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실존주의와 불트만의 종말론
Ⅰ. 서론 이 글은 제목 그대로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에 관한 고찰이다. 조직신학자가 아니라 신약성서학자인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을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도 있 다. 그러나 불트만에게 있어서 성서신학자냐 조직신학자냐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신학의 본유적 과제가 성서, 특히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케리그마1,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신앙의 응답을 통한 인간 실존의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가져오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 다. 불트만의 신학은 종종 그와 더불어 20세기의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동시대의 조직신학자인 바르트의 신학과의 비교를 통해 소개되곤 한다. 한편으로, 불트만은 바르트와 같은 계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자로서, 성서가 증언하는 케리그마 즉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바르트와 달리 그는 인간의 하나님 인식은 인간의 실존적 자기 이해라는 양태로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실존 구조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위해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을 기꺼이 사용했다. 불트만의 신학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내려져 왔다. 특히 그의 신학과 하이데거의 철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의 평가들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존재론을 수용함으로써 신학을 철학에 종속시켰다는 비판이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의 원조는 바르트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는 불트만의 입장을 “신약성서 그리고 인간 실존”으로 묘사하면서, 불트만이 계시에 “그리고”를 첨가함 으로써 신학의 첫 번째 계명을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바르트를 따라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불트만의 신학을 자연신학의 실존주의 버전으로 간주했다. 즉 불트만은 철학적 실존 이해를 자연신학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고, 이 실존에 대한 자연적 이해와의 논의를 통해 신앙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여겼다 는 것이다. 반면에, 불트만의 신학이 하이데거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지만, 바르트와 달리 이 사실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평가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존 매쿼리가 대표적인 신학자다. 존 매쿼리는 불트만이 전제하는 인간 실존의 존재론은 하이데거에게서 온 것이며, 따라서 불트만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철학의 사용이 신학을 위한 예비단계로서 유용한 도움닫기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다른 한편, 불트만의 신약성서 해석학을 위해 하이데거의 철학이 갖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불트만의 신학이 결코 하이데거의 철학에 의존하거나 종속되지 않는다고 보는 신학자들도 있다. 안토니 티즐톤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티즐톤은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보는 관점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결코 하이데거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첫 두 관점의 평가들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필자는 마지막 관점이 불트만의 신학에 대한 가장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생각의 타당성은 이 글에서 불트만의 신학이 하이데거의 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과 아울러 그의 철학과 구별되는 불트만 신학 자체의 고유한 신학적 특징을 신학 방법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고찰함으로써 드러날 것이다. 먼저 하이데거 철학의 주요 내용을 개관한 후에, 불트만의 신학과 하이데거의 철학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고, 그 다음에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신학 방법론에 대한 평가 를 시도하고자 한다. II.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 하이데거는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을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했다. 즉 그는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인간 실존을 연구했다. 그의 스승인 후설과 달리 하이데거는 인간 자아가 초월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아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주관이 아니라 구성된 대상이다. 자아는 현상학적으로 접근 가능한 실존하는 자아로서 세계를 지향하고 구성한다. 이것은 인간 실존 즉 현 존재(Dasein)에 대한 존재론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존재론의 토대가 되는 기초 존재론이 됨을 의미한다. 기초 존재론으로서, 인간 실존은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서문에서 현 존재 분석이 존재 자체의 물음을 다시 제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책에서 그의 논의는 시간성과 관련된 현 존재의 구조를 분석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온전히 구현한 인간 실존의 구조를 존재의 구조와 동일시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 존재는 언제나 “세계-내-존재”(being in-the-world)다. 현 존재가 세계-내-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먼저 현존재를 그 자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가진 실재로 정의하고 그 다음에 현 존재가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에 관한 물음을 제기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 존재는 이미 세계-내-존재다. 그러나 현 존재가 처해있는 세계는 과학적 우주론에서 생각되는 것과 같은 시공간적 연장이 아니다. 그 세계는 현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경험되고 구성되는 세계다. 현 존재와 세계는 어느 한 쪽이 존재론적 우선성을 갖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포함한다. 세계는 현 존재의 세계이며, 현 존재는 세계-내-존재이다.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에 따르면 시간성의 범주 안에서 현 존재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하나는 “처해 있음”(Befindlichkeit)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Verstehen)이다. “처해 있음”은 존재함으로써 현 존재가 느끼는 일상적인 기분이다. 이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현존재에게 주어진 소여성2이다. 이 주어진 소여성을 하이데거는 “내던져져 있음”이 라고 부른다. “이해”는 언제나 자신을 넘어서는 현 존재의 존재 양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자기실현 가능성의 관점에서 현존재가 자신을 미래로 투사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자신을 잠재적으로 실현 가능한 목적의 관점에서 세계-내-존재로 이해한다. 세계 안의 다른 존재자들은 그것들이 현존재의 목적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규정된다. 그리고 현존재가 처해 있는 세계는 현 존재가 추구하는 목적의 최종적 맥락이다. 현 존재는 모종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투사로서 자신을 세계-내-존재로 구성한다. 