들꽃도 예쁘게 잘 입히시는 하느님의 마음은 늘 사람을 향해 열려 있으며 본래의 모습으로 당신을 찬미하며 살도록 일으켜 세우신다. <혼자가 아니야>를 불러본다.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난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 와도 모진 바람이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기분이 울적할 때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의 기운을 느낄 때가 있다. 한결 기분이 좋아지고 용기도 생기고 얼굴에는 웃음이, 마음에는 강물처럼 사랑이 가득해진다. 치유받은 오늘 나는 하늘을 향해 춤을 추리라.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
-김찬선신부-
“마침 그 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여인의 병을 치유하십니다. 당연히 회당장은 분개하고 사람들에게 1주일에 안식일이 아닌 날도 많으니 다른 날 치유 받으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회당장은 나무랄 데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한 사람이고, 그의 말대로 굳이 안식일을 어겨가면서 고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옳고 대단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그 안에 예수님께서 문제로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법은 보는데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잘못은 보는데 고통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안에 사랑과 자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자비하다고 하면 즉시 그리고 보통 잔혹한 살인자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심성이 그렇게 잔혹하지 않아도 어떤 이유로건 자비가 없으면 무자비한 것입니다. 법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이고, 합리성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이며, 정의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이고, 심지어 하느님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입니다.
연초에 한 번 말씀드렸듯이 저는 올 해의 경구를 “잘못이 아닌 고통을!”으로 삼았습니다. 올 한 해 이웃의 잘못을 보기 보다는 고통을 더 보겠다는 뜻이지요. 저는 자주 옳고 그름을 심하게 가르는 시비심(是非心) 때문에 이웃의 고통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지나칩니다. 그것은 회당장이 열여덟 해나 앓은 여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비의 눈으로 보면 그 열여덟 해의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고통이 그렇게 큰데도 회당장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은 보지 못하고 큰 것은 잘 보는데 여인에게는 그렇게 큰 열여덟 해의 고통이 회당장에게는 너무도 작은 것이기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고통은 크고 남이 고통은 작다고 해도 열여덟 해나 앓아온 여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하지요.
그런데 어떤 때 우리가 이렇게 너무합니다. 오늘, 너무한 저를 성찰합니다.
사랑의 잔소리꾼
-김찬선신부-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잔소리가 좀 심합니다. 그것도 당부의 말이 너무 많습니다. 용서하라. 하느님을 본받아라. 사랑 안에서 살아라. 빛의 자녀답게 살아라.
우리 형제 중에 참으로 잔소리가 많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과거만 잔소리가 많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많기는 합니다. 좋은 얘기는 다 쏟아놓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첫째는 좋은 얘기이지만 너절해서 지겨웠습니다. 다 좋은 얘긴데 이 얘기 저 얘기 많아지면 왜 너절해지는지 그 심리를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둘째는 한 두 마디 짧게 얘기해도 다 잘 알아들을 터인데 못 믿겠기에 그리 하는 것 같아 불쾌감도 늘 들었습니다.
셋째는 지겨워하고 불쾌해 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그 무지스러움을 이해할 수 없어 불만스러웠습니다.
넷째는 그 많은 좋은 얘기를 다 실천할 수 있을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도 나이 먹은 지금 그 형제의 사랑이 고맙습니다. 지겨워하는데도 괴의치 않는 그의 꿋꿋함이. 싫어하는 걸 눈치 보지 않는 그의 순수함이. 그 많은 얘기를 해주고 싶은 그의 열성이.
옛날에는 얘기해주지 않고는 주체치 못할 정도로 좋은 얘기를 많이 담고 있는 그 형제가 욕심스럽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성인이 되어가는 그 형제의 늙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왜 이 형제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말을 팔러 장에 나왔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말을 보고서는 물었지요.
'이 말은 잘 달립니까?'
'아닙니다.'
'그럼 이 말은 마차를 잘 끕니까?'
'아닙니다.'
'그럼 이 말은 짐을 많이 실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이 말은 무엇을 잘합니까?'
'보십시오. 폼이 좋지 않습니까?'
'.....'
아직도 그 폼 나는 말은 팔리지 않고 마 시장에서 폼만 잡고 있다고 하네요.
이 말의 판매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요? 당연히 말의 용도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판매의 첫 번째 우선순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것만을 주장하고 있지요. 이 판매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이 판매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서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강조하면서 살아갑니다. 너무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강조하다 보니, 주님의 계명이 오히려 묻히는데도 그들은 “보십시오. 폼이 좋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하는 사람처럼 폼 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폼 나는 일에만 집중하던 과거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율법에 준해서 말하고 행동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인 기준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말이 열여덟 해이지, 여러분이 직접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습니까? 아마 하루빨리 이 병마에서 해방되고 싶을 것입니다. 이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안쓰러워 하셨기에,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렸났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곧바로 치유해주십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병의 치유를 받으려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지요.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회당장의 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그 말은 맞지요. 그러나 겉으로 보이지 않는 사랑의 계명의 차원에서는 모든 사람이 병에서 곧바로 해방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우리들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사랑의 계명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부여하거나 그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로베스 피에르)
체면 때문에
- 신한열 수사-
살다 보면 옳은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신앙인들한테도 말과 행동을 제약하는 규범이 있다. 남의 이목을 무서워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비슷하다고 본다. 예수님은 자유인이셨다. 안식일 계명이 가장 중요한 종교적 실천이던 시절에 이런 행동을 하신 데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생명이 위독한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되었다. 18년 동안 겪은 고통인데 하루 더 기다린들 어떠랴. 그렇지만 그분에게 자신의 평판이나 이미지 관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누구에게도 ‘조금 기다렸다가 내일 오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드러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즉각적이다.
