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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하연박사의 민법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ㅎㅎㅎf-소중영
社會統合, 어떻게 할 것인가
송복(宋復)
연세대 명예교수
1. 사회통합의 전제
사회통합은 2가지 전제(前提)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는 누구를 통합의 대상으로 할 것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과 표리관계에 있는 갈등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입니다.
이에 앞서 잠시 짚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통합은 후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선진국의 사회과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회통합에 관심을 갖고 이를 실현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세기의 90년대 이후입니다. 시간적으로 극히 근래의 일입니다. 물론 학계에서는 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미국 유학을 하면서 미국 교과서에 나오는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에 주목해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실감(實感)」을 전혀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론적으로만 익혔을 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 우리와 같은 개발도상국은 사회구조적으로 사회통합을 논하거나 주창하기에는 아직 이른, 발전의 전단계(前段階)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통합은 선진국 현상입니다. 이는 다음의 사회통합이란 무엇이냐의 글에서 다시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요는 우리도 이제 사회통합을 논하고 사회통합을 강도 높게 실현해야겠다는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통합위원회」가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고 전국민이 주시하는 가운데 출발했다는 것이 그 증좌(證左)이기도 합니다.
1) 통합의 대상
사회통합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전국민입니다. 그러나 다른 선진국들을 보면 꼭 전국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 그 나라 헌법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그 헌법체계에 따라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을 사회통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선진국은 거의 예외 없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있고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헌법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헌법에 기초한 법들을 실제 행동에서 얼마든지 위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은 2부류로 나눠집니다. 한 부류는 헌법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법을 열심히 준수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헌법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지 않고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경우, 사회통합의 대상은 엄격한 의미에서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그들은 국민이 아닙니까. 그들 또한 투표권을 가진 국민입니다. 그들도 다른 국민과 꼭 같이 참여해서 대통령도 뽑고 국회의원도 뽑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통합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가 너무 다르고 행동방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보통 이들을 래디칼스(radicals)라 지칭하고, 통합의 대상보다는 교육의 대상, 법치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극단의 경우 테러리스트를 통합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면 그 수는 얼마나 될까요. 많아도 10%를 넘지 않고, 일반적으로 5%-10%사이로 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라고 뭐 특별히 다를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그 헌법에 바탕한 법률을 준수하고,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正統性)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정체성(正體性)을 수용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이룩한 건국 60년의 대성취(大成就)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통합의 대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선진국의 앞선 경험에서 보듯, 우리 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 앞의 예처럼 우리 국민도 현실적으로 2부류로 나눠져 있고, 따라서 한 부류는 통합의 대상이고, 다른 한 부류는 교육 및 법치의 대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선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처럼 그렇게 간단히 우리 국민을 나눌 수 없다는데, 우리 사회의 고민이 있고, 우리의 국가적 난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후자에 속하는 우리 국민들 수가 선진국의 그것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체감으로 느끼는 것이나 객관적 조사에서나 다 같이 20-25%에 이릅니다. 이는 전국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입니다. 심지어 전직 대통령 중에는 「그 놈의 헌법」이라는 말을 여사로 하고, 대한민국은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나라」, 「부정하고 부패한 사람들이 만든 나라」,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부정해버리는 분도 있었습니다. 「정당하지 않은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했습니다.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국회의원들 중에서도 그 같은 인식을 갖고 그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진국에선 짝을 찾기 어려운 그 같은 고위직 종사자들, 그것도 적잖은 수의 사람들을 교육의 대상 법치의 대상으로 돌려서, 사회통합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데 사회통합위원회의 딜레마가 있고, 사회통합위원회가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난관(難關)이 있다 하겠습니다.
2) 통합과 갈등(葛藤)
갈등은 싸움하는 것을 말합니다. 글자상으로 칡(葛)이나 등(藤)나무의 덩굴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는 개인이나 집단의 의지 견해 또는 이해관계가 덩굴처럼 서로 반대로 얽혀 상충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 갈등하면 으레 알력 반목 시비 분규 투쟁 반란 그리고 더 나아가 전쟁을 지칭합니다. 갈등은 원래 불교 용어입니다. 덩굴처럼 마음에 얽힌 번뇌, 또는 법문(法門)에서 일어나는 번거로운 분규를 뜻했습니다.