현존재가 추구하는 목적은 세상 안의 다른 존재자들 안에 나타나는 가능성이거나 또는 현존재가 자신의 독특한 존재 안에서 발견하는 가능성이다. 전자의 경우 현 존재는 “비본래적”이라고 기술되며, 후자의 경우 현존재는 “본래적”이라고 기술된다. 세계 안의 사물들을 경험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사물들을 다른 현 존재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경험한다. 우리는 세계 안의 사물들과 관계를 가짐에 있어서 다른 현존재들을 이미 우리와 함께 있는 존재들로 발견한다. 따라서 우리의 세계-내-존재의 중요한 특징은 우리가 세계 안에 “타자와-함께 있는-존재”라는 것이다. “타자와-함께 있는-존재”로서 현존재의 본래성은 다른 현존재들의 인격적 개별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있다. 반면에 현 존재의 비본래성은 타자들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그들을 평균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뒤집어 말하면, 그 자신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존재로 이해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한다. 이 경우에 현 존재는 타자들과 같은 비인격적 존재로 기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의 독특한 가능성을 다른 사람들의 평균성에 종속시킨다. 하이데거의 시간은 물리적 개념이라기보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범주다. 즉 과거, 현재, 미래는 실존하는 현 존재의 세 차원 또는 지평이다. 여기서 미래는 시간의 주된 양태이다. 왜냐하면 현 존재 는 미래를 향한 투사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 가 아니라 투사된 양태의 현 존재이다. 과거는 한때 현존하다가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 존재의 내던져져 있음이다.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를 전유하는 것이 세계 안에서 존재들의 현재화를 가져온다. 현 존재의 순서에 있어서 현재는 시간의 세 번째 양태이다. 하이데거는 현재를 주관에 현존하는 대상의 형태로 현 존재에 현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현재는 명증적인 사고의 출발점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시간을 현존하는 것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세계의 존재자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비본래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현존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사태를 파악하려는 이러한 성향은 현존재의 최종적 가능성이 죽음이라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본래적인 삶은 현존하는 것의 관점이 아니나 자신의 고유한 투사의 관점에서 사는 것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존재의 가능성의 실현은 고뇌를 초래하고 세상의 사물들 안에서 나를 상실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본래적인 삶을 실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양심, 죄책, 결단을 통해 본래적인 실존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양심은 현존재를 그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에로 부르는 부름이다. 이 부름은 현존재의 죄책, 즉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심층적 가능성에 있어서 그 자신인 그 자신이 되지 못한 것을 드러낸다. 이 죄책과 본래적 가능성의 실현을 향한 목적을 책임성을 가지고 수용하는 것이 결단이다. <존재와 시간> 이후 하이데거는 현 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 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존재의 의미가 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물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존재는 인간 존재와 등가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형이상학 연구가 존재자의 존재의 문제를 그 존재자를 존재자로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동일시해 왔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형이상학 연구에서는 또한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의 근거로서 지고의 필연적 존재자가 설정되었다. 하이데거에게 이것은 서구철학과 서구 문명에 있어서 존재 자체에 관한 본래적인 물음이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넘어서 존재에 대한 본래적인 물음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하이데거는 본래적인 존재의 물음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즉 본래적인 존재의 물음은 우리가 물려 받은 모든 해석에서 벗어나, 지향된 대상을 주어진 그대로의 순수한 소여성 안에서 보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 자체를 우리가 습득한 모든 해석방식으로 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무를 모든 존재자의 가능성으로서 대면할 때에만 존재를 망각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사물의 무화(無化) 가능성을 (불안 속에) 경험할 때에야 본래적인 물음을 물을 수 있다. 이 경험만이 존재자들의 존재의 순수한 사실에 대한 진정한 경이감을 가능하게 만든 다. 존재자에 대한 모든 새로운 이해는 존재 자체를 새롭게 보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를 직접 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존재가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가 갖는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기술은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첫째, 존재 자체는 주관-객관 이분법을 선행하며 이 이분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후기 저술에서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의 의미는 더욱 심화되어 “거기 있음”(Da-sein, there-being)으로 나타난다. “거기 있음”으로서의 현 존재는 특정한 인격의 (주관적) 존재도 아니고 “거기 있음” 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의 (대상적) 존재도 아니다. 이제 하이데거 의 관심은 구별 가능한 특수한 존재자들의 존재로부터 사물들의 현현 안에서 자신을 현실화하는 존재로 전환된다. 인간은 단지 이 현현의 한 필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이 존재의 온전한 현현이 존재의 “거기 있음”이다. 이것은 현 존재를 포함한 모든 존재자에 대한 존재의 철저한 우선성을 나타낸다. 우리가 현 존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제 우리는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순서는 결코 뒤바뀔 수 없다. 인간은 관심의 중심으로부터 옮겨진다. 둘째, 존재는 사건으로 현현한다. 존재는 역사적 현상이다. 인간의 역사는 존재가 현현하는 방식의 한 기능이다. 존재가 역사적인 까닭은 인간에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현함에 있어서 끊임없이 새로운 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현상의 흐름 뒤에 있는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현현의 과정 자체이다. 인간의 역사와 역사성의 토대로서, 존재의 역사성은 인간 실존의 운명을 결정한다. 여기서 본래적인 물음이 물어지고 대답되는 방식은 단지 현상학적 방법을 실천하는 인간의 숙련된 기능이 아니다. 존재가 모종의 구조의 관점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현존시키거나 또는 인간 안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우리는 존재의 근본적 표상을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존재의 근본적 표상은 우리에게 주어지며 우리를 위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존재가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줄 때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을 존재에 개방하거나 아니면 존재로부터 은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본래적으로 사고하며 사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 우리는 비본래적으로 사고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적인 자유와 책임은 존재가 우리에게 현현할 때 존재를 향한 개방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유신론자인가 무신론자인가? 