오랜 병마에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펴지 못하던’ 그 여인은 낫게 되자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 했다. 하지만 회당장의 반응은 그 반대다. 그의 눈에는 치유의 기쁨보다 계율 위반이 더 심각하게 보였다. 종교적 지식으로 무장된 회당장은 안식일을 피해 예수님께 치유를 받으라고 군중에게 훈계한다. 여인이 병마로 몸을 펴지 못했던 것에 비해 그는 계율로 마음이 굽어져 있었다. 종교나 신앙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아닐까?? 회당장한테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식자우환’?이었던 것이다.
종교 계율이란 본래 자비하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삶의 지침이 아니던가. 예수님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하셨을 때 그분은 분명 이 율법의 짐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복잡한 계명을 가르치고 토를 다는 대신 단순 명료하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을 그토록 강조하지 않으셨던가?? 나는 혹시 회당장처럼 다른 사람을 훈계한 적은 없는가?? 나는 합당한 이유를 들어 만의 하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고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안식일에는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참으로 명쾌하고 통쾌합니다.
여인을 18년이나 괴롭히던 病魔를 예수께서 쫓아내어 그 악마로부터 여인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 이에 회당장은 예수님께는 직접 뭐라 하지 못하고 치유를 받고자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와서 치유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풀어주면서 왜 사람은 안식일이라 하여 병마로부터 풀어주면 안 되는지 꼬집습니다.
소나 나귀보다 훨씬 귀한 사람은 풀어주어서는 안되고 소나 나귀는 풀어주어도 되는가? 돈이 되는 소 나귀 먹이기는 안식일에도 하고 돈이 안 되는 사람 돌보기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사실 안식일은 무조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요. 안식일만은 돈벌이 그만 두고 하느님 안에서 쉬라는 것이고, 안식일만은 근심 걱정 그만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것이고, 안식일만은 미움은 그만 두고 사랑을 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 외에는 다 그만 두고 오직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사람들과 나누며 찬미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인고의 세월>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이 한평생 지고 왔던 십자가는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이 여인을 "열 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18년입니다. 2-3년 간의 군대생활도 끔찍했었는데, 투병생활을 18년 간이나 했다니 여인이 겪어왔던 고통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허리디스크 비슷한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날과 같은 외과수술을 통한 회복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여인은 그저 자신의 허리 통증이 최소한으로 느껴지는 자세로 견디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였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굽어진 여인의 허리 각도는 그 정도를 더해갔습니다. 15°, 30°, 60°, 그리고 마침내 90°까지 허리가 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거의 기역자 자세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시피 허리란 것은 우리 건강의 중심이자 삶의 중심입니다. 허리 꼿꼿해야 건강하지요. 허리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자세가 흐트러지게 되면서 걸음걸이도 힘들어집니다.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어 삶 전체가 고통스럽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18년이란 오랜 세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며 하느님 원망도 많이 했었겠지요. 그러나 여인은 모진 고통의 세월을 잘 견뎌온 결과 예수님과의 만남이란 일생일대의 선물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새 삶을 부여받습니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잘 견뎌온 그 결과 하느님의 자비가 그녀의 굽어진 허리를, 그녀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관통하십니다.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가엾은 그녀의 삶을 어루만집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18년 간 지고 왔던 십자가를 그녀의 어깨로부터 조용히 떼어놓으십니다.
그저 뿌리치고 싶고 피하고만 싶은 것이 십자가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인생이란 이 세상 어딜 가도 찾아볼 수 없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네 인생이란 것은 저마다에게 주어진 십자가란 짐을 각자의 어깨에 지고 떠나는 여행길과도 같습니다.
어차피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지고 가는 우리네 인생이길 바랍니다.
조금만 큰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십자가야말로 가장 큰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입니다. 십자가야말로 구원에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신부님을 찾아와서 말합니다.
“신부님, 제가 정말로 이래서는 안 되는데, 사업 문제로 하도 답답해서 어제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점쟁이가 제 손을 보더니만, 저의 운명이 엉망이라서 그렇다고 방법이 없다고 하네요. 이렇게 점괘가 나오니까 더 답답한 마음이 생기고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 길래 왜 점을 보십니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어야지요.” 그리고는 손을 한 번 펴보라고 말씀하세요.
“아마 손바닥에서 이것을 감정선, 이것을 운명선, 이것을 생명선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그럼 손을 꼭 쥐어보세요.”
이 형제님은 손을 꼭 쥐고는 신부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형제님께 말씀드렸던 감정선과 운명선과 생명선은 어디에 있지요?”
“어디 있긴요? 바로 제 손 안에 있지요.”
“맞습니다. 바로 형제님은 형제님의 손안에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입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하지요. 그것은 우리들의 삶을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내 삶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합니까?”
