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네가 쥐어준 편지를 읽었어
중간부터 흐려지는 글씨
펜의 잉크가 다 떨어진 것 같았지
그것과 가장 비슷한 색의 펜을 찾으려 서랍을 뒤지다가
자세를 고쳐 앉는 네 모습을 떠올렸어
흠름이 끊긴 고백을
기어이 이어가는 너를
편지의 내용은 이기심에 관한 것이었다 너무나 선해서
하나도 이기적이지 않은 너의 이기심이 나를 발끝부터 어
지럽게 만들었고
나의 모든 마음을 알고 싶은 게
너의 이기심이라면
어떤 마음은 끝끝내 말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이기심이었으니까
마음의 뒷면은 꼭 들춰 보고 싶던 나날에는 내장을 도
려내어 오장육부의 융털과 세포까지 보여주려고 했어 피
가 잔뜩 묻은 손으로 장기를 모두 밖으로 꺼내 하나하나
소개해주고 싶던 시절이 있었어
이건 내 폐예요
조금 지저분하죠?
제가 골초라......
이건 제 간이에요
조금 딱딱하죠?
제가 알코올의존증이라......
택시 기사님은 앞만 바라보고 나는 편지를 꼭 쥐고 바
깥을 바라보고 있네 가느다란 빛이 줄지어 서 있어 빠르
게 창을 스쳐 가는 기다란 가로등의 잔상이 늘 오가는 풍
경인데도 처음 보는 느낌이 들고 편지지도 조금 구겨지고
말았네
<인체의 신비>라는 전시회를 아니?
인간의 시체를 조각조각 잘라 줄줄이 세워놓은 그 전시
관에서 울음을 터뜨린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동의서
도 없이 해부된 몸들이 얼마나 피곤한 심정으로 늘어서
있었는지
알고 있니?
상한 마음들이 줄지어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망해버린 전시회
이제 나는 안다
들뜬 기분으로 모든 걸 내어 주는 일은 모두가 도망가
게 한다는 사실을 나의 구멍을 들여다보면 너도 떠나가
버릴 걸 잘 알아
그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만
딱 그정도로만
나는 늙었고
잉크가 흐려진 펜을 버리고 편지 쓰기를 관두는 너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아 네가 다시 고백을 이어가도
록 억지로 새로운 펜을 쥐어주고 싶지 않아 택시가 한강
을 건너고 있다 중간부터 다시 또렷해진 잉크처럼 대교의
등불이 선명해지다가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흐려져 있고
이제 내 손에서는 피가 묻어나지 않네
그러니까 어떤 풍경은 흐릴수록 아름다운 거지 눈 수술
의 후유증으로 밤의 빛이 죄다 번지자 세상이 빛으로 가
득 차서 좋다는 나의 말에 네가 웃었던 것처럼
근데 말이야
이게 내 진심이야
기어이 이어지고 마는 마음이 있다는 것
흐릿해져도 글자의 모양은 변하지 않으니까
흐릿한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잇다는 사실은
여전히
여전하니까
사랑에 모양이 있다면
서로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접힌 눈매의 모양일 거야
착각 없이는 무엇도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맘껏 착각하는 것
그게 우리의 임무지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문학과지성사,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