그는 자신이 둘 다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그의 사고 범위 안에 하나님의 문제가 포함되지 않을 뿐이다. 형이상학은 하나님을 지고의 존재로 표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존재 자체의 물음을 은폐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극복되어야 한다. 더욱이 하이데거는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존재자이지 존재 자체가 아니다. 그러한 존재자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하는 문제는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자적 문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오늘날 하나님의 실존은 인간의 삶을 위해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존재론적 분석과 존재자적 분석 모두 하나님 없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III. 하이데거의 철학과 불트만의 신학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개념들을 광범위하게 전유하여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과 그의 현 존재로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한 다. 그리고 그는 하이데거를 따라 실존론적인 것(existential)과 실존적인 것(existentiell)을 구별한다.3 또한 그는 하이데거가 구별하는 인간 실존의 두 가지 유형인 비본래적 실존과 본래적 실존 개념을 차용한다. 그리고 또한 그는 하이데거가 구별하는 인간 실존의 두 차원인 존재론적(ontological)인 것과 존재자적(ontic)인 것의 구별을 전유한다. 그러나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지는 않고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서 필요에 따라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불트만과 하이데거의 차이는 불트만이 신학을 그 대상에 의해 정의되는 “실증적 학문”으로 정의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실증적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그 대상이 철학에 의해 미리 규정되도록 허용할 수 없다. 신학은 오직 그 대상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신학은 이 대상 즉 하나님을 다른 학문이 아닌 바로 자신 안에서만 발견한다. 철학은 이 신학의 대상을 전혀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철학은 다른 대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진리를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반면, 신학은 진리를 하나님에 대한 물음으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을 이해함으로써만 우리는 참된 진리를 파악한다. 불트만과 하이데거는 “본래성”(Eigentlichkeit)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 개념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다르다. 불트만은 말한다. “신앙은 인간이 상황 안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결단을 통해 본래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본래성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취될 수 없다. 신앙은 철학적 실존의 선택을 하나님에게 묶이기를 거부하는 인간이 자기를 정당화하는 자유의 행위로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의 결단에 의해 본래성이 성취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님이 죄인을 의롭게 하심에 의해 본래성이 성취된다고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과 대립된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을 믿는 신앙만이 진리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불트만은 신앙 이전의 자연적 인간이 계시에 대한 전 이해(또는 질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이해는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되는 것이 함께 속해 있는 삶-맥락(life-context)을 전제한다. 여기서 전 이해는 어떤 대상(하나님)을 이해하는 인간이 특수한 역사적 삶과 맥락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 그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불트만은 하이데거를 따라 두 차원의 인간 실존, 즉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자적인 것을 구별한다. 존재론적인 것은 인간 실존의 경험적, 현상적 차원을 가리키는 반면, 존재자적인 것은 각 개인의 역사에 특수한 실존적 또는 개인적 차원의 구체적 실존을 가리킨다. 불트만에 따르면, 계시는 인간을 존재자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이 차원에서 신앙 이전의 실존이 신앙의 실존으로 지양된다. 신앙이란 “신앙 이전의 실존에 대한 실존적-존재자적(existentiell-ontic) 극복이다.” 존재자적으로, 신앙 안에서 인간의 옛 자아는 죽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한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신앙 이후의 인간은 신앙 이전의 인간과 동일한 인간으로 남아있다. 즉 신앙을 가진 인간은 신앙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능력과 한계를 가지고 이전과 동일한 사회역사적 맥락 안에 존재한다. 전(全)이해란 이러한 존재론 적 의미에서 계시가 이미 역사를 가진 인간, 이미 특수한 문화적, 역사적 상황에 속해 있는 인간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이 계시에 대한 전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존재자적 차원에서 인간의 전이해를 계시를 위한 접촉점으로 이해하는 자연신학을 거부한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우리는 계시에 의해 만나질 수 있는 피조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 안에 존재하며 우리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간은 특수한 경험, 기억, 욕구, 관계 등을 가진 존재이다. 신앙이 없이도 자연적 인간은 특수한 전이해를 갖는다. 그러나 존재자적 차원에서, 이 전(前)이해는 신앙에 의해 소금기둥과 같은 것으로 심판을 받는다. 신앙은 인간에게 옛 자기 이해를 대체하는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가져다 준다. 즉 신앙의 실존은 신앙 이전의 실존을 지양한다. 불트만은 계시에 대한 인식이 자연적 인간의 전이해에 의존한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전이해를 개념화하는 철학이 인간 실존의 문제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철학이 질문을 제기하고 신학이 이에 상응하는 답변을 한다는 상관의 방법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자연적 자기 이해의 문제성을 신앙의 관점에서만 따라서 신학 안에서만 인식 할 수 있다. 신앙만이 답변(하나님의 칭의)과 물음(인간의 죄성)을 안다. 인간 실존을 분석함에 있어서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진 빚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불트만은 이러한 개념들을 그가 신학자로서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그 계시가 주어지는 인간 실존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불트만이 “ <존재와 시간>의 현존재 분석을 (기초 존재론이 아닌) 기초 인간론으로 이해하고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적 의도를 근본적으로 무시했다.”는 융엘의 지적은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은 계시가 주어지는 자리인 인간 실존의 분석을 위한 도구로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들을 가져다가 사용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철저한 계시신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방법론적 시도는 성공했는가?