나의 의지에 따라 달려있는 내 삶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더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유의지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 우리들과 함께함으로 인해서 이 고통과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주님과 함께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헛되고 무의미한 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본인의 잘못도 있지만,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람들도 잘못도 큽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이들의 삶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회당장과 같은 사람이지요.
회당장은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러 온 군중들에게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지요.
안식일에는 일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치료 받으러 와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식일 법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 법이 아니지요. 엿새 동안의 일로 힘든 육체를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사랑의 치유행위는 안식일법보다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회당장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생각하지 않는 그래서 사람들의 삶을 방해하는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사랑’이라는 주님의 법보다는 다른 외적인 것을 더욱 더 중요시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제 또 한명의 회당장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원칙을 따르는 멋진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원칙을 잊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목 운동의 영성
-이수철 신부-
저는 우리 베네딕도회 영성을 목 운동의 영성이라 일컫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신자 분들은 다들 공감하곤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기도하고 일하라’는 성 베네딕도 수도가정의 가훈과도 같습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 보고 땅 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목을 위로 향하여 하늘만 보고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목을 아래로 향하여 일도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고 직립인간입니다. 아마 대부분 동물들은 네 발 달린 동물이지 두 발의 직립 동물은 사람뿐일 것입니다. 두 발로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기도하는 동물은 사람뿐이 없을 것이며 반면 네 발 달린 동물들은 온통 땅만 보며 먹을 것만 찾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는 허리가 굽어 몸을 펼 수가 없으니 하늘을 보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시자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했다 합니다. 무서운 것은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병입니다. 몸이 성해도 하느님을 잊고 자포자기 상태로 영혼의 허리를 굽히고 사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똑바로 서서 하느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치유되는 영혼이요 육신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오늘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도 주님을 립꼭막?육신과 영혼이 동시에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똑바로 하여 자주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건강하고 균형잡힌 영성생활을 위해 목 운동의 영성, 잘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바라는 안식일
-노미화-
요즘 로라 인걸스가 쓴 「초원의 집」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64세에 쓰기 시작했다는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 중에 주일을 매우 엄격하게 지낸 이야기가 나온다. 서부 개척 시대. 숲속 외딴집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던 이들은 주일이 되면 깨끗한 옷을 입고 예배 드리러 갔다. 다녀와서도 썰매를 타거나 소리 내어 놀아서는 안 되었다. 조용히 성경을 읽거나 책을 읽으며 지냈다. 어린 로라한테는 이것이 힘들고 지루하기만 했다. 노동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그렇게 엄격하게 주일을 지킨 것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영적인 생활을 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모든 회사가 주일 없이 365일 내내 출근해야 한다면, 모든 학교가 주일 없이 내내 공부해야 한다면 정말 끔찍하다. 직장 일에서 벗어나 이날만큼은 온 가족이 모여 한마음으로 지내는 것도 참 귀한 일이다. 날마다 자기 자신을 챙기고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이웃을 만나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살리는 일에 힘쓰기 위해서 안식일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러자고 회당에 모여 서로를 바라보고 확인하는 게 아닐까? 어릴 때 성탄절이 되면 동네 코흘리개들이 모두 성당에 모여들어 선물 봉지를 받아들고 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언제나 그렇게 늘 열린 교회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속 근심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하는 안식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주님이 좋아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홍성만신부-
안식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시는데 그곳에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십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장면에서 허리가 굽은 여인이 치유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녀는 아무런 역할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 행동을 취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보십니다.
그리고 부르시고, 병에서 풀려났다는 말씀과 함께 손을 얹으십니다.
그야말로 그녀의 입장에서는 온전히 무상으로 병이 치유됩니다.
사실 하느님의 은총은 내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해 보십시오.
나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으로 그냥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리가 굽은 여인이 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회당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곳을 자주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예수님께 어떤 희망을 두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이 계속 이끌렸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별로 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좋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일상을 주님께 말씀드리고 때로는 의지하고 맡기는 것뿐입니다. 여기서부터 무엇인가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은, 주님이 좋아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김성규 신부 -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 ‘위선자들아’는 표현에는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당신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회당장과 그분의 적대자들인 그들 자신의 자기 방식으로만 알아들으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기 방식으로 알아듣고자 하는 것을 포기할 때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듯 ...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
“하느님은 왜 세상을 처음부터 고통 없이 창조하지 않으셨는가?”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하면서 왜 이 세상에 고통과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느님은 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는가?”
- 결정적인 것은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신 말씀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시는 장면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도 나오는 단어이다. 눈먼 이를 보게 하시고...........◆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
-고병수 신부-
신학교 때 내 별명은 독일병정이었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복학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너무 고지식하고 판에 박힌 생활을 한다 해서 붙여진 별명인 듯싶다. 규칙은 목숨 바쳐 지켜야 하는 철칙(?)처럼 여겼다. 성당에 가서 조는 한이 있어도 정해진 기도나 미사시간에 빠지지 않았고, 외출날 맥주 한잔 마시고 돌아올라치면 죄의식을 느낄 정도였다.