어느 사회든 갈등은 있습니다. 특히 현대사회는 갈등이 상존하는 사회입니다. 상존할 뿐 아니라 그 강도(强度) 또한 대단히 높습니다. 이에 비해 전통사회(혹은 농업사회)는 갈등의 정도가 대단히 낮습니다. 이유는 전통사회 자체가 「같음(sameness)」을 기반으로 한 화해구조(和解構造)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사회는 개인적 의견이나 주장, 사회적 요구나 기대, 그리고 이해관계 등이 모두 비슷비슷합니다. 차이가 있다 해도 결정적 차이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따라서 기껏해야 양반 상놈의 신분갈등이고, 크다면 종교갈등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혹은 산업사회)는 구조의 본질이 다릅니다. 철저히 「다름(difference)」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태생부터 갈등구조(葛藤構造)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들이 내거는 거의 모든 것은 서로 상반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해관계는 충돌할 수밖에 없도록 첨예한 상반성을 지닙니다. 따라서 현대사회는 그 발전의 정도가 높을수록 갈등의 가짓수도 많고 갈등의 빈도도 잦습니다. 계급갈등 노사갈등 지역갈등에 이념·종교·인종·세대갈등 등 7개 갈등이 어느 사회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다행히 가장 날카로운 종교 인종갈등은 없고 있어도 아주 낮습니다. 세대갈등도 사회문제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회통합을 강구할 때, 이 갈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시각으로 갈등을 이해하고,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관리할 것인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더 단순화시켜서 갈등을 부정적으로 보고 거부할 것이냐, 아니면 긍정적으로 보고 수용할 것이냐 입니다. 전자의 경우, 갈등을 병리현상(病理現像)으로 보는 것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갈등을 정상현상(定常現像)으로 보는 것입니다. 병리현상은 갈등을 사회분열 사회혼란, 심지어 사회해체(解體)의 주요인으로 보고, 병자를 치유하듯 사회적으로 이 갈등을 고쳐 나가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반대로 갈등을 정상현상으로 보는 시각은 언제 어디서나 있는 이 갈등의 상존성(常存性)과 유비쿼터스한 성향이 오히려 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어 갈등 없는 사회보다 훨씬 역동적으로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주요인으로 이 갈등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만들어진 이 사회활성화 요소를 잘만 관리하면 사회에 엄청난 이익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사회통합의 대전제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시각이며 사고입니다. 갈등을 병리현상이 아니라 정상현상으로 볼 때, 사회통합이 보다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상현상은 글자 그대로 일정하게 늘 한결같이 있는(定常)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정상현상은 어느 누구나 소지하고 있는 체질(體質, temperament)이며, 어느 사회나 내포하고 있는 기질(氣質, disposition)입니다. 병이라면 마땅히 고쳐야 하지만, 체질이나 기질은 거기에 적응하고 순응해야 합니다. 적응하고 순응하면서 자기 체온의 높낮이 자기 격정의 강약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입니다.
그렇다면 사회통합에서 갈등은 적응과 순응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조절의 대상입니다. 조절은 병을 완전히 치유하거나 병균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높아진 수위를 알맞게 맞춘다는 개념입니다. 계급갈등은 물론, 지역갈등 노사갈등 이념갈등 등의 갈등 수위나 갈등의 강도가 너무 높을 경우, 그것을 낮추도록 조절하는 것입니다. 갈등 자체를 제거(除去)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한도 일정 범위내로 제한(制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갈등관리(conflict management)입니다. 사회통합의 과정은 마치 둑을 넘지 못하도록 홍수를 다스리듯 갈등수위 갈등강도를 조절하는 갈등관리 그 자체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2. 사회통합의 의미
1)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
통합(統合)은 여기선 그냥 통합이 아니고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입니다. 이 통합은 우리가 늘상 쓰는 통일(統一, unification(or unity))과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다른 의미」라기 보다 「정반대의 의미」라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통일은 원래 하나인 것, 같은 것이 나누어지고(分離, separation) 쪼개어졌다(分裂, disruption)가 다시 원래대로 하나 혹은 같은 단위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나눠지거나 쪼개지는 것과 관계 없이 하나가 다른 하나 혹은 다른 여러 개와 합쳐서 새로운 하나, 혹은 더 커진 하나가 되는 것도 통일입니다. 어쨌든 통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남북통일과 같이 그 핵심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되는 순간 나누어지고 쪼개어진 부분들은 모두 없어지는 것입니다. 없어진다는 것은 그 부분들의 특색 그 부분들의 정체성이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2) 통합은 「여러 개」가 되는 것
그러나 통합은 다릅니다. 나누어졌든 쪼개어졌든, 나누어지고 쪼개어진 그 부분들이 나눠지고 쪼개어진 그 상태로 각기 하나의 주체(主體)가 되고, 그 주체가 다른 주체와 상호작용해서 「하나의 응집된 전체(a cohesive whole)」를 이루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인데, 안을 들여다보면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parts)이 제각기 다른 모양 다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의 경우와 정반대로 각 부분들이 모두 자기의 특색과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색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바로 각 부분들이 모두 오롯한 주체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또 각 부분들이 전체 안에 있으면서 제각기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르게 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자기 기능을 발휘하면서 자기가 설정한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통일의 경우처럼 나눠지고 쪼개지는 것, 즉 분리되고 분열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각 부분들이 주체가 되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기하는 것이고, 이러한 자기 이익 극대화 추구는 바로 전체를 갈갈이 찢어놓는 것 아니냐는 추궁이 얼마든 있을 수 있습니다. 작년의 금융위기도 모두 자기 이익의 극대화 자기 탐욕의 무한정성에서 왔다면, 각 부분들의 이기적 행동은 사회분열을 넘어 사회해체까지 초래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2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3) 통합의 핵심(1), 의존과 협동
첫째로 각 부분들이 각기 독립된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 해도 다른 부분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 부분들은 자동차 엔진의 부품들처럼 어느 것 하나 분리해 존재하지 않고 모두 다른 것과 서로 다르면서 완전히 의존해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독자적이 아닌 것이 없으면서 어느 하나도 홀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히 다른 부분에 의존해 있습니다. 그처럼 현대사회의 모든 부분은 「독립적」이면서 「의존적」입니다. 따라서 다른 부분이 살아야 나도 살고, 다른 부분이 원활히 기능하고 작동해야 나도 그 기능 그 작동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한 부분이 무너지면, 다른 말로 한 부분의 작동이 불능상태에 들어가면, 다른 부분의 작동도 불능상태가 됩니다. 그 불능상태는 도미노 현상을 초래합니다. 하나의 무너짐이 와르르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른 부분과의 「협동」을 절대적으로 요구합니다. 현대사회에서 「협동」은 절체절명입니다. 다른 부분에의 의존은 다른 부분과의 협동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통일에서 분리(分離)가 이 통합의 장(場)에서는 분화(分化, differentiation)가 되는 것입니다. 분리는 나누어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지만, 분화는 나눠지면서(分) 서로 되는 것(化)입니다. 나누어지면서 서로 목적을 달성하는 주체가 되도록 서로 만들고 서로 협동하는 것입니다.
