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2916 송설 동기생 여러분께 저는 경기도 화성 동탄 작은 아들 집에 살고 있는 송건수입니다. 제가 사는 집은 30층 아파트 꼭대기여서, 저 멀리 김천 가는 경부선 기차도 보이고 천안 가는 전철도 보이고 그리 크진 않지만 강물도 들판도 보이는 등 내려다보는 경치가 속 이 다 시원한데, 저 멀리 지평선으로 해가 넘어갈 때마다 서쪽 하늘을 도화지로 하여 하 늘이 그려 내는 너무도 아름다운 저녁노을 그림을 매일 바라보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3년 전 내시경 결과로는 위암 말기로 판명되어 죽은 목숨이었는데도, 막상 수 술을 해보니 초기로 진단이 나와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며, 이 일은 나에게는 하느님의 지극한 은총 이외에는 뭐라고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평소에도 저를 걱정해주시고 사랑해 주시던 우리 많은 송설 형제님들이 저의 와병 소식을 듣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신림동 집으로, 먼 동탄까지 찾아오셔서 기도 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걱정해 주신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위암에 좋은 식품과 약재도 구해주시고 밤낮으로 기도해 주시며 저를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새벽기도까지 다녔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을 때 저는 ‘나는 친구를 위해 언제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 나 울어본 적이 있는가? 보잘 것 없는 내가 우리 친구들에게 너무도 큰 빚을 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굳은 의지로 암과 싸워 건강한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만이 여러분의 걱정에 보답하는 길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하고 열심히 배전의 노력을 다짐해 봅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홈페이지에 이글을 싣기로 마음을 정하고 난 후 저는 두가지 걱정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자아식, 암에 걸려 다죽어 가던 놈이 되게 난체 하네’ 라는 비웃음과 ‘성당 다닌다고 너무 종교적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거 아니야?’ 라는 핀잔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것은 ‘지금 이렇게라도 우리 고마운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해. 혹시라도 암이 재발하여 그냥 죽게 되면 고마웠다는 말도 못하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고, 두 번째 것은 저도 김천에 가면 우리 어머니(남산교회 권사님)를 모시 고 교회에 가서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리며, 절에 가서는 시주도 곧 잘하는 점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2916 동기생 형제 여러분!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 주시고 용기를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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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채이듯 암에 걸리다.
■ 1-1 손녀가 태어나던 날
수능을 일주일 앞둔 그 날, 나는 학교에는 병원에 들렀다가 출근한다는 전화만 하고 지난 월요일에 신청해 놓은 위 내시경을 하기 위해 방배동 대항병원으로 갔다. 두세 달 전부터 배가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되어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그 해에도 환갑이 다 된 나는 또 연 3년째 고3 담임을 맡고 있었기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수능 시험이나 치면 병원에 가볼거라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 더는 안되겠다 싶어 찾아온 병원이었다. 