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 ‘천자암(天子巖) 설화‘ 3.> 3편 中.
● 웅천 바다 가운데에 있는 천자암(天子巖) 설화[옮긴 글].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천자암(天子巖)에 관한 전설의 배경은,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李)씨 성을 가진 풍수사(風水師)가 앞으로 후손이 천자나 왕이 될 아버지 명당자리를 찾아 아버지 유골을 안고 전국을 헤매고 있었다. 백두산에 갔다가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에서 지맥(地脈)을 살펴 본 풍수사는, 명당이 경상도 웅천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웅천에 도착한 풍수사는 산맥을 살펴보니, 그 중 한 산줄기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는 모습인 것을 보았다. 풍수사는 이 산줄기를 향한 장소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명당인 것을 알았지만 바다 속 바위 밑이라 난감하였다. 그때 이상하게 생긴 괴인(怪人)이 바다 근처 동굴로 들어가자 뒤쫓아 가보니, 그곳에는 뜻밖에도 한 아리따운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 여인이 말하길, "저는 웅천 땅 귀한 집의 사람인데 가문이 큰일을 당하여 도망치다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큰 수달 한 마리가 들어와 강제로 부부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낳은 아들이 바로 저 괴인(怪人)입니다. 아비 수달은 죽은 후, 지금까지 나를 봉양하고 있습니다.“하였다. 그리하여 바위에 대해 물으니, "아이의 말로는 바위 속에 구멍이 두 개 뚫려져 있다고 하더군요." 풍수사가 보아하니, 왼쪽 구멍은 천자가 날 구멍이고 오른쪽 구멍은 왕이 날 구멍이었다. 그 아이를 불러서, ”너의 아비 수달의 유골을 가져다가 오른쪽 구멍에 넣고 나의 아버지 유골을 왼쪽 구멍에 넣어 두면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하니 흔쾌히 승낙했다. 아이는 두 해골을 품에 껴안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는데 어리숙한 이 아이는 물속에서 오른쪽 왼쪽 구별하기가 어려워 바꾸어 넣고 나왔다. 이후에 괴상한 이 아이는 중국으로 건너가 명(明)나라를 세우니, 이 사람이 곧 중국의 천자인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었고, 풍수사의 아들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라고 전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천자가 탄생한 바위라 하여 ‘천자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9) 웅천 천자암[熊川天子巖] / 오횡묵(吳宖默)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
印島凄凉有古墳 처량한 인도(印島) 섬에 옛무덤이 있는데
悠悠往事世人云 아득했던 지난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누나.
紅羅天子今安在 붉은 비단옷 천자(天子)는 지금 어디 있는가?
一片歸雲侄夕曛 한 조각 돌아가던 구름이 석양에 머무르네.
10) 웅천우음[熊川偶吟] / 1479년 김흔(金訢,1448년∼미상) 조선통신사.
千里行裝酒一巵 천리 길 행장에 술 한 잔 기울다가
旅愁鄕思入支頤 턱 괴고 고향 생각하니 객지의 근심일세.
等閒應被江山笑 응당 강산이 웃어줘 등한시하며
踰嶺而南無一詩 고개 넘어 남으로 오니 시(詩) 한편이 없어라.
11) 웅천동헌[題熊川東軒] / 어득강(魚得江 1470∼1550)
不信書中血漂杵 서신 내용에 피가 흘러 방패가 떠다닌다는 말을 믿지 못해
眼看海水亦玄黃 눈으로 본 바닷물 또한 검고 누런빛이었다.
縣城門外禾麻地 고을 성문 밖에는 벼와 삼이 자라는 땅이고
卽是他年古戰塲 곧 예전의 어느 해에는 옛 전쟁터였다네.
卉服蠙珠曁海魚 풀로 만든 옷을 입고 진주와 바닷물고기를 바치며
慕羶曾受一塵居 일찍이 모전(慕羶)을 사모하듯 한 티끌로 살고 있네.
百年生齒蜂房密 백성들 모두 번창하여 총총한 벌집 같고
一燎鴻毛便作墟 한 가닥 빛나는 기러기 털처럼 편한 삶터가 되었다.
二十年前看盡壁 이십년 전에 다 없어진 성벽을 보다가
名公箇箇有題詩 훌륭한 공(公)들께서 하나하나 처음으로 시(詩)를 지었다는데
倭奴偸取瓊琚盡 왜노(倭奴)가 훔쳐간 모든 경거(瓊琚)와
不見支卿子獻詞 지경(支卿, 權柱)과 자헌(子獻, 金勘)의 시문을 보진 못했다.