4) 통합의 핵심(2), 자율과 경쟁
둘째로 각 부분들이 다른 부분들에 의존하고 협동하면서도, 다른 부분에 대해 철저히 자율(自律)을 고수하고, 동시에 치열히 경쟁을 벌인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가 경쟁사회인 것은 이 부분들의 치열한 경쟁에 기인합니다. 각 부분들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뜁니다. 그야말로 총력전을 벌입니다. 이 총력전에서 이기려면 자기 능력을 극대화하고 조직기능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자기 능력은 자기가 키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협조도 필요하지만 주체는 자기입니다. 조직기능의 효율성 제고(提高)도 다른 부분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다른 부분의 통제 다른 사람의 간섭은 효율을 떨어트립니다. 그래서 경쟁에는 자율이라는 것이 필수적으로 수반됩니다.
그렇다면 사회통합은 이 각 부분들의 의존과 자율, 협동과 경쟁의 차원에서 다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면 사회통합은 각 부분들이 서로 의존하면서 자율하고, 서로 협동하면서 경쟁을 치열히 벌이는, 이 사회과정(social process)을 떠나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같은 사회과정이 현대사회의 특징입니다. 그 특징들을 그대로 유지함과 아울러, 그 이상으로 이 특징들을 활성화시키면서 각 부분들의 기능을 전사회적 수준에서 통합하는 것, 그것이 이른바 사회통합입니다.
이러한 특징들을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의존과 자율은 분명 반대행위입니다. 의존하면 자율이 떨어지고 자율하면 의존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 관점이고 실제로는 이 2개는 결합되어 있습니다. 협동과 경쟁 역시 반대행위입니다. 그러면서 2개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 반대되는 것의 결합이 개인의 힘 조직의 힘을 지수상승적으로(exponentially) 키워 놓습니다. 마치 세포나 핵이 갈라져서 증식(增殖)되듯이 개인이나 조직의 힘도 그렇게 증폭(增幅)됩니다. 이를 분식(分殖, proliferation)이라 합니다. 통일에서 분열은 통합에서는 이같이 분식이 됩니다. 이것은 전통사회 농업사회에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5) 원융무애(圓融無碍)
요약하면 사회통합의 핵심은 각 부분들의 ①주체성, 각 부분들간의 ②의존성과 ③협동성, 그리고 각 부분들간의 ④자율성과 ⑤경쟁성, 이 5가지입니다. 이 5개는 사회통합의 요체며 키워드입니다. 이 5개의 한데 묶음이 사회통합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원융무애圓融無碍입니다. 원융무애는 모든 이치가 하나로 통하고 하나로 통합해서(圓融) 막힘이 없는 상태 거리낌이 없는 상태(無碍)를 말하는 불교용어입니다. 이를 사회과학으로 전화해서 보면, 이는 밥알을 세워(無碍) 떡을 만드는 상태(圓融)를 말합니다. 자연합리적으로는 밥알을 뭉개어야 떡이 됩니다. 밥알을 한데 뭉개어서 떡을 만드는 것이 통일입니다. 통합은 밥알을 세워 그 밥알을 오롯이 살려둔 체로 떡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회통합은 밥알을 세우고 밥알을 살려두듯이 사회내 각 부분들을 생생한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밥알로 떡을 만들듯이 자기 기능과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기하는 이 주체들을 함께 묶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통합을 성취해도 사회적 위기는 언제나 되풀이 됩니다. 그 치명적 요인은 앞서 말한 부분간 동시 와해의 도미노 현상과 갈등증폭입니다. 현대사회는 부분간 구조적 의존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고, 부분들간 치열한 경쟁의 역동성(dynamism)을 사상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 경쟁의 역동성과 치열성이 몰고 오는 갈등증폭을 현대사회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커질수록 사회통합을 절규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통합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질수록 사회갈등을 키우는 구조도 활성화합니다. 그래서 통합과 갈등은 둘이 아니오 하나입니다.
