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돈오 -이상길
신은 죽었다고 소리치며 체 게바라를 동경했던 모든 것이 모순스러웠던 스무살 시절 하지만 나의 바둥거림은 찻잔 속의 태풍이었고 아이를 얻고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변질되고 말았다 마치 젊은 날의 필연적인 통관의례처럼
흙탕물 한 양푼이를 얻기 위해 30km를 걸어야 하는 먼 아프리카의 야윈 소녀들에게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단지 오늘 하루만이 절실한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에게서도 깊은 연민과 함께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내 반목하고마는 속물이 되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의 괴리감 합리를 위한 변리의 연속 속이 쓰리다 늙는다는 것이 더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추접스러워진다는 자책을 떨칠 수 없음에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뿌리내리지 못하는 부초만 같은 서글픔 진정 깨닫는다는 것 정녕 삶의 절벽 위에서야 얻을 수 있는 찰나일까
커피가 다 식어버렸다 지금의 나 역시도 식어버렸다 벽시계의 초침만이 새벽의 정적을 뚫고서 죽비가 되어 내 어깨를 내리치고 있었다
-<시하늘> 2023년 가을호 *********************************************************************************************************** 현재 우리나라 문단에서 선시를 탐구하는 대표 시인의 문학특강을 경청했습니다 불교의 선승은 깨달음을 추구하시려 좌선에 든다지요 상식을 깨뜨리고 우주의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 깨달음이란 불시에 찾아오는 것일 테지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대오각성을 함부로 좇아갈 수 없으니 그저 부러웠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텅 빈 것을 쫓아가느라 숨이 가쁜 이들에게 선시는 순간의 놀라움일 수 있습니다만, 문명을 얻으려고 새벽잠 설치는 보통 문학인으로서는 넘보기 힘든 깨달음이었습니다 들리는 것이나 보이는 것이 진짜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몇 줄에 불과한 자기 시를 몇 페이지로 해설하는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선승께서는 어떤 일갈로 죽비를 내리실까? 오늘도 어설픈 돈오에 허우적거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