IV.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세계관 즉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사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불트만은 세계를 시공간 현상 전체, 인간의 인식 대상 전체로 이해한다. 그에게 이 세계는 닫혀 있는 인과적 체계이다. 즉 이 세계 안의 현상의 원인은 세계 내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요인으로 도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초월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행동을 다른 인과적 요인들과 나란히 놓을 수 없다. 하나님은 신앙의 눈을 갖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숨겨져 있다. 신앙의 눈은 모든 자연과 실존이 전적으로 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되어 있다고 본다. 신앙이 없다면 세계내적 원인들의 관점에서 충분히 설명 될 수 있는 사건이 신앙의 눈에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인식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코로나 팬데믹이 자연의 우연한 재잉인 것으로 무신론자는 보지만, 신앙의 관점은 하나님의 행동으로 믿는다 이 신앙의 인식은 이 세계적 인식을 지지하지도 않고 그것과 충돌하지도 않는다. 한 사건은 하나님의 행동이 아니며 동시에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역설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 아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복음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결정적으로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동을 선포하는 것이 케리그마다. 설교의 과제는 하나님이 이 케리그마를 효력 있게 만드시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케리그마는 검증 가능한 이론이나 가설도 아니고 지적인 동의가 필요한 어떤 사실에 대한 확언도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다는 확언은 신앙 즉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자기 위임의 결단에로의 부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케리그마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옛 자아의 죽음과 사랑 안의 자유의 삶으로의 부활 안에서 현재 행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행위가 현존하는 케리그마에 대한 본래적인 응답이다. 신학은 신앙과 더불어 생겨나는 자기이해에 대한 방법론적 설명이다. 새로운 자기이해에 대한 설명으로서, 신학은 오직 인간 실존과 관계되며 심지어 인간론과 동일시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세계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자기이해는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은 그의 성서 해석학에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신약성서를 케리그마에 대한 원천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오직 신약성서를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성서의 증언은 이미 저자의 신앙에 의해 영향 받은 인간의 언어로 신화적, 신학적 형태 안에 표현된 것이다. 불트만은 케리그마를 표현하는 신약성서의 언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신약성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다는 케리그마적 증언을 하나님의 행동을 이 세계 안의 사건들과 나란히 놓는 언어로 표현했다. 신약성서조차도 초월적인 저 세계에 속한 것을 이 세계적인 차원 안에서 객관화한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서는 케리그마를 신화화했다. 불트만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신화는 우주론적 형태와 종말론적 형태로 표현된다. 우주론적으로, 신약성서는 3층적 우주관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천상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는 우리 세계와 나란히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로 나타난다. 종말론적으로, 신약 성서는 연대기적으로 임박한 미래에 이 세계를 대체할 새로운 종류의 세계를 묘사한다. 이 두 형태의 신화는 모두 이 세계내적 원인과 나란히 이 세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을 일으키는 세계 초월적 존재의 활동에 대해 말한다. 불트만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신약성서의 신화는 폐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비신화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서의 신화가 과학적 세계관을 지닌 현대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올바로 만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즉 비신화화 작업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실존적 만남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요청된다. 따라서 교회의 과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선포가 구시대적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비신화화하는 데 있다. 신화는 이 세계적인 것들 전체가 초월자로부터 존재와 한계를 부여받는다는 인식을 표현한다. 교회는 신화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도를 비신화적 범주 안에서 재확증해야 한다. 케리그마적 선포에 대한 비신화화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 결정적으로 행동하셨다는 사실을 우주론적, 종말론적 신화의 범주를 떠나서 새롭게 진술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고대의 (신화적) 텍스트와 현대의 (과학적) 세계 사이의 격차는 적절한 질문 또는 전이해를 가지고 성서를 해석할 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 질문 또는 전이해는 실존적 관심을 의미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불트만에게 신학이란 신자의 실존적 자기 이해를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서학의 목표는 신화적 사고패턴에 담겨있는 실존적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존적 질문 또는 전이해를 가지고 성서에 들어가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된 그의 자기 이해를 비신화화 해내야 한다. 그런데 불트만에 따르면 우리의 질문은 어떤 사고와 이해의 맥락 즉 전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전제 즉 사고의 관점과 이해의 범주는 언제나 철학에 심대하게 의존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이 우리의 질문의 결과를 미리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철학은 질문 제기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답변은 성서로부터 주어진다. 그런데 편협하고 부적절한 전제는 성서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제한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개념을 가지고 성서에 접근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현재 자기 이해에 적절하며 동시에 성서의 신학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개념을 제공하는 철학적 인간학이 필요하다. 불트만은 이러한 철학적 인간학을 실존주의 철학,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이데거에 의해 수립된 ‘인간 실존에 대한 현상학적 존재론’에서 발견한다. 