솔직히 그때는 그게 최선의 삶처럼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이런 내 삶에 제동이 걸렸다. 그것은 한 동기 신학생 때문이었다. 참 오랫동안 나는 그를 준 것도 없이 미워했다. 왜냐하면 그는 툭하면 기도에 빠지고 외출날도 늦게 들어오는 것이 다반사였다. 내 삶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대놓고 미워하기도 했다. 때론 동료들과 소곤거리기도 했고 함부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날 누군가한테서 그의 삶의 진면목을 듣게 되었다. 그는 정기 외출날이 되면 불쌍하고 가난한 이의 집을 찾아가 청소도 해주고 부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곤 한다는 것이었다. 때론 그들을 구체적으로 도와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늦은 밤 성당을 찾아 홀로 기도드리는 일이 잦다는 것이었다. 비록 기도시간에는 간혹 빠졌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주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고 온몸으로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온 것이었다. 이처럼 다소 지켜야 할 외적 규칙은 어겼지만 주님의 사랑은 온몸으로 철저히 실천하며 살아온 그의 삶을 보면서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되새겨 본다
-장현우 신부-
주님께서는 언제나 병든 이들, 삶에 지쳐 허덕이는 이들, 스스로 죄인이라는 죄책감에 싸여 하느님을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들을 향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그러던 중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은 여인 하나를 발견하십니다. 그 여인에 대한 측은한 마음은 주님을 가만히 계시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인을 가까이 불러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의 이러한 거침없는 사랑과 열정은 율법에 얽매인 이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형식과 틀에 매여 있던 이들은, 병을 낫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감사드리고 찬양하기 보다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했다 하여 분개해합니다. 주님의 너무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회당장은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라고 외칩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는 안식일 법을 들먹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주는 일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율법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주님께서도 평소에 말씀하셨듯이,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에 어떠한 생업도 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의 규정은, 사실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일을 할 때 부리는 가축들, 그리고 그들의 종들까지도 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인이 쉬지 않고 매일같이 일을 하면 그 가축들과 종들이 쉴 기회를 가지지 못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모든 이가 쉬도록 하셨습니다. 스스로의 시간에 대한 자유가 없는 이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안식일 법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이 율법의 정신으로 율법을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율법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교회법이 있고, 여러 신심단체들의 내규가 있습니다.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도 여러 가지 규정들과 회칙이 있습니다. 이러한 규율들 역시 그 정신은 예수님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규율 자체에만 얽매여 그 정신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보다는, 율법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얽어매는 족쇄가 되어 버립니다.
주일 미사가 신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로만 느껴지고, 냉담자로 분류되지 않기 위해 판공성사를 보고, 성직자나 수도자의 눈치 때문에 교무금을 내고, 기계적으로 주일 헌금을 내는 것은, 그 율법들이 가진 정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정신을 바라보지 못하면, 최소한의 의무만을 이행하고, 자신이 할 바를 다 했다고 여겨버리는 소극적인 신앙생활로 빠져버립니다. 사랑의 실천과 교회법 이행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교회법 이행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고, 그 정신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판공성사를 빠뜨리지 않고, 여려 교회법을 지키는 등, 그리스도교에서 제시하는 최소한의 의무만을 지키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저 수동적인 종교 생활에 만족한다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과 특별히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하느님 나라를 상속 받은 상속자들입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형식과 틀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근본정신을 실천하는 것, 진정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의 삶을 충실히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웃을 미워하고 있는 것에 마음 아파하기 보다는,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있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하고, 이웃의 능력을 시기, 질투하고 있는 것에 마음 아파하기 보다는, 자신보다 부족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외면하고 있는 것에 마음 아파 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뜨거운 열정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그분의 거침없는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법에 얽매여 수동적으로 따르는 신앙생활이 아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율법의 정신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신앙생활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 이압돈 신부-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병에 걸립니다. 지금껏 한 번도 아파본적이 없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감기와 같은 비교적 가벼운 병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병까지 많고 많은 병들이 있습니다. 이 병들의 공통점은 첫째로 아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불편을 겪습니다. 그래서 병에 걸리면 누구나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치룝니다. 병은 아프고 불편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데 혼자 힘으로 잘 안됩니다. 이때 의사를 찾아가거나 약의 도움으로 병이 낫게 되면 참 고맙습니다. 나를 도와준 의사선생님이나 약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오늘 들은 성서말씀에도 오랫동안 병마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여자가 하나 있습니다. 이 여자를 예수님께서는 고쳐 주십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고마운 일을 보고 분개합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했다고 하여 화를 내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쉬어야 하는데, 병 고치는 일을 하다니 안될 말이라고 이렇게 얘기 합니다. “일할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는데 그 엿새 동안 일을 하지 왜 하필 안식일에 일을 합니까? 안식일에는 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안식일이라도 외양간의 소나 나귀에게 물 주는 일은 하면서 병고치는 일은 왜 안된다는 말이냐? 안식일이라하여 사람에게 고마운 일, 감사한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냐?”