3. 사회통합의 실현
앞서 말한 대로 사회통합을 아무리 성공적으로 실현해도, 사회갈등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성공 때문에 사회내 각 부분들의 주체성과 기능 효율성이 강화되어 갈등구조도 그만큼 활성화합니다. 따라서 사회통합은 갈등의 강도를 완화하고 갈등의 수위를 낮추는 갈등조절기능 이상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 갈등조절기능으로서의 사회통합을 다음 3가지 면에서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가 법치(法治)라면, 다음은 국민향상(업그레이드)이고 그리고 지도층 제몫하기 입니다.
1) 법치(法治)
자유민주주의의 근간(根幹)은 법치입니다. 근간은 뿌리며 줄기입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누구나 주장하듯이 민주주의가 실제로 이뤄지고 있나 있지 않나의 기준은 자유와 인권과 법치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가장 결정적인 것이 이 법치입니다. 법치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 있지 않는가를 따져 그 나라 민주주의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법치가 제대로 되고 있는 나라, 법치주의 원칙이 작동되는 나라치고 자유와 인권이 꽃피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반면 자유와 인권은 있는데 법치가 되지 않고 있는 나라는 많습니다. 우리도 그들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우리의 자유와 인권은 지난 세기의 80년대 마지막, 90년대 초반에 이미 지금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 법치수준은 후퇴했습니다. 정치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말하는 것은, 실은 이 법치의 후퇴입니다. 지금 국회의 파행도 이 법치의 후퇴며 파괴입니다. 우리가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하는 것도 이 법치의 상실을 뜻합니다. 1995년 국민소득 1만 달러 수준에 이른 이후 내내 그 수준에 있는 것도 물론 큰 이유이지만, 그보다는 법치의 후퇴와 파괴를 의미하는 「법치상실」이 더 큽니다.
왜 법치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법치는 사회내 제반 갈등의 강도를 낮추고 제반 갈등의 수위를 조절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법치는 사회통합의 수준을 보다 높이고 보다 공고히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물론 법치 외 다른 방법들도 있지만,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이 법치만큼 유효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 법치처럼 계속성을 지닐 수가 없습니다. 계급간 노사간 지역간 대표들이 모여서 그들 갈등의 수위를 조절한다 해도 법치처럼 그렇게 지속될 수 없고, 법치만큼 그렇게 명백한 잣대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법치가 이같이 사회통합과 갈등조절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은 2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하나는 행위예측(行爲豫測)입니다. 행위예측은 미래가 뻔히 보인다는 말입니다. 계산이 명백히 된다는 의미입니다. 법치가 되면 그렇게 내일이 보이고, 그 내일이 계산이 됩니다. 예컨대 어떤 사업이 희망이 있고, 그 사업에 투자하면 장래는 어떻게 되고, 관리는 어느 부서의 사람들을 만나고, 행정비용은 얼마나 들고, 시일은 얼마나 걸리고, 마침내 결과는 어떻게 된다는 예측이 이 법치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법치가 잘되는 나라치고 기업이 꽃피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노사관계든, 회사내 윗사람 아랫사람 관계든, 제반 관계가 격렬한 갈등관계로 번져가는 나라가 없습니다.
둘째는 저비용구조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법치가 되지 않으면 거래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일만 하려 하면 돈이 요구되는 사회, 그것도 앞거래보다는 뒷거래가 더 성행하는 사회, 공식관계보다는 비공식관계에 돈을 쏟아서 부어야 하는 사회. 이런 사회는 모두 법치가 상실되어서 만들어진 고비용구조 사회입니다. 고비용구조 사회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던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듯 돈을 들여야 돌아가는 사회, 그것도 자판기와는 전혀 달리 쓸 필요도 써서도 안 되는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되도록 높은 비용이 구조화 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가 갈등이 첨예하고 사회통합이 깨지는 것은 불을 보듯 번연합니다.
다른 사회 아닌 바로 우리 사회가 법치가 안돼서 만들어진 고비용구조 사회입니다. 떼법이 너무 무성하고, 그 무성한 떼법이 지난 10년 내내 실정법보다 우위를 점유했습니다. 무슨 사건만 터지면 으레 법치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범국민대책위」가 만들어지는 것도 이제 일상화(日常化)된 사실입니다. 지난 용산참사도 시위자 잘못으로 사망자가 나왔다는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법을 어긴 사람들에겐 7억원을, 법을 시행한 경찰관에게는 1억 3천 2백만원을 보상하는, 법치국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고비용 거래가 만들어졌습니다. 지난해 한 사회조사에서 「법을 지키면 손해」라는 응답자가 무려 72.7%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법치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내는 자료입니다.