그는 실존주의가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각과 개념”을 제공해주며, 따라서 성서에 접근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전이해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실존에 관한 결정적인 질문을 가지고 성서에 접근할 때, 우리는 성서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매 쿼리에 따르면 불트만은 실존주의 철학이 성서의 메시지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제기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 답이 주어지는 틀인 기본적인 개념 체계, 즉 인간 실존의 영역을 제시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철학을 자신의 신학 작업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편입시켰다.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개념이 기독교의 실존에 대한 바울의 사상을 (바울 자신보다도 더) 분명하게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바울이 육과 영을 대조시킬 때, 그는 몸 과 영혼, 물질과 비물질을 구별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한 인 간 안에서의 두 가지 실존 양태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의 용어는 때때로 혼란을 초래하며, 따라서 영과 육이 한 인간 인격 안에 두 가지 실체적 구성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인간 실존에 대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존재론은 인간을 비본래적 실존과 본래적 실존으로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비본래적 실존은 자신을 사물의 세상으로부터 이해하며 그 자신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상을 위한 염려에 사로잡히는 실존 양태이 다. 그리고 본래적 실존은 실존하는 개인의 참된 잠재적 가능성의 관점에서 살아가는 실존 양태이다. 바울이 말하는 육은 비본래적 실존을 의미하고, 영은 본래적 실존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트만이 이처럼 바울의 사상을 하이데거의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결코 바울의 사상을 하이데거의 사상과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하이데거는 실제로 본래적 실존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실존 안에 내재한 본유적 가능성, 즉 사물적 현존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의 관점에서 살아가는 실존의 가능성을 올바로 보았다. 그러나 불트만에게 있어서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본래적 실존 개념은 하나님의 행동이 없다면 절망일 뿐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 실존이 기독교에 적합한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하이데거는 어떻게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지 못한다. 성서와 신학은 그것이 (하이데거가 수용하지 않는 개념인)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 실현 가능하다고 말한다. 불트만에 따르면 실존철학은 우리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우리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는 말하지 않는다. 둘째,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한 존재”에 결정적인 실존적 의 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결정적인 실존적 의미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다. 물론 기독교적 실존에 있어서 새로운 자아와 옛 자아는 단순히 연대기적인 의미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적 인간 실존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기독교적 실존은 존재자적으로는 새롭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여전히 자연적 실존과 동일한 구조 안에 있다. 즉 존재론적 범주는 자연적 실존과 신앙적 실존 모두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성서는 다른 역사적 기록이 제공하는 방식과 같이 단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이해하기 위한 한 지적인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 안에서 인간은 유일무이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인격적으로 만난다. 성서의 케리그마는 인간에게 사랑의 삶 안에서의 자유를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된다.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의 핵심은 실존론적 비신화화로서의 그의 성서 해석학에 있다. 그는 신약성서의 모든 신화적 표현을 실존적 관점에서 비신화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비신화화는 성서 안의 신화를 실존적 의미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서의 내용이 다 신화인 것은 아니다. 성서 안에는 신화가 아니면서 실존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내용도 있다. 불트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행동하셨다는 케리그마가 통상적으로 신화적 관념들과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는 신화적 진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케리그마는 하나님의 과거 행동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그 케리그마를 듣는 자들을 위한 오늘의 실존적 의미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불트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행동을 선포하는 케리그마는 신화로 간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비신화화시키지 않고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V.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에 대한 평가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에 대해서는 여러 입장에서 다양한 비판과 물음이 제기된다. 첫째, 보수주의자들은 불트만이 성서의 기적 이야기를 신화로 간주하고 기독교 신앙의 초자연적 성격을 파괴했다고 비판한다. 물론 불트만은 오늘의 과학 시대에 자연법칙을 초자연적인 힘으로 정지시키는 기적과 같은 개념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그의 신학 방법론의 특징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모든 자연적, 역사적 인과성으로부터 철저히 분리시킨다는 데 있다. 그는 초월적, 초자연적인 것(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의 행동)이 이 세계 안에 나타났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앙의 눈을 갖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불트만은 하나님의 계시 행동이 신앙의 눈에만 보이고 신앙의 눈을 갖지 않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숨겨져 있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에게 제기되는 두 번째 비판은 그가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신앙을 실존하는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트만이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 예수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에게 있어서 신앙이 역사적 예수와 무관한 까닭은 하나님의 행동이 언제나 신앙의 눈을 제외한 모든 눈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란 신앙과 관계없이 역사가의 연구에 의해 접근될 수 있는 예수를 의미한다. 그러나 신앙의 눈에는 역사가가 연구하는 역사적 예수가 곧 하나님의 행동이다. 신앙은 역사적 증거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행동을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트만 신학 방법론의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님과 세계, 초월적인 것과 이 세계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그 자신의 이해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불트만에게 제기되는 세 번째 물음은 왜 하나님의 행동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한편, 불트만은 유대-기독교의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기독교적 자기 이해의 출현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교회의 선포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어떻게 예수와 초기교회의 종말론적 메시지가 신앙의 결단을 촉발시켰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트만은 신앙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설명과 무관함을 강조한다. 