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맹인으로 살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상상으로 그리거나 묘사한 것을 실제로 본 것처럼 그려 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새소리, 물소리를 묘사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설가들이 인간의 감정을 묘사할 때마다 짧은 글 속에 많은 얘기들을 감추고 함축하여 드러낸다는 것은 정말 신기(神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시어(詩語)를 끄집어내서 짧은 행 속에 묻는 것도 정말 신기(神奇)할 뿐입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그렇게도 생생하게 자신이 본 것을 옮기고, 상상한 것을 말로 표현하는지 상상하면 신묘(神妙)함을 느낍니다. 악몽에 시달리거나 아름다운 꿈을 꾸고 그 것을 현실처럼 느낄 때에도 그 속에 있는 그 오묘함은 상상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기도 합니다. 삶의 온갖 것들이 내게 무게로 다가와 매일 매 순간을 느끼고 색깔을 입히고, 깊이를 달리할 때 나는 그저 멍청하게 감격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임을 여읜 사람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노래한 사설시조 한 편을 묵상하면서 그 간절한 마음을 어쩌면 그리도 세세하게 표현했는지 신기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원문 아래 ‘ㅏ’ 가 지원이 되지 않음)
나모도 바히돌도 - 작자미상
나모도 바히돌도 업슨 뫼헤 매게 쪼친 가토리 안과 대천(大川) 바다 한가온대 일천석(一千石)시른 배에 노도 일코 닷도 일코 늉총도 근코 돗대도 것고 치도 빠지고 바람 부러 물결치고 안개 뒤섯겨 자자진 날에 갈길은 천리만리(千里萬里)나믄듸 사면(四面)이 거머어득 져뭇 천지적막(天地寂寞)가치노을 떳난듸 수적(水賊) 만난 도사공(都沙工)의 안과 엊그제 님 여흰 내 안히야 엇다가 가를 하리오.
<해석> 나무도 없고 바윗돌도 없는 민둥산에서 매에게 쫓기는 까투리의 마음과, 대천 바다 한가운데서 천석의 곡식을 싣고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나서 노와 닻도 잃어버리고, 닻줄은 끊어지고 돛대도 꺾어지고, 키도 빠져나가고, 바람은 불어 물결은 몰아치고, 안개는 뒤섞여 사방을 분간할 수 없고, 갈 길은 아직도 천리만리 남아있는데 사면이 어둑하고 날은 저물어 적막하고, 파도가 몰려오는 가운데 해적 떼를 만난 선장의 마음과, 엊그제 사랑하는 임과 이별한 나의 마음이야 어디에다 비교하겠는가?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이처럼 간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운 생각이 들어갑니다. 그 마음속에 사랑을 묻고 있으면서 터질 것 같고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까투리와 선장의 고난과 죽음을 앞에 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이별과 아픔과 그리움, 그리고 막막한 처지를 사설시조로 표현한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지 못함을 간절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연인과 이별하는 마음, 연인을 떠나서 죽게 되었을 때의 그 긴박한 이별을 어쩌면 이렇게 간곡하게 표현하였는지 정말 신기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세상 끝나는 날에 대한 묘사가 정말 신묘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씀이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 주변 상황을 간결하게 묘사하십니다. 여기저기의 장소를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인간의 마음에 천차만별로 다르게 하느님의 나라가 다르게 오실 것이며, 수십억 개, 수천억 개의 모습으로 다르게 오실 것이니 일일이 표현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든 크든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같이 오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답니다.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웃을 것이다.> 탈무드에 있는 말입니다. 하느님나라를 아주 간단하게 표현한 탈무드의 교훈을 보면서 나는 정말 하느님나라를 그리지 못하고, 간직하지도 못하고, 새기지도 못하고 살았음을 자성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그 동안 헛살았던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하느님나라는 서울인줄 알았고, 시골의 전원주택인 줄 알고 있고, 크고 작은 성당이나 예배당인줄 알았고, 법당이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가슴이며, <고아를 웃기는>순수한 시간이며, 아이들을 위해서 가슴 졸이며 행복해하는 엄마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새깁니다. 그 사랑이 머물러야 하는 내게 사악한 기운이 감돌고 있으니 그 분은 오늘도 질식해서 돌아가십니다. “숨을 쉴 수 없다. 얘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