법치의 주체는 정부입니다. 정부가 법 위반자를 감시하고 색출해서 처벌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정부의 임무이고 책무입니다. 국민이 그 많은 돈을 내서 정부를 존립시키는 정부 존재이유기도 합니다. 그런 정부가 그 존재이유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포퓰리즘도 아니고 직무유기입니다. 정부의 이 직무유기가 스스로 사회통합을 무너뜨리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부가 주도해서 「사회통합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왕 만들었으니, 사회통합위원회는 다른 위원회들과 꼭 같은 시위소찬(尸位素餐)의 위원회가 되지 말고, 국민보다 오히려 갈등을 더 높이고 통합을 더 깨트리는 정부행위를 감시하고 감독하는 위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국민 업그레이드
국민 업그레이드(upgrade)는 국민수준향상입니다. 우리 국민의 수준은 OECD 국가들 중에서 최하위라 할 수 있습니다. OECD 국가들 중에서 교육수준이 높기로는 우리보다 더한 나라가 없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3%가 대학을 가는 나라입니다. 그 수치는 일본 독일의 두배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설학원에 애들을 보내는 나라도 우리입니다. 집에서도 TV를 못 보게 하고 밤공부를 시키는 나라입니다. 이런 교육의 나라에서 어째서 국민수준을 최하위라고 말합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외국인 뿐이 아니라, 우리가 바깥으로 나가서 보아도 우리나라 국민보다 예의바르지 않은 국민은 드뭅니다. 우리나라를 살아 본 외국학자들 중에서 한국사람의 인격을 「미성숙 인격자(rudimentary personality)」로 표현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당장 거리에 나가서 불특정 다수들을 만나 보십시오. 버스안도 지하철 내도 좋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불친절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무례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성 잘 내고,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고함 잘 지르고,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남 배려하지 않는 국민이 OECD 국가들 중 어느 나라에 있습니까. 그것도 우리나라 안에서는 가장 교양인이 많다는 서울 사람이 그러합니다.
더 부끄러운 것은 우리나라가 세계 제1의 소송공화국이라는 것입니다. 2008년 한해 우리 법원이 처리한 민사사건만 해도 128만 4천 430건이나 됩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같은 기간에 77만 3천건이었습니다. 일본인구가 우리의 2.6배라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대비 소송건수는 우리가 일본의 4배가 넘습니다. 뿐이 아닙니다. 고소·고발사건은 인구비례당 일본의 백배가 넘습니다. 이 역시 우리의 「인격적 미성숙」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너무 거칠고, 너무 남의 사정 모르고, 양보심 없고, 타협할 줄 모르는 그 인격적 미성숙 때문입니다. 그 인격적 미성숙이 각자의 생활세계로 들어 와서는 남과 충돌하고, 시비 알력 반목 갈등을 수 없이 야기합니다. 미시적 세계에서 사회통합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교육수준이 세계 최고 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수준이 이같이 최하위라면, 이는 무엇으로 해결해야 합니까, 무엇으로 국민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서비스업의 제고(提高), 서비스업의 업그레이드(upgrade)라고 생각합니다. 서비스업의 업그레이드가 국민을 업그레이드 시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제조업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제조업의 룰 오브 게임(rule of game)은 효율과 통제입니다. 제품의 효율적 생산과 조직의 체계적 관리가 제조업의 경쟁력입니다. 그 룰 오브 게임으로 조직성원, 더 크게는 전국민이 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룰 오브 게임은 경쟁력은 높여도 국민수준은 업그레이드 시키지 못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제조업으로는 국민을 교양인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거친(wild) 사람들을 성숙된 인격자로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비스업은 다릅니다. 서비스업의 룰 오브 게임은 창의와 혁신입니다. 굉장한 상상력이 요구되고, 깊은 사유의 노력이 있어야 하고, 자기 내면세계로의 침잠습관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 모두 인격적 수련 과정이고 인간 이해의 훈련 과정입니다. 특히 남을 생각하고 존중하는 사고하기와 행위유형 만들기와 생활양식 바꾸기 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창의와 혁신을 할 수 없고, 경쟁력을 유발하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없습니다. 교육 의료 금융 관광 법률 미디어 통신 패션디자인 등의 7개 서비스업이 모두 그러합니다. 서비스업은 업그레이드되는 것만큼 고급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투자액수를 늘리는 것만큼 제조업 대비 2배 이상의 고용도 창출합니다.