신앙을 위한 결단은 오직 선포 안에서 능력이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물을 수 없다. 물론 불트만에게 있어서 이 신앙의 도약은 단지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아니다. 철학적 분석은 본래적 실존의 이상적 가능성을 지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상적 가능성을 자신의 힘으로 실현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자신을 절망으로 이끌 뿐이다. 여기에서 케리그마가 요청된다. 케리그마는 인간 실존의 유일한 이해 가능성을 인간에게 제공하며, 또한 인간이 이미 원하고 있는 것의 실현을 가져온다. 그러나 케리그마는 단지 인간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 자유 안에서 행동하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자연적 인간이 추구하는 것과 다르며, 인간은 단지 자신의 자연적 욕구에 의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고자 결단할 수 없다. 결단은 신앙의 도약이다. 불트만이 정의하는 기독교 실존은 하이데거가 정의하는 본래적 실존과 같은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본래적 실존은 모든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인 반면, 불트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떠난 본래적 실존의 선택은 절망의 선택이며, 심지어는 신앙이 죄로 규정하는 자기주장의 표현이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죄다. 불트만의 신학에서 신앙의 결단을 위한 근거나 신앙의 타당성을 위한 논증은 엄격히 배제된다. 성서와 선포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케리그마는 인간의 응답을 통해 현실화된다. 케리그마의 내적 현실화를 위한 결단은 인간 자신의 몫이다. 이 결단을 위한 객관적 근거나 타당성의 요구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결단은 언제나 그 자신의 과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케리그마와 부딪히게 될 때, 인간은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는 과거로부터 해방되어 절대적 현재 안에서 결단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자기 안정성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불트만은 신앙의 결단이 역사와 분리되어 케리그마로부터 주 어지는 절대 자유 안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케리그마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적 응답을 통해서 형성되었으며, 이 신앙적 응답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메시아사상의 영향사 안에서 형성된 기대 또는 전이해 안에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창조적 재해석을 통해 일어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응답이 백지상태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의 영향사 안에서 형성된 전이해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안에서 일어났으며, 이 신앙적 응답이 케리그마를 형성했다면, 이 케리그마의 선포 앞에서의 우리의 신앙의 결단도 개인적, 공동체적인 역사적 전통과 지평 안에서 형성된 전이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불트만은 우리가 신약성서를 연구할 때 적절한 철학적 전이해 즉 실존론적 자기 이해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하이데거로부터 인간 실존의 철저한 역사성에 대한 이해를 배웠다. 그러나 불트만은 인간 실존의 역사성에서 비롯되는 전이해를 신앙을 수립하기 위한 토대로 만들고 자 하지는 않는다. 그는 전이해를 인간 실존의 보편적 구조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 즉 존재론적 차원에 제한시킨다. 불트만은 모든 종교와 신화가 초월적 세계와 관계를 갖는다고 본다. 실존의 근거와 한계로서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식이 모든 신화가 의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표현된다. 모든 인간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한다. 불트만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실존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사실상 하나님에 관한 물음이라는 사실을 밝혀 준다. 신앙의 관점에서 모든 종교는 초월적 존재와 연관되어 있고 모든 신화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이해를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신화를 그 의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러나 불트만은 인간 실존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위한 토대로 간주하지 않는다. 즉 그는 일반적인 현상학적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신앙 사건만을 하나님에 대한 확증의 근거로 간주한다. 신앙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 더욱이, 하나님에 관한 유일하게 가능한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실존적 관계를 표현하는 주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아무 철학적 결론도 도출되지 않는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오직 하나님의 행동 안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며, 인간의 선행적 준비나 결단으로부터 그리고 철학적 전이해로부터 철저히 독립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트만의 신학은 인간 실존에 대한 분석을 위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존재론을 전유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신학적 접근과 정면으로 대립된다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이원론적 사고에 있다. 그에 따르면 객관적 세계는 하나님의 인과성에 대하여 닫혀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와 신앙에 대한 그의 이해에 있다. 불트만은 신앙을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 즉 계시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 행위는 자연 세계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신앙은 객관적 증거나 계산된 가능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계 안에 기적적인 행동을 통해 개입하신다는 생각은 신앙에 낯선 것이다. 신앙은 이 세계의 사건들에 하나님이 인과적 효력을 일으키심에 의해 지지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불트만의 이원론적, 탈세계적 신앙 이해에서는 신앙이 역사적, 우주적 지평을 상실하고 개인적인 인간 내면의 실존성(Geschichtlichkeit)으로 환원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불트만의 이원론적 사고에 대해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물음은 과연 신앙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그러한 인과적 효력을 일으키시지 않는다(또는 못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신앙이 기적에 의해 지지되기를 거부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주장에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 개념이 기적의 발생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신앙에 근거해서 기적의 발생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신앙 개념을 이원론적 세계관을 위한 토대 또는 전이해로 만드는 것이다. 