참 훌륭한 말씀입니다. 병을 고쳐주어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주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는 것처럼 일상적일 일이라는 겁니다. 안식일이라 하여 숨쉬고, 물 마시고, 밥먹고 하는 일상적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람을 도와주는 것, 어떤 사람이 불편을 겪고 있는 데 그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 아픔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은 이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상적일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는 일을 하여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늘 해야 하는 일상적인 일에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선행은 한번씩 몰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늘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보아 주는 것, 불편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가끔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입니다. 나의 삶에서 이런 것이 일상적이지 않는다면, "안식일에는 안됩니다. 선행은 특별한 일이니 특별한 때에나 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격이 됩니다. 선행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 그것이 늘 우리 옆에서 벌어지는 일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신에 대한 수치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 귀한 존재, 치유
- 이성우-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자신을 짓누르는 병에 시달리던 여인을 보십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는 것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감이 컸다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자신을 사랑하며 허리를 꼿꼿이 펴고 살기는커녕 극도로 자신을 비하하여 바닥만 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다른 이와 너무도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이가 자신을 볼까봐, 부끄러운 자신이 드러날까봐 늘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여인이었습니다. 감히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는 여인이기에 예수님이 가까이 부르십니다. “여인아, 너 자신을 그토록 혐오스럽게 여기고 쭈그러들게 하고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하며 땅만 보고 살게 만든 그 병마, 그 생각들에서 너는 풀려났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너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에게 손을 얹는 것은 너도 나와 같은 귀한 사람이라는 의미란다. 네가 혐오스럽고 수치스러운 존재라면, 내가 너를 만지고 너를 이토록 사랑하겠니? 너는 나처럼 귀하고 훌륭한 존재란다. 너를 병들게 만든 네 생각에서 너는 풀려났다. 너는 귀하고 소중한 하느님의 모상이 들어 있는 딸이란다. 하늘과 땅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딸아, 너도 너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면 좋겠구나. 나의 명령이다. 너는 너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라.”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뒤 여인은 누구보다도 당당히 허리를 펴고 꼿꼿이 일어서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늘
-최명숙 목사-
그 아이는 여름 수련회마다 밤잠을 설쳐가며 월요일 새벽에 출발해 참석합니다. 신앙수련회에 우리와 함께 떠나려면 그곳 경기도에서 이곳 전라도까지 전날인 주일 밤에 와서 자면 서로 여유가 있을 텐데 왜 그럴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해 여름에도 내일 새벽 차로 내려오겠다는 그 아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고등학생인 그 아이와는 아들처럼 허물없이 지내던 터라 “내일 새벽 차로 오려면 잠도 설치고 피곤할 테니 오늘 저녁 예배를 마치고 와서 자고 우리와 함께 출발하는 게 좋지 않겠니?”라고 말하자 그 아이는 “오늘은 주일이라서 안 돼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 아이가 주일 예배드리는 외에 또 다른 특별한 일이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여행이나 매식을 금해야 한다고 교회에서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주일 자정이 넘어야 여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개념이, 안식일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잘못 인식되고 있음은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유다인들은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지 않고 다른 사람이 누르기를 기다렸다가 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과연 어떤 하느님일까요? 신동엽님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 네가 본 건, 먹구름/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갔다/네가 본 건, 지붕 덮은/쇠항아리/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갔다/닦아라, 사람들아/네 마음속 구름/찢어라, 사람들아/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은 어떤 하늘인지요? 혹시 먹구름이나 쇠항아리를 하늘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양승국신부-
<사랑이 내게로 다가온 날>
장영희 교수님의 영미시 산책 ‘생일’을 읽고 있습니다. 주옥같은 명시들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통해 사랑, 낙관, 희망, 축복, 감동과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고통은 희망의 또 다른 얼굴이며, 때로 지루해 보이는 일상들이 사실 가장 큰 축복이며, 칠흑 같은 어둠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위로의 메시지들로 가득합니다.
‘생일’에 대해 재해석하는 표현이 너무나 아름답고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내 마음은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행복합니다.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생일도 중요하지만, 사랑에 눈떠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을 부여받는 생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일은 단 한번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내게로 온 그날, 그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생일입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맛본 그날에야 비로소 참 삶이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중에 정녕 중대한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누군가와 제대로 된 사랑을 한번 해보는 일입니다. 참사랑의 맛을 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 어떤 면에서 참사랑을 만난 행운의 여인이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사랑을 찾아 헤매었지만 야속하게도 그녀를 찾아온 것은 거듭되는 불운과 고통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8년이란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제대로 된 사랑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는 표현을 통해 그 여인의 처절한 고통을 잘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18년입니다. 아이를 낳아 대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이 18년이지 않습니까? 그 세월은 정말 길고도 긴 세월이었습니다. 군대 생활 2년이나 3년도 그렇게 길었는데, 18년은 군대를 6이나 7번 다녀올 수 있는 기간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녀는 똑 바로 한번 누워보지도 못했습니다. 길을 걸어갈 때 전방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땅만 보였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감당했겠습니까?