◯지경(支卿) 권주(權柱 1457∼1505)가 일찍이 사신으로 대마도를 다녀왔다. 역관 조신(曺伸)을 보냈는데 먼저 돌아와 말하길, “북쪽 큰길은 아득하지만 동쪽 바다는 물결이 일고 있어, 2년에 걸쳐 함께 갔다가 함께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조신(曺伸)과 더불어 북경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자헌(子獻) 김감(金勘 1466∼1509)은 선위사(宣慰使)로 유구국에 다녀왔습니다. 누각의 운자(韻字)를 쓴 답시(答詩)에 ‘조개와 물고기가 어찌 하늘에서 모두 다시 태어남을 알리오.’ 모두 아름다운 글귀이다. 나는 오직 들은 것만 기록한다. 지금은 남은 시판(詩板)까지 모두 거두어 가니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權柱支卿甞使還對馬州 送譯官曺伸先還朝云 北路漫漫東海(瀾) 二年同去又同來 盖甞與曺同行北京也 金勘子献宣慰琉球使 和樓韻云介鱗寧識並生天 皆佳句 余但記此耳 今爲倭奴撤盡餘詩板 無一遺者)
頭流脉盡山增秀 두류산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산은 더욱 빼어난데
瓊島銀盤飣餖羅 옥 같은 섬에서 은 쟁반에다 진귀한 음식 차려놓았네.
收拾不遺添地誌 지리책을 포함하여 남겨 놓지 않은 것을 수습하며
英靈莫恨取之多 영령(英靈)들이 취한 것이 많았다고 유감스러워 마시라.
[주1] 모전(慕羶) :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양고기가 개미를 좋아하지 않아도 개미들이 좋아서 달려드는 것처럼[蟻慕羊肉] 순 임금이 노린내 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좋아한 것이다,”라고 했다.
[주2] 경거(瓊琚) : 경거는 아름다운 옥인데, 남에게 보답하는 좋은 물건에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모과(木瓜)에 “내게 모과로 던져주면, 경거로 보답하리다.”하였다.
[주3] 권주(權柱 1457∼1505) : 조선의 문신.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 이(邇)의 아들. 10세 때 이미 경사(經史)에 통했다.1474년 진사가 되고 1480년(성종11)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중국어에 능통하여 1489년(성종20) 공조좌라(工曹佐郞)으로 있으면서 요동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왔다. 1493년 부응교(副應敎)로 대마도(對馬島)에 경차관(敬差官)으로 다녀와 응교(應敎)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 도승지(都承旨)에서 충청도 관찰사,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1502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에 앞서 성종이 윤비를 폐위시키고 이어 사사할 때 사약(賜藥)을 가지고 갔다 하여 평해로 유배, 이듬해 교살당했다. 중종 때 우참찬(右參贊)에 추증되었다.
[주4] 김감(金勘 1466∼1509)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헌(子獻), 호는 일재(一齋)·선동(仙洞).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수(脩)이고, 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원신(元臣)이며, 어머니는 강석덕(姜碩德)의 딸이다. 1489년(성종 20) 진사가 되었고, 이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용되었다. 1492년에는 유숭조(柳崇祖)·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서 천문·역법을 연구하였다. 1498년 홍문관부교리에 올랐고, 이어서 교리·응교·전한·직제학을 역임하고, 1501년(연산군 7)에 부제학이 되었다. 이어 병조참지가 되고,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동지성균관사·지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추쇄도감제조(推刷都監提調) 등을 겸하였다. 임사홍(任士洪)과 더불어 갑자사화를 다스려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당시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져 금표(禁標)를 세워 도성 주변의 백성을 먼 곳으로 이주시키고 사냥을 일삼을 때 금표 안내문을 지었고, 추천시(鞦韆詩)로써 연산군에 아첨하였다. 그 뒤 의정부우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로서 경상도관찰사를 겸임했고, 연산군에 충성을 서약하는 경서문(敬誓文)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중종반정에 협력해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연산군일기』를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러나 1507년(중종 2)박경(朴耕) 등이 박원종(朴元宗) 등을 도모하려는 모의에 연좌되어 금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혐의가 풀려 연창부원군으로서 영경연사(領經筵事)를 담당하다가, 1509년에 죽었다. 중종반정 이후 줄곧 연산군 때의 총신이었다는 이유로 사림에 의해 지탄을 받았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