불트만의 주장처럼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자 동시에 그 선물로 주어지는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으로서, 객관적인 세계의 사건들의 인과성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신앙이 세계의 사건들에 하나님이 인과적 효력을 미치는 행동을 하시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객관적 인과성에 기초한 세계관이 신앙에 부적절하다는 불트만의 견해가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가정해도, 이로부 터 이 세계가 초월적 세계에 대해 닫혀있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VI. 결론 불트만에게 있어서 오늘의 과학적 세계에서 신약성서에 대한 비신화화 즉 실존론적 해석이 요청되는 까닭은 객관적 세계관이 신앙과 본질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약성서의 신 화적 언어가 객관적인 언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비신화화는 객관적 세계관과 조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정당하게 다루기 위해 요구된다. 결론적으로,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의 문제점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불트만이 한편으로는 신앙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특정한 철학적(이원론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개념적 전제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자연신학을 거부하고 순수한 계시 신학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불트만은 이 세계가 초월적 세계에 대해 닫혀 있다는 오늘날의 과학적 세계관이 신앙의 초월적 근거를 강조하는 신학에도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즉, 세계가 하나님에 대해 닫혀 있으며 신앙은 객관적 세계관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철학적 사고가 불트만의 신학의 전제를 구성한다. 이것은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에 있어서 철학적 전이해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며, 따라서 불트만이 바로 자신이 거부하는 자연신학의 방법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의 두 번째 문제점은 그가 단지 이 세계가 초월적 세계에 대해 닫혀 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를 모두가 동의하는 자명한 공리처럼 전제한다는 점이다. 객관적 세계가 초월적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닫혀 있다는 그의 사고에 대해서는 보다 더욱 진지한 과학적, 철학적, 신학적 논의가 요청된다. 자연법칙의 결정성, 확실성, 폐쇄성을 강조하는 근대 과학과 달리,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바탕으로 한 코펜하겐 해석과 같은 양자역학에서는 자연 질서의 비결정성(indeterminacy)과 우연성(contingency)이 강조된다. 이와 같은 오늘날의 탈근대적인 세계관에서는 이 세계의 과정에 참여하고 그 과정과 상호작용하는 우주적 정신 또는 초월자 개념이 이해 가능한 철학적 개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적 정신 또는 초월자 개념은 인간과 세계의 역사 안에 역동적으로 참여하시고 상호적 관계성 안에서 인간과 세계 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성서에 나타나는 하나님 개념과 공명이 가능하다. ----------------------------------------------------------------------------------------- 1 케리그마 : 기독교에서 '케리그마'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말하며(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이신 자신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선포했다, 눅4:16-21) 이를 통해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믿음과 순종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마12:41; 롬16:25; 고전2:4; 15:14; 딤후4:17). 이것은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생활을 강화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케리그마 [kerygma] (교회용어사전 : 교리 및 신앙, 2013. 9. 16., 가스펠서브) 2 소여성(所與性): 사실이나 대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주어진 경험의 내용 범주. 3 옥덴(Ogden)은 독일어 ‘existential’과 ‘existentiell’을 영어로 그대로 번역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전자를 ‘existentialistic’로, 후자를 ‘existential’로 번역하기도 한다. 한국어로 전자는 ‘실존론적’으로, 후자는 ‘실존적’으로 번역된다. 독일어 ‘existentiell’(실존적)은 자신의 실존 방향을 선택하는 결단에 의해 형성된 개별적 경험의 특수한 성격을 지시한다. 케리그마의 선포는 이와 같은 실존적 결단을 요구한다. 독일어 ‘existential’(실존론적)는 하이데거가 현상학적으로 기술된 실존 범주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적 용어다. 실존론적 해석은 실존적 사건으로서의 신앙에 호소하는 실존적 해석과는 달리 실존주의 개념에 의존하여 신앙에 대한 과학적, 학문적 해석을 시도하는 신학이다. 출처: The Theological Method of Bultmann in Relation to Heidegger KCI_FI002451693.pdf ---------------------------------------------------------------------------------------- 해설: 내용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고 하이데거의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접근조차 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약간의 해설을 덧붙이고자 한다. 하이데거의 '나는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데카르트의 사고하는 존재나 칸트의 행위 주체로서의 존재를 비판하며, 신체를 가진 존재로서 세계 내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존재자와 관계하는 존재자로서의 의미를 다룬다. 그는 인간의 하나님 인식은 인간의 실존적 자기 이해라는 양태로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실존 구조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위해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을 기꺼이 사용했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해석을 목회자 또는 기타 매개체를 통하여 아무리 듣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스스로 자리잡혀야 한다. 그는 인간의 하나님 인식은 인간의 실존적 자기 이해라는 양태로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실존 구조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위해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을 기꺼이 사용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자기 스스로 자리잡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물을 접할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되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신체의 작동 방식을 알아내는 데에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이 도움이 된다. 그래서 불트만은 기꺼이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의 관점으로 신약성서, 특히 종말론에 관한 이해를 서술한다. 바르트는 불트만의 입장을 “신약성서 그리고 인간 실존”으로 묘사하면서, 불트만이 계시에 “그리고”를 첨가함 으로써 신학의 첫 번째 계명을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바르트는 불트만이 신약성서의 비신화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성서가 말하는 이외의 요소, 즉 실존주의라는 철학을 첨가한 것은 신학 연구자들이 지양해야 할 첫 번째 계명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자아가 초월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 존재는 이미 세계-내-존재다. 