그녀가 살아왔던 18년 세월은 죽음이었지 삶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사랑이 다가갑니다. 축복이 다가갑니다. 그 사랑과 축복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날 그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인 그 날은 그녀의 또 다른 생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느 안식일 - 이기양 신부-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 손을 얹어 고쳐 주시지요. 우리는 이 여인이 얼마나 험한 인생을 살아왔을지 쉽게 추측해볼 수가 있습니다. 이 불쌍한 여인은 여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부자유스런 몸으로 평생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인간다운 미래는 꿈도 꾸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13,12)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병을 단번에 고쳐 주셨습니다. 큰 은총을 입은 여인은 너무나도 놀랍고 기뻐서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모여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요. 예수님께서 여인의 병을 고쳐 주신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기뻐하며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한 반면에 회당장을 비롯한 몇 몇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하지요.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13,14)
맞는 말입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그들의 지적은 옳지요.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반대하고 나선 이 사람들은 실은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다른 일을 해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율법을 해석하여 처신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율법 완수를 고집하며 비난과 반대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모순된 모습을 알고 있던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들의 비난에 단호한 대답을 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13,15-16)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에 동의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으며 군중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온갖 훌륭한 일을 보고 모두 기뻐하였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기적과 은총의 사건을 똑같이 보고 겪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고 기뻐하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누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회당장과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기고 좋아하는 일을 왜 몇 몇 사람들은 반대하고 비난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일은 예수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을 꼬인 마음으로 비난하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모습이지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입장과 아집에 사로잡혀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모습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더라도 그 여인의 입장에 섰다면 어떻게 고쳐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안다는 회당장과 몇 몇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이웃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면 그토록 일생을 힘들게 살아온 여인에게 자유와 희망을 준 예수님의 처사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회당장은 우리가 잘 아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방탕한 생활에서 돌아온 동생을 끝내 용서할 수 없다고 버티었던 첫째 아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용서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들로서의 품위까지도 되돌려 주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과 온갖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여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오늘 예수님의 행위를 결코 반대하거나 비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안타까운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대부분의 원인들은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해서 생겨난 일들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강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부딪혀서 상처가 나는 것이지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또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이 세례를 받은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얼마나 남의 입장을 배려할 수 있으며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가슴에 담고 사느냐?‘가 어른이 되는 것이고, 신앙이 깊이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나의 입장을 접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상처와 갈등이 야기되는 일들이 벌어진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어려움은 오히려 화해와 성숙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훌륭한 일을 보고 기뻐한 오늘 복음에 등장한 군중의 열린 마음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연어과에 속하는 곤돌메기라는 큰 물고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이 이 물고기를 가지고 인간의 좌절에 대해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우선 큰 어항에 곤돌메기를 집어넣고 이 물고기가 좋아하는 먹이를 충분히 풀어 넣었습니다. 어항 속의 곤돌메기는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도 입만 벌리면 좋아하는 작은 물고기를 얼마든지 잡아먹을 수 있도록 했지요.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심리학자들이 곤돌메기의 먹이로 넣은 작은 물고기들과 곤돌메기 사이에 투명한 막으로 막았습니다. 곤돌메기가 헤엄치고 다니다가 허기가 져서 어느 때처럼 먹이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엇인가에 부닥쳐서 먹이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먹이가 눈앞에 있는데 먹을 수가 없었지요. 한참을 애써 보지만 끝끝내 먹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이 칸막이를 치웠습니다. 허기진 곤돌메기가 당연히 먹이를 향해 달려가야 할 텐데 가만히 굶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번번이 실패한 경험으로 눈앞의 먹이를 포기하고 굶어 죽어간 것이지요.
오늘 우리도 번번이 실패하는 경험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꿈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지만 수도 없이 좌절하면서 그 꿈을 점점 잊어버리고 맙니다. 특히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나의 꿈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물론, 남의 꿈까지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는 여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사람을 고친다는 것,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날이 바로 안식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회당장이 군중을 향해서 외치지요.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이 회당장의 모습이 앞선 곤돌메기의 아둔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먹이가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리었던 칸막이를 떠올리면서 먹이를 먹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을 구원해주실 주님이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이라는 칸막이를 떠올리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도 이 주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서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어기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서 하느님의 손길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습이 곤돌메기와 같은 회당장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해 봅니다. 인간적인 판단 기준만을 내세워서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자신의 기준이 커다란 칸막이가 되어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내 앞에 있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상징하는 그 큰 칸막이를 치워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언제나 내 앞에 계셨던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고정관념으로 상징되는 내 마음의 칸막이를 치웁시다.
용서받는 이
-서인덕 신부-
하느님께서 창조한 만물 중에서 1등 창조물이 바로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분께로부터 창조된 식물과 동물 중 유일하게 허리를 젖혀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비를 주십사 하고 기도했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자신의 소망을 빌고 또 빌었습니다. 또한 잘못한 사람에게“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하며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왜 하늘에 대고 빌었고, 왜 하늘을 두려워했을까요? 정답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등이 굽은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허리를 젖혀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죄 중에 있음을 말합니다. 온갖 두려움에 휩싸여 하늘을 볼 수 없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용서’라는 약을 발라주십니다. 열여덟 해 동안 이 여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해봅니다. 죄 중에 숨 죽여 살고 있는 여인을 예수님이 따뜻한 손으로 치유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순간순간 함께하셨던 그분의 숨결을 기억하며 언제나 저를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시는 그분께 가까이 가겠노라고 이 시간 다시 한 번 다짐해봅니다.