순서에 따라 가운을 갈아 입고 내시경실로 들어서려는데 큰놈한데서 전화가 왔다. “아빠, 미연이가 곧 애기를 낳으려나 봐요. 지금 분만실로 들어갔어요.” 내 대신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그래, 내가 옆에 없어서 미안하다. 너하고 사돈어른하고 잘 좀 하거라. 나도 아버지 내시 경 끝 나는대로 그쪽으로 가마. 기도할께” 조금 있다가 순서가 되어 나도 마취를 하고 내시경 진료가 시작되면서 나는 잠이 들었다. 남들이 다들 좋다고 하여 좀 비싸도 수면내시경을 신청해 놓았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캄캄한 회복실 안이었는데, 조금 있으니 의자며 마루바닥이며 옆에 잠자는 다른 환자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머리가 좀 아프고 배도 더부룩하였다. 조금 있으니 간호사가 왔다. 간호사는 옆에 누운 아주머니한데 작은 목소리로 “박○○님이시죠.” “네” 아주머니가 대답하였다. “아주머니는 그냥 집으로 가시면 되시고요 일주일 후에 결과 보러 오시면 돼요.” 그리고 이번엔 나를 보고 무척이나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송건수님이시죠.”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눈빛을 보이자 간호사는 “송건수님은 담당 의사선생님이 잠간 뵙고 가시랍니다. 저를 따라 오세요.” 하고는 신발을 신는 나를 앞서 빠른 걸음으로 회복실을 나갔다. 나는 그 순간 직감적으로 ‘아! 정말 올 것이 오는가?’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번개같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나는 몇 초 동안이지만 신발 끈이 잘 안매어지는 것처럼 하면서 도살장에 끌려들어가기 싫은 소처럼 늑장을 부리고 있는데 무정한 간호사는 다시 나한데 와서는 약간 짜증스런 얼굴을 하고는 빨리 가자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담당 의사에게 나를 안내하였다. 담당 의사는 무척 젊었다. 40을 갓 넘었을까? 의사가 입은 하얀 가운 가슴에는 ‘내시경 전문의 최○○’이라는 글씨가 파란 색실로 새겨져 있었다. 그 이름표를 보는 순간 나는 우리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복에 금빛 색실로 수놓은 이름표를 생각하였다. 맨 처음 중학교 입학식에 입고 갈 까만 동복 교복 가슴에 어머니가 한 땀한 땀 익숙하신 바느질 솜씨로 이름표를 달아주셨던 그 날 저녁, 다른 식구들이 모두 잠든 후 나는 너무 기뻐서 그 이름표를 몇 번씩이나 쓰다듬어 보고는 잠을 잤던 그 이름표가 왜 갑자기 지금 생각난 것일까? “지금 느낌은 어떻습니까? 머리 아픈 것 좀 나아지셨나요?” 젊은 의사는 나를 보고 물었는데,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려 하자 의사는 당신의 말은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하였다. “송선생님, 선생님 위 속에 무엇이 들어있네요.” 나는 눈만 몇 번 깜짝거린 다음 다시 의사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위 속에 들어 있는 혹은 양성일 수도 있고 음성일 수도 있는데, 그게 양성이든 음성 이든 사이즈가 너무 커서 일단은 수술로 제거를 하셔야 합니다.” “크기가 얼마나 되는데요?” “지름이 약 10센티 정도 되네요. 그러니 큰 병원을 찾아서 되도록 빨리 수술할 수 있는 스케줄을 잡으세요. 그리고 양성인지 음성인지의 결과는 오늘 떼어낸 조직을 배양하여 조사를 해야 하니까 다음 주에 오셔서 결과를 보시면 됩니다.” “네 알았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추천해 주실만한 병원은요?” “아, 요즈음 이 수술은 우리나라가 가장 잘하고요, 서울에서 좀 큰 병원이면 어딜 가나 다 잘 합니다. 걱정하시지 말고 선생님이 알아보세요.” 내각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아내도 나와 같은 직감으로 이미 사태를 대충은 짐작하고 있는 듯 하였다. 병원을 내려와 차량관리 직원들이 내 차를 찾아오는 사이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무심한 가을의 끝자락 하늘은 쓸데없이 정말 쓸데없이 따스한 햇빛 만 퍼붓고 있었다. 올 때와는 달리 갈 때에는 아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우리 차가 사당동 고갯길을 올라가고 있을 때 큰놈한데서 전화가 왔다. “엄마, 미연이가 예쁜 딸을 낳았어. 아기도 미연이도 다 괜찮아. 장모님이 그러시는데 순 산이래. 아빠는 어떻데?” “아이고 우리 아들 애썼네. 아기도 미연이도 괜찮다니 너무 다행이다. 아빠는 며칠 치료 하면 괜찮데. 안사돈한데 수고하시고 축하한다고 말씀드려. 