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끝났습니다, 아니
당신은 정말 끝났습니다 그래서
나도 끝이 나갑니다
나는 근심할 후사도 없고 당신은 내가 매달렸던
마지막 사람이었으므로
이제 나는 정말 끝이 나갑니다
끝이라는 목소리 또는 의미의 동심원이
무심히 건드려놓은 이 시간을 어떤
시작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다시 시작되지 않는 것으로서
나는 함부로 먹고 마시고 떠들 수 있고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할 수 있으며,
당신은 내 꺾인 걸음을 풀어주기도
멀쩡한 호흡을 한참,
끊어주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의 끝을 잊거나 안 보려할 만큼
똑똑하질 못합니다 한해 또 한해,
당신의 끝을 방치함으로써 서서히
옥죄어오는 나의 끝, 끝나가는 나를
굶주린 벌레처럼 탐닉하며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이 시간이,
망국처럼 해방처럼 아득합니다
당신은 지금 나의 길 없는 나날과 아무 관련이 없고
나의 회한과 실의에 전혀 빚이 없지만,
함께 했던 날들에 대해선 야속히 꿈에서도
한마디 투정이 없으십니다
당신과 나는 이제 끝입니다 우리는 정말
끝났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자연처럼,
어제는 강원도 어느 산간의 물소리 곁에
오늘은 저세상 같은 제주 상공의 구름들 위에
내일은 곯아떨어졌다 깨어 다시 쥐는 술잔에
나타나고 나타나고 나타납니다
나는 그것을 끝없는 끝이라 부르고
끝나가는 나를 끝나지 않는 나라 자연처럼 믿으며,
눈을 떠 당신의 끝을 온 하늘 가득 펼쳐놓고
눈 감아 당신의 끝없는 끝을
환한 어둠 속에 가둡니다
[살 것만 같던 마음], 창비, 2024.
첫댓글
나에게 절망이었던 당신!
당신의 정식 명칭을
굳이 부르지않아도
좋겠습니다.
이제는 희망으로 다시
내게로 다가서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