완고한 마음
-김인옥 수녀-
오늘 복음의 장면을 떠올려 본다. 열여덟 해 동안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던 여인이 예수님의 손길이 닿자마자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한다. 주위에 있던 모든 이가 함께 기뻐하고 놀라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회당장은 이를 보고 분개한다. 지난 여름에 대침묵을 하며 한 달 동안 피정을 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나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피정에 임했다. 피정 일정 중에는 쉬는 날이 두 번 있었다. 이날은 대침묵이 풀리면서 몇 사람씩 함께 어울려 산행이나 소풍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한 달 내내 대침묵을 유지하고 싶었기에 쉬는 날에도 대침묵을 푸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첫 번째 쉬는 날, 함께 소풍을 가자는 옆방 수녀님의 쪽지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혼자 산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피정집이 계룡산 자락에 위치해 있어 매일 조금씩 산행을 하며 묵상을 했는데 이날은 산을 넘을 계획을 세웠다. 그날 산에 가려고 준비하는 수녀님들이 여럿이었는데 내가 일찍 나서게 되어 먼저 연천봉에 이르고 나서 고개를 넘어 갑사 쪽 계곡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전날까지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 물과 산그늘이 어우러져 나는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마음속으로 찬미가를 부르며 넋을 잃었다. 열흘 후 두 번째 쉬는 날에는 코스를 반대로 잡았다. 이번에도 혼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갑사 행 버스에 오르니 같은 코스를 택한 수녀님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이러다가 침묵이 깨지겠다 싶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앞서서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뒤에 오는 수녀님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날은 날씨가 많이 흐려 산속으로 들어가니 점점 어두워졌고 올라갈수록 운무가 심해 몸이 젖어 들었다. 몸만 젖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우울해졌다. 날씨 탓으로 계곡의 아름다움이 반감된 것도 있지만 쉬는 날 자매들과 함께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혼자 거룩한 척 산을 넘는 내 모습이 완고하게 느껴졌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안식일 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 완고함은 눈앞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보고도 함께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고집하는 완고함은 눈도 마음도 멀게 만든다.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자매들과 함께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리라.
승리의 열쇠인 믿음에 대하여 -강영돈 신부-
미국에서 한때 유명했던 영화배우 '헤버트 버드윌스'라는 사람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토크쇼 진행자와 대담을 하였는데, 진행자가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돈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돈은 항상 쥐고 있을 수도 없고, 또 명예도 사람에게 용기를 주어 좋기는 하지만 얼마 후 그 명예가 자신을 비웃게 될 겁니다. 참된 의미에서 볼 때 마음에 평화를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집을 사고 새 자동차를 사고 많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으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 참 평화있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여 얻어지는 전리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얻고자 투쟁하지 않는 자에게는 내면의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성서 요한의 첫째 편지 5장 4절에 보면 "하느님 자녀는 누구나 이 세상을 이겨냅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믿음이야 말로 이 평화를 쟁취해 내는 승리의 열쇠인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교리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나의 삶을 좌우하는 열쇠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승리의 열쇠인 믿음에 대하여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승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때에 가능합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5장 5절에 "예수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죄와 불의와 인간을 부끄럽게 하는 모든 부정적인 세력을 이겨낸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의 능력은 세상의 모든 제왕과 능력자의 힘을 다 보탠다 할지라도 그 힘에는 결코 미치지 못할 위대한 능력이라 했습니다.
자동차가 휘발유라는 동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차라 할지라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영적인 동력에 기도의 줄이 이어져서 늘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야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법관가운데 한때 서울 고등법원장을 지냈던 김홍섭이라는 전설적인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골프장으로 간 것이 아니라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을 방문하여 교화활동을 하였고, 늘 깨끗하게 닦은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기도 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그는 생전에 자기의 묘를 미리 만들고 거기에 자기 이름까지 새겨넣고 비석까지 세워 놓았습니다. 주말이나 여가가 생길 때마다 그는 자기의 빈 무덤에 가서 조용히 기도하고 명상함으로서 늘 새로운 힘을 얻어 생활터전으로 되돌아가곤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매 순간에 그분의 동력을 공급받을 때 승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닌 능력과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여도 그리스도와 통하는 길이 차단되었을 때는 그 무한한 힘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되어 동력을 공급받읍시다. 틀림없는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될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 믿음을 활용할 때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있으면 점차 쇠약해집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이론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써 생활을 이끌어 가는 살아있는 원동력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있노라 하며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삶에 활용할 때에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승리의 생활을 위해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믿음을 실험해보고 활용하고 실천에 옮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승리의 요소가 되게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끝으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열심을 다해 할 때에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성서말씀에 하느님께로부터 난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승리가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영어로 열심히라는 뜻을 지닌 단어에 엔뚜지에즘(Enthusiam)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을 쉽게 풀어쓰면 IN THE GOD 즉, '하느님 안에' 뜻이 됩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를 때 자연히 뜨거워져 열심해 진다는 뜻이 된 것으로 압니다. 하느님 안에 있으면 뜨거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인류역사를 움직였던 인물들은 회의주의자나 무책임한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믿음대로 소신대로 살았던 사람에 의해서 였습니다. 열심이야 말로 승리의 열쇠입니다.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남들보다 축구에 더 많은 열성을 바쳤고 골프를 잘 하는 사람 역시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지금 이 승리의 열쇠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열심을 다하는 생활로서 승리의 결과로 마음의 평화를 쟁취하여 늘 평화로운 삶을 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의 실천
-상지종신부-
안식일 회당,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군중 속에는 회당장도 있습니다. 평화롭고 활기차며 열정으로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한 여인이 등장함으로써 이내 이런 분위기는 깨지고 맙니다. 이제 열심히 가르치고 계시던 예수님과 가르침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회당장은 이 여인을 사이에 놓고 극한의 대립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보고 회당장은 분개하여 군중들에게 말합니다.