나도 바로 그쪽으로 갈게.” 아내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신림동 집에 도착하였다. 소파에 마주 앉아 아내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내한데 아까 젊은 의사가 나한데 한 말을 이실직고하였다. 그 말을 하는 나는 한없이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 되어있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곤 점심상을 차렸다. 집에서 아내와 같이 점심을 먹어본 것이 몇 년 만이던가? 점심상을 다 물릴 때까지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설걷이를 한 다음 아내는 나를 쳐다보았다. 오후엔 어떻게 하겠느냐는 거다. 나는 학교는 그냥 제끼고 며느리가 산 후 조리를 하는 병원으로 가서 나를 닮았다는 첫손녀를 안아보고도 싶었지만, 내가 손녀를 안는 순간 내 몸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암 병균이 아기한데 막 옮아가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그냥 학교에 들어가서 오후 근무를 하고 오겠다고 하였더니 그러라고 하고는 자기는 안양 산부인과에 갔다 오겠다고 하며 집을 나갔다. 학교에 오니 내가 병원에 간 줄 알고 있는 몇 몇 선생님들이 걱정이 되어 내 주변에 모여들었다. 나는 오늘 내시경을 했는데 결과는 다음 주 수요일에 나온다고 하더라고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교실로 올라가 수능을 앞둔 최종 마무리로 미리 준비해 둔 교재를 통하여「교과서 최종 요약 정리」 강의를 시작하였다. 수능 딱 일주일 전이었다. 나는 오늘은 야자 감독이 아닌데도 저녁을 학교 식당에서 먹고 우리 반 학생들 야자 감독을 직접 하였다. 대부분 야자 감독을 하는 교사는 당번 이외의 담임이 직접 자발적으로 남아 있으면 고맙기도 하지만 ‘나를 못 믿어서 남은 거야 뭐야’하는 마음도 들어서 약간 심통이 나는 법이지만, 환갑이 내일 모레인 내가 남았다고 뭐라고 할 후배 교사도 없거니와 왠지 오늘은 그냥 집에 가기가 싫어서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비비고 싶었다. 나는 거의 열시나 다 되어서 퇴근을 하였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들 부부와 우리 가족에게 선물로 주신 새 생명, 처음 태어난 손녀에게 갔다온 아내는 별로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눈치를 보니 내가 그렇게 일렀건만 아들에게 내가 큰 수술을 해야하는 것이며 십중팔구는 암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한 것 같았다. 하기야 아들 아니고 누구한데 그런 이야기를 하랴. 아내한데는 귀엽고 귀한 손녀의 탄생보다는 남편의 죽음이 더 큰 문제인 것이 뻔하지 않는가? 지금도 그건 그렇다. 옆집 아저씨가 암에 걸렸다고 하면 “요샌 의학이 발달해서 암도 치료하면 다 잘 났는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거식이도 5년 전에 수술한 위암환자인데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라고들 말하지만, 그 대상자가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들, 내 딸과 같이 우리 식구인 경우에는 ‘암’과 연상되는 첫 단어는 ‘죽음’이다. 우리 며느님은 참 복도 없다. 첫아기를 낳고 신랑에게, 시댁 어른들께 마음껏 축하를 받아야 할 우리 며느님은 해산날과 시아버지의 암 판명 날짜가 우연히도 맞물리는 바람에 한편 자랑스럽고 기쁘면서도 한편 억울한 날이 되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은 나는 우리 며느님한데 참 미안한 날이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아내한데 ‘산모는 괜찮더냐, 미역국은 잘 먹더냐, 사돈어른들이 딸이라고 섭섭해 하시지는 않더냐, 아기는 누굴 닮았더냐는 등 공식적인 것들만 물어본 후 일찍 잠자리에 들어 손을 모아 기도를 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시는 줄을 저는 알고 있나이다. 그래서 저는 늘 매일 물을 마시듯 숨을 쉬듯 주님의 은총과 자비에 감사하나이다. 보잘 것 없는 죄인이 원하옵건데, 지금 저를 가로 막는 너무도 높고 큰 저 벽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하지만 제 뜻대로 하시지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소서. 아 멘.