그러나 현 존재가 처해있는 세계는 과학적 우주론에서 생각되는 것과 같은 시공간적 연장이 아니다. 그 세계는 현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경험되고 구성되는 세계다. 현 존재와 세계는 어느 한 쪽이 존재론적 우선성을 갖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포함한다 인간 자아 즉, 현재의 자신은 세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 내의 존재이며 이 세계를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관계하는 경험적 세계에 국한시킨다. 또한 자신의 존재와 관계하는 상대의 존재(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를 동등시한다. 실존론적 분석에 따르면 시간성의 범주 안에서 현 존재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하나는 “처해 있음”(Befindlichkeit)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Verstehen)이다. '처해있음'이란 '내던져져 있음'이라는 말로도 표현 되는데 자기가 처해져 있는 상황에 대한 느낌을 말한다. 그리고 '이해'란 자기의 현 존재가 미래에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해를 말한다. 죽어서 천국에 가 있을거라든지 또는 지상 낙원에 있을거라든지 등의 미래에 대한 존재 가능성. 전자의 경우 우리는 본래적으로 사고하며 사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 우리는 비본래적으로 사고하며 사는 것이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견하여 육성하는 것은 선천적인 경향이고 그러한 재능과 능력을 어떤 사명감에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후천적이다. 달리 말하면 재능의 발굴에 자신을 개방시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선천적 경향의 본래적인 것이지만, 그 재능을 다른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자신이 거절하여 세상에 휩쓸려 되는 대로 사는 것은 비본래적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존재자이지 존재 자체가 아니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는 구별된다. 존재자는 사람, 사자, 돌 등과 같이 존재하는 것들이고, 존재는 존재자가 존재하게끔 하는 내적 본질이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들 중의 하나라는 존재자를 가리키게 된다. 즉 신이 피조물과 동등한 입장이 된다는 뜻이다. 태초에 존재(있음)가 천지(존재자들= 있는 것들)를 있게 한 것인데 이 존재를 우리는 신(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이지 존재자(있는 것)를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이점에 있어서 바른 이해라고 볼 수 없다. 철학은 진리를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반면, 신학은 진리를 하나님에 대한 물음으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을 이해함으로써만 우리는 참된 진리를 파악한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하는 학문이므로 현재 존재하는 것과 현상의 의미에 대한 탐구인 반면에, 신학은 존재나 현상 그리고 경험의 세계를 넘어서, 그것을 존재하게 한 신의 의미에 대한 탐구이다. 인간의 결단에 의해 본래성이 성취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게 하심에 의해 본래성이 성취된다고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과 대립된다. 인간 스스로 결심하여 노력하면 재능을 발굴하여 육성할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의 길이 있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교리와 충돌된다. 그(불트만)에게 이 세계는 닫혀 있는 인과적 체계이다. 정수가 덧셈 연산에 대해 닫혀 있다는 것은 어떤 정수끼리 덧셈 연산을 하더라도 그 결과는 정수라는 뜻이다. 이 세계가 닫혀 있다는 것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모든 결과는 자연 현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초자연적인 결과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언급되는 여러가지 기적들은 실재가 아니라, 신화라고 불트만은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초월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행동을 다른 인과적 요인들과 나란히 놓을 수 없다. 신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에서 발생되는 현상을 신의 행동으로 설명하는 것은 자연 자체의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니지는 않는다. 존재자적으로, 신앙 안에서 인간의 옛 자아는 죽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한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신앙 이후의 인간은 신앙 이전의 인간과 동일한 인간으로 남아있다. 즉 신앙을 가진 인간은 신앙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능력과 한계를 가지고 이전과 동일한 사회역사적 맥락 안에 존재한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경우, 그는 믿음 이전과 이후는 다른 존재자이지만, 여전히 동일 인간으로서의 객관성을 지닌다. 바울이 육과 영을 대조시킬 때, 그는 몸 과 영혼, 물질과 비물질을 구별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 전서 15: 50에 보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혈과 육"은 물성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이 가지는 두 가지 양태, 즉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중의 속된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발전하지 않고 속된 상태로 머문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워치타워 리더들은 이 바울의 말을 물성적인 것으로 잘못 이해하여 인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로지 영으로 부활된 144,000명 만이 하늘 정부에 참여한다는 특수한 교리를 만들었다. 바울이 말하는 육은 비본래적 실존을 의미하고, 영은 본래적 실존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하는 육은 자신을 거룩하게 발전시키지 않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를 말하며 영은 자신을 발전시켜 신의 본성에 참여한 존재를 의미한다. 불트만은 모든 종교와 신화가 초월적 세계와 관계를 갖는다고 본다. 실존의 근거와 한계로서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식이 모든 신화가 의도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와 종교 내의 신화들은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현상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뛰어 넘는 무언가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서 내의 신화적인 기록들은 초월자인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에 바탕한 것이며, 또 이 자연 현상을 뛰어 넘는 초월자의 존재와 능력을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가하자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러한 신화에서 의미는 살리되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 작업이 비신화화인 것이며,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아닌 재해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종말론은 요한 계시록이나 신약성서 다른 곳에 언급되는 종말과 관계되는 거의 모든 기술들이 신화적 이야기로 치부된다. 이러한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고 그 의미를 개인이라는 실존에 적용한 해석이다. 그러나 성서의 종말론은 우주적이고 시간적인 종말론을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개인에게 적용시킨 실존주의적 종말론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세계의 역사 종말론에 대한 해석이 없다는 점은 당연히 비판을 받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