서비스 업은 그야말로 거대한 블루 오션입니다. 제조업도 중국의 싼 노동력 때문에 한계에 다달아가고, 수출도 일본 독일의 예에서 보듯 한계가 눈에 보입니다. 오직 서비스업만이 우리의 미래를 기약해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서비스업 종사자 수는 전종사자 수의 57%에 불과합니다. 다른 선진국의 67%이상에 비하면 까마득히 떨어집니다. 만일 우리가 선진국의 그 67%이상 수준에 이른다면 고용은 지금보다 250만명 이상이 늘어날 것입니다. 서비스업에 고용이 그 같은 수치로 늘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고용증대 이상의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파천황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우리 국민수준이 향상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국민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고, 아무리 경제력이 커져도 소위 국격(國格)이라고 말하는 나라의 품격이 개선되지 않고, 아무리 수출이 늘어 무역흑자가 일본을 앞질러도 국가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민수준은 교육수준이 아니라 직업수준이 결정합니다. 국가의 품격도, 그 국가의 브랜드 가치도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그 나라의 직업적 수준에 좌우됩니다. 이 높은 직업적 수준 고급 일자리, 그것은 나라가 발전할수록 대부분이 서비스업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서비스업이 국민수준도 국가 품격도 국가 브랜드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서비스업의 업그레이드가 바로 국민의 업그레이드입니다. 서비스업을 업그레이드 시켜 고급 일자리를 만들지 않는 한, 국민은 업그레이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서비스업의 업그레이드, 따라서 국민의 업그레이드, 그것을 누가 막고 있습니까. 바로 정부가 막고 있습니다. 정부가 서비스업 업그레이드의 최고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비스업은 관치가 들어가면 그 순간 곧 경쟁력을 상실합니다. 서비스업 발전의 철칙은 오직 하나, 「최고를 더 최고로」입니다. 최고는 최고에서 머무는 순간, 최고에서 떨어집니다. 최고에서 머무는 순간 경쟁력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최고를 더 최고로」입니다. 이 「최고가 더 최고」가 될 때 최저도 최저에서 탈출합니다. 그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최고를 더 최고로」에 제동을 겁니다. 이유는 국민 위화감 조성입니다. 국민 위화감이라는 말만 들어도 역대 정부는 모두 알레르기 반응을 했습니다. 그래서 포퓰리즘으로 나갔습니다. 최고의 포퓰리즘은 최고의 발목을 당겨 중간으로 떨어트리고 최저의 목을 치켜 올려 중간으로 앉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중간에 가면 위화감은 없어진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화감은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고, 갈등이 커지면 사회통합은 깨어지는 것이고, 그러면 정부가 인기가 없어진다, 위태로워진다는 사고에 습관화된 결과입니다.
여기에 사회통합위원회의 과제가 있습니다. 그 과제는 사회통합위원회는 이제부터 다른 철학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철학은 「적불균형(適不均衡) 철학」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균형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정부도 오직 균형을 강조합니다. 심지어는 균형에 벗어난 것, 균형에 위배되는 것을 악으로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큰 잘못입니다. 원천적으로 잘못된 사고입니다. 그것은 불균형이 항상태(恒常態)이기 때문입니다. 항상태는 변하지 않는 모습(constant state)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가도,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모습. 그것이 항상태이고, 그 항상태의 프로토타입(prototype)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불균형이라는 것입니다.
불균형이 아무리 위화감을 조성해도 인간은 이 불균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유기체도 내부를 들여다보면 불균형이고, 우주의 별도 그 배치를 보면 모두 불균형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균형은 자연이든 인체든 그리고 인간사회든 지나친 불균형은 거부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적절한 불균형—「적불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절한 균형」이 아니라, 적절한 불균형의 추구, 그것이 항상태이고 그것이 프로토타입이라면,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것이 순리라면 「적불균형」철학은 오히려 위화감을 낮추고 갈등을 완화하고 사회통합을 증대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회통합위원회는 이 「적불균형」철학으로 정부의 포퓰리즘을 막아서 서비스업을 업그레이드 하고, 그리고 국민을 업그레이드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 사회통합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3) 지도층 제몫하기
사회통합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도층의 제몫하기 입니다. 일반국민도 물론 제몫하기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회 내 갈등을 줄이고 사회성원들간 통합을 증대시키는 데는 일반국민의 그것보다 지도층의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이를 다음 3개로 나눠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설명에 앞서 먼저 누구를 지도층이라고 하느냐를 정의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 없이 지도층은 엘리트층이고 상층입니다. 이 엘리트층 상층으로서의 지도층은 크게 2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대기업가층이고, 다른 하나는 고위직층입니다. 대기업가층은 우리의 경우 종업원 300명 이상을 거느린 기업의 회장과, 사장 부사장 전무 이사 등의 전문경영인들입니다. 고위직층은 위세고위직층(powerful highs)과 위신고위직층(prestigeous highs)으로 구성됩니다. 위세(威勢)고위직층은 고위정치인 고위관료(금융인 포함) 고위군경찰 고위법조인이고, 위신(威信)고위직층은 고위교육자 고위언론인 고위의료인 그리고 저명인사층(종교 문화 예술 체육 등)입니다. 이 수는 어느 나라 없이 그 가족까지 포함해서 그 나라 인구의 대략 2%정도입니다.
(1) 지도층 「싸움 안하기」
제목부터 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한마디로 끊어, 우리 지도층처럼 싸움 많이 하는 지도층은 없습니다. OECD 국가 어느 나라를 둘러 봐도, 우리처럼 그렇게 지도층이 분열되어 「죽기 살기」로 싸우는 나라가 없습니다. 기막힌 지도층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도 이 지도층의 싸움이 자초했다 볼 수 있습니다. 요사이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만, 당시에는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억압하는 방법 외에는 그 지도층의 싸움을 정지시킬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지도층의 싸움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도 내내 그러했습니다. 사실 조선조 500년은 지도층 싸움의 역사입니다. 지도층 분열 지도층 쟁투 지도층 유혈로 물들어 있습니다. 성균관 문묘에 배향配享되는 조선조 유학자 18현 중 싸움으로 사약을 받거나 유배되지 않은 유학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학문하는 유학자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사약을 받을 정도로, 아니면 유배를 갈 정도로 싸웁니까.