"일할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병을 고쳐 달라 하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십팔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 하여 이 여자를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 주지 말아야 한단 말이냐?"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참된 사랑은 여타의 이유로 인해 구체적인 실천을 방해받지 않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의 처지나 고통이 결코 남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에게 있어 치유받은 여인은 안식일을 방해하는 제3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이 여인의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고, 그렇기에 치유라는 사랑의 실천을 도저히 뒤로 미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봉성체 때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환자분들은 송구스러울 정도로 융숭하게 맞아주십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시는 성체,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들과의 소중한 만남과 대화, 이 모두는 환자분들에게는 참으로 간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무척 짧습니다. '조금만 더'라는 아쉬운 눈빛을 보내시는 환자분들에게, '다음달 또 뵐께요. 건강하세요.'라는 말씀을 드리고 다른 집으로 향합니다.
환자분들의 간절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의례적인 행사로 봉성체를 다닌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본당의 상황만 허락한다면 한 달에 한 번 있는 봉성체를 두 번으로 늘리면 좀 더 오래 만나 주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사목 활동에 바쁘다는 이유로,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사랑의 나눔에 철저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새로 시작한 한주간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에게 맡겨진 하느님 백성에게 다가가기를 다짐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편안하게 숨 쉬는 날 -강영구신부-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대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安息日)의 주인입니다(마르2,28).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그분 품 안에 머무는 사람만 안식(安息)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안식일(安息日)은 편하게(安) 숨을 쉬는(息) 날(日)입니다.
18년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은 하루도 편하게 숨을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련한 여인은 안식일(安息日) 날마저도 고통스럽게 숨을 쉬어야 합니다. 이유는, 그녀가 하느님 품 안에 머물지 못하고 병마(病魔)의 지배 밑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흙덩이에 지나지 않던 인간이 하느님의 숨결로 사람이 되었기에(창세 2,7)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만 편안하게 숨을 쉬며 생명을 이어갑니다. 안식일(安息日)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그녀를 병마(病魔)의 지배 밑에서 해방시킵니다. 하느님의 품 안으로 돌아온 여인은 비로소 사람답게 숨을 쉬며 평안을 누립니다.
당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당신의 숨결은 고르고 편안합니까? 당신은 지금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聖靈)을 숨 쉬고 있습니까? 미움과 원망, 증오로 부글거리고, 탐욕과 성냄으로 씩씩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하느님 품 안에서 고르고 편안하게 숨 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자유와 기쁨의 안식일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루가만이 고유자료로 전하는 "곱사등이 부인의 치유기적사화"이다. 그런데 오늘의 치유기적은 그것이 회당에서 안식일에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주목을 끌고 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에 분개한 회당장이 반론을 재기하여 모여든 사람들에게 안식일이 아닌 날에 와서 병을 고쳐달라 하라고 나무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반론을 이용하여 반대자들의 흑심을 드러내 밝히시고, 되려 군중의 호응을 얻어내신다. 따라서 오늘 기적사화는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하느님 자녀의 자유와 안식일법의 참된 의미에 대한 가르침으로 요약된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찍이 갈릴래아 지방에서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고, 예수를 고발할 기회를 찾고 있던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 때 예수의 반대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해버리려고 모의하였다.(6,6-11) 또 한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 몸이 부은 수종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오히려 법에 합당함을 가르치셨다.(14,1-6)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는 예수님의 눈에 허리가 굽어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인 하나가 들어왔다. 루가는 이 여인이 18년 동안 곱사등이로 참담한 삶을 살아왔고, 이 병이 사탄에 의한 병마(病魔)임을 밝힌다. 예수께서 여인을 가까이 불러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12절) 하고 말씀하신 뒤 여인에게 손을 얹자, 건강해진 여인은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3절)고 한다. 치유의 과정을 살펴보자. 병이 떨어졌다는 것은 여인에게서 병마, 즉 사탄을 예수께서 몰아내셨다는 말이다. 사탄으로부터 자유를 되찾은 여인은 예수님의 안수를 통하여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찬양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하느님께서는 ...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2,2-3) 회당장의 말대로 일주일에 일할 날이 엿새나 있다.(14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복을 주시는 일에는 안식일이 적격이다. 더구나 예수께서 하느님의 자녀를 사로잡고 있는 사탄을 안식일이라고 해서 그냥 둘 리 없다. 흔히 회당장과 같이, 18년 동안 곱사등이에 시달려 왔던 부인이 하루나 이틀 더 기다린다고 해서 난리라도 나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런 생각을 통하지 않는다. 위선자들도 안식일에 자기 가축 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외양간에서 풀어주거늘(15절), 하물며 사탄에 사로잡힌 하느님의 귀한 자녀를 한 시간이란도 그냥 둘 수 없으신(16절)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안식일이란 사탄의 종살이와 고통과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과 완성의 날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주일도 바로 이런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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