“ 그리곤 잠이 막 들려고 하는데 아내와 작은 아들이 거실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조용조용 들려왔다. “엄마 엄마, 내가 지금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는데, 1기, 2기 3기 4기 중에서 1센치 이내라 야 초기래, 엄마 아까 몇 센치라 했어?” 아내는 그 말에는 대답도 못하고 울고 있었다. 10센치라는 말을 어떻게 자식한데 또 하고 싶겠는가. “나도 잘은 몰라. 아빠가 식구들 걱정한다고 대충 말한거라 기억이 안나네. 또 악성이 아닐지도 모르고, 또 혹시 악성이라도 수술하시면 나으실거야. 다음 주에 결과가 나오거든 의논을 해보지 뭐. 그건 그렇고, 병원은 어디로 해야 되지? 서울대병원? 아산?, 삼성? 세브란스? 강남성모? 위 수술은 어디가 잘하는지 알 수가 없네.” “그래 나도 한 번 알아볼게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 평소에도 작은 놈은 큰놈 보다는 더 자상하였고 마침 자기가 다니는 회사도 제약회사라 관심이 많은 분야여서 그런지 아내에게는 딸 같은 아들이었다. 2007년 11월 7일 수요일 오후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오후였다.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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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하는 송건수 친구야! 반갑고 고맙고 감사한다. 지금까지 사랑하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큰 축복으로 임하길 기도한다. 성탄에 축복을---- 미국에서 --
그저 담담히 그려넣은 그날의 어두웠던 그림이 파노라마되어 눈가를 젖게하는구나...그래도 자네의 간절한 기도와노력, 집사람의 헌신으로, 볼기회마다 좋아졌던 모습이 고마웠다. 더욱 두달여전 모습에선 화색이 돌고 노래도 불러줄 수 있는 힘이 생겻고 한결 편해진 마음을 볼 수 있어, "이젠 됐구나" 싶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르네...함께 기도하고 염원하는 친구들도 있으니 더욱 힘내시고 화이팅 일세...곧 봄세...
많이도 놀랐나보다 친구야~
얼마나 힘들었을까?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친구야~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친구야~ 내 한번 맘 먹고 우리 하느님께 떼를 쓰보겠네. 어째 좀 해 달라고....
"예수마음의 힘이여~ 우리 친구 건수마음을 지탱하소서~"
건수야! 좋은 글을 잘 보았다, 너의 친구들 사랑하는 마음과 모친과 너의 간절한 기도가 건강을 다시 회복시켜준 원동력 같구나, 앞으로는 편안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생활하자구나.
건수야.......그래도 어제보다 오늘이 좋아졌고 오늘보다 내일이 분명 좋을꺼야.위암은 극복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주위에....새해에는 좀 자주 볼수있을꺼야...
송손생님,평생을 아이들 속에서 그토록 성실하게 헌신한 것이 분명 하나님의 사역일 것이니 크나큰 보살핌이 있을 것이고 늘 아버지 없는 조카들 안쓰러워 마음씀도 다 기억하심을 믿네.부디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하겠네.사랑하네
건수야..본지 오래 되었네..서초동 성당에서 가끔보던 모습 으로 곧 회복될꺼야..용기를 가지는자만이 승리를 할수 있으니까...화이팅..
힘든 나날들을 이겨내는 친구에게 위안을 드리며 더욱 건강하기를 빈다.
동기 건수의 건강을 회복하여 천수를 누리길 원하네.....늘 하나님께서 같이 하여 가정과 가족과 건강을 보살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네....교육사업도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그래도 현대의학으로 극복...감사요 은혜...
서울 왔다고 제일 먼저 학교로 찾아왔던 종태, 원거리 비행에 항상 조심하시길/ 용배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깊이에 내가 늘 못미쳐서 미안해, 고마워/ 외롭고 높은 인생의 산을 넘어본 기선아, 너한데도 미안한게 많아, 용서해/ 대구의 동녁하늘 같은 영규야, 갓바위에라도 같이 가고 싶구나, 고맙다./ 영기씨, 너 수술한거 어떻게 되었어? 또 어부인은 좀 어떻고?/ 병우야 개들이 모두 대학을 나와 취직했단다. 모두 네 덕분이다,/ 재두야 서부전선 이상 없지? 늘 마음 속에 있어./ 기석씨, 서울 왔는데 저녁 한끼도 대접 못해 늘 미안했어, 고마워/ 서울의 희로애락 김 주님, 고마우이 고마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