율곡(栗谷)의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학문하는 선비나 사대부 벼슬아치들이 입만 열면 그 논의가 너무 날카롭고(論議太銳) 손씀이 너무 급격해서(急激下手), 만나기만하면 집더미가 완전히 무너지고 기왓장이 와장창 깨지도록 싸운다(土崩瓦解)」는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 지도층과 무엇이 다릅니까. 요사이는 집더미 기왓장이 없으니까, 해머를 들고 싸우고 전기톱을 들고 싸우지 않습니까.
서구 지도층의 특징은 「싸움하지 않는 전통」입니다. 그들 가슴에 깊이 내재화(內在化)되어 있는 지침은 「경쟁은 하되 대결은 않는다(competition but no confrontation)」입니다. 경쟁은 서로의 장점 서로의 장기로 일정 룰 위에서 겨루는 것입니다. 그 경쟁에는 반드시 룰이 있어서 그 룰을 위배하면 패자가 됩니다. 그 룰 위에서 서로의 강점을 겨루는 것만큼 발전합니다. 룰 위에서의 경쟁은 갈등이 아니라 통합의 원천이고 바탕입니다. 반대로 대결(對決)은 죽기 살기로 싸움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내가 이기고 상대방이 지는 것만 노려서, 룰이 없습니다. 룰 없는 싸움은 이기든 지든 패자가 됩니다.
지도층의 싸움은 일반 국민들의 싸움과는 차원이 다르고, 강도(强度)가 다르고, 결과가 다릅니다. 갈등의 첨예함과, 사회분열 사회해체에 미치는 정도가 일반국민의 그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일반국민 수준에서의 계급간 노사간 지역간 혹은 이념간 갈등은 거기에 지도층만 개입되지 않으면 쉽게 조정되고 온건하게 끝이 납니다. 그들끼리의 싸움은 토끼와 토끼의 싸움이나 다름없습니다. 기껏해야 귀 찢어지고 코피 나는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투표권 외에 싸울 힘이 없습니다. 권력도 없고 재력도 약합니다. 없는 힘으로 아무리 싸워보아야 그 마당이 그 마당입니다.
그러나 지도층은 다릅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 재산의 힘 뿐 아니라 수하를 동원하는 힘, 심지어는 국민을 동원하는 힘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지도층이 싸우는 것은 마치 사자와 사자, 호랑이와 호랑이가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두 맹수가 대결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겨도 치명상을 입습니다. 귀 찢어지고 코 부러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겨도 죽고, 물론 져도 죽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두의 자멸입니다. 현명한 인간들이 왜 자멸합니까. 그래서 서구 상층 서구 지도층은 우리 상층 지도층처럼 단명이 아니라 장수합니다. 그래서 또 국민들에게 늘상 존경을 받습니다. 「싸움안하기 지도층」—이것은 사회통합위원회가 얼마든지 강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층 「싸움 안하기」가 바로 사회갈등의 수위를 쑥 낮추는 것이고, 사회통합의 정도를 쑥 올리는 최선의 길입니다.
(2) 지도층 도간(道間) 결혼하기
우리나라 갈등 중 가장 심각한 갈등은 계급 노사 이념갈등이 아니라 지역갈등입니다. 다른 갈등은 역사가 짧은데 반해 지역갈등은 역사가 긴 묵은 갈등입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정부와 지식인이 다같이 머리를 짜내서 내놓은 방안이 지역균형발전입니다. 지난 세기의 60년대 70년대 혹은 80년대와 달리, 지금 지역간 균형발전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전국 어디를 가도 머무르고 싶은 곳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갈등의 정도는 그대로 입니다. 심지어는 대통령도 당선시켜 대통령 권력도 가져 보았고, 정부요직도 두루 앉혀 정부권력도 공유해 보았습니다. 지역균형이든 권력균형이든 다 취해 보았지만 여전히 별무 효과입니다. 사회통합위원회에 지역분과위가 우뚝해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지역균형발전을 하든 권력균형소유를 하든, 이는 모두 외형적인 것입니다. 그 외형적인 것이 내면세계의 불만을 해소 시킬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작고한 경제학자 사뮤엘슨의 행복공식은 행복 = 욕망분의 소비입니다. 행복은 욕망이 작든 소비가 크든 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역균형발전을 하면 발전된 그만큼 욕구도 커집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만큼 욕구가 확대됩니다. 발전은 욕구를 확대하고, 소유는 욕구를 증대시킵니다. 반대로 발전하지 않거나 소유하지 못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커집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는 것만큼 지역갈등도 날카로와집니다. 따라서 그런 외형적 방법들은 지역갈등 해소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입니다.
하지만 해소 방법은 있습니다. 도간(道間) 결혼이 가장 유용한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그것도 일반 국민이 아니고 지도층들의 도를 넘어선 결혼입니다. 사회학에서 지역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는 지역간 호오도(好惡度) 조사를 할 때 꼭 쓰는 변수가 3개가 있습니다. 어느 지역 사람과 ①혼인하고 싶은가 ②친구하고 싶은가 ③사업하고 싶은가 입니다. 이 세개가 다 지역갈등 해소의 기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그 중에서도 도를 넘어선 혼인입니다. 그것은 통혼권(通婚圈)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이 도(道)를 넘는 통혼권 확대는 2가지 점에서 유익합니다. 첫째로 지역간 거리감을 없앱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도내(道內) 결혼만 해서 다른 지역에 대한 거리감이 너무 큽니다. 거기다가 풍속 관습의 생소감까지 갖고 있습니다. 지도층의 도간 결혼은 일반국민의 그것보다 이 거리감 생소감을 줄이는데 적어도 백배 이상의 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우수한 2세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수백년을 도간 결혼만 해서 사실 근친결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너무 혈통순도(純度)가 높은 단일민족이 우리입니다. 거기다가 좁고 좁은 지역내 결혼만 해서 모두가 근친상간 결혼을 하고 있습니다. 우수한 2세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근친상간 결혼을 깨트리고 지역간 화합을 가져오는 도간 결혼 — 자기 지역을 넘어서는 결혼은 지도층이 먼저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도층 지위의 장수 비결입니다. 벼락부자(new rich) 벼락감투(new high)와 같은 당대(當代)상층․당대지도층이 아니고 역사와 전통을 가진 누대(累代)상층․누대지도층이 되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이는 사회통합위원회가 나서 얼마든지 장려해 볼 지역갈등의 좋은 해소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3) 지도층 소통그룹 만들기
소통(疏通)은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 소통입니다. 우리 사회 지도층간 치열한 싸움도 사실은 소통이 안돼서 하는 싸움입니다. 인간은 소통의 동물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이 소통 때문입니다. 소통은 지식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소통합니다. 정보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소통합니다. 이른바 삶의 가치를 소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통에 우리 지도층은 너무 인색합니다. 우리 지도층은 그들끼리만 소통합니다. 자기와 같은 유(類)의 사람,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 혹은 당파를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만 소통합니다.
물론 그런 소통도 중요하지만, 자기와 전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 사상을 달리하고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 정파를 달리하고 정책을 달리하는 사람들간 소통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사회통합을 증대시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과의 소통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과의 소통은 이미 통합되어 있는 사람들간의 소통이기 때문에 사회통합에는 크게 기여하는 바가 못됩니다.
지금 우리 지도층의 소통행태는 조선시대의 소통행태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선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 글을 달리하는 사람, 이론과 선생을 달리하는 사람을 조선시대는 모두 적으로 몰았습니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말은 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의 글은 진리(여기서는 朱子學)를 어지럽히는 적이라 생각하고, 이런 사람은 반드시 쳐서 없애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당동벌이(党同伐異)입니다. 나와 주장을 같이 하는 사람끼리 같은 당 같은 패를 만들고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을 죄 있는 사람으로 몰아 베어 없앤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그 악습이 우리 지도층간에 있습니다.
이것을 없애는 방법은 2가지입니다. 이 둘 다 사회통합위원회에서 얼마든지 시도하고 시행해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는 언어를 부드럽게 쓰는 것입니다. 다른 지도층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서 칭찬하고 덕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언어 자체가 너무 날카롭습니다. 「우리 언어는 어휘수도 적은데다 너무 날카로워서 시인이 시 작업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말은 유명한 영문학자 이양하 선생의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도 소통이 되지 않는데 쓰는 어휘까지 날카로우면 소통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립니다. 지도층 말 부드럽게 쓰기—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갈등강도를 낮추고 사회통합을 강화시키는 첫 시작이며 첫걸음 입니다.
다음 하나는 실제로 소통그룹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회통합위원회 32명이 각기 20명의 소통그룹(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과 달리하는 사람들의 구성체)을 만들면 모두 640명이 소통그룹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그 640명이 또 20명씩 소통그룹을 만들면 12,800명이 참여하고, 그리고 12,800명이 똑같이 소통그룹을 만들면 25만명 이상이 소통그룹 참여자가 됩니다. 이 25만명은 우리 전국민의 5%에 해당하는 수입니다. 우리나라 지도층이 모두 소통그룹에 참여해서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고 정책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정보를 소통하고 지식을 소통하고 마음을 소통하고 생활가치를 소통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야말로 엄청난 소통그룹이 될 것입니다.
이 소통그룹이야말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 creative minority가 됩니다. 「충성스럽고도 희생적이며 사회적 통합이 잘 되어 있는 지도층」—이 지도층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고, 절대로 쇠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창조적 지도층 소통집단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회통합위원회의 역사적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우리 사피자들도 위 국민대통합의 원리를 읽고 소수 집단 사피자끼리 대통합이라도 됐으면 좋겠어요
위 논문은 우리 회원들이 여러 차례읽고 회원사고를 성숙시키는 계기다 됐으면 합니다.
저도 여러번 읽고 퍼 왔는데 현실을 직시한 혜안의 글입니다.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님 건강요. 제가 "펌" 해갑니다.
구구절절 가슴을 파고드는 현실을 직시한 좋은 글이네요. 동의 합니다. 고건씨가 이 글을 정독하고 실행하여야 하느데요.
이글의 출처는 사회통합위원회 1차회의 주제 발표문입니다. 감사합니다.
구수회 회장님 오늘 11시 공판의 공격과 방어에 전심전력 하여 완전무결한 임전태세가 필요합니다. 죄명이 물면 물리는 이현령 비현령이라서, 방청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