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한 방에 휴지처럼 구겨진 당당한 나의 자존심
이튿날도 그 다음날 도 나는 다가올 수능 시험을 치를 우리 학생들을 위해 마지막 정열을 쏟아 부었다. 내가 부탁을 하였더니 수요일에 내시경을 한 대항병원에서는 이틀 후인 금요일에 짐작대로 악성 종양이라고 전화통보 를 먼저 해 주고는 결과를 보는 진료와 위암 확정 진단서 등은 오시는 대로 해드릴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내가 근무하는 미림여고 교장선생님한데 이 사실을 알리고, 지금 아주 민감한 우리 반학생들이나 나한데 수학을 배우는 고3 학생들이 나 때문에 신경을 써서 수능 시험에 혹시라도 영향이 있으면 안되므로, 수능 시험 이후에 내가 이야기하기 전에는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이야기 하였더니 교장선생님도 찬성하였다. 나는 내가 무슨 작은 이순신이라도 된 것 같아 약간 웃음이 나왔다.
위암이 확정 된 후 나는 병원에서 일러준 대로 내가 수술을 할 큰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몇 군데에 전화를 해본 나는 걱정을 아니할 수 없었다.
서울대, 삼성, 아산, 세브란스, ... 그 어느 병원도 진료를 예약하는 데만도 2, 3주 후라야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도 좀 유명한 의사를 지목을 하면 3, 4주나 한 달 뒤라야 진료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진료가 한 달 후이면 다시 여러 가지 검사가 빨라도 보름은 걸린 터인데 검사 결과를 보고 다시 수술 스케줄을 잡으면 두 달은 그냥 후딱 지나갈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거 잘못하면 기다리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0센치나 된다는 암덩어리가 호수에 돌을 던지면 생기는 원형 물결이 퍼져 나가듯 내 몸 속에서 자꾸자꾸 번지는 것 같아 몸이 스물스물 하여 조급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평소에 나는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항상 당당하고 정의롭게 살아라.’라고 강조해 왔다.
하루를 살아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라고, 기본을 지키고, 순서를 기다리고, 남을 배려하라고, 자기보다 더 가난하고 덜 배운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도우라고, 봉사하라고.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려면 학교 안다녀도 된다고, 중고등학교 다니며 드는 과외비 학원비 대학 등록금 등 교육비를 그냥 복리 이자로 불린 후 장사를 하면 훨씬 부자가 될거라고 그렇게 외치며 살아온 나였고, 나 또한 진리니 정의니 봉사니 그런 단어를 항상 되뇌이며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온 것 같은데, 이거 참 큰일이 났다.
워낙 말주변도 없고 사교성이 없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나는 근 30년 서울 학교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도 막상 내가 일을 닥치니 마땅히 부탁해볼 곳이 한 군데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부탁해볼 곳이 두어 군데 있기는 하였다.
그 하나는 우리 아버지가 거의 3년 동안 페암을 치료하였던 강남성모병원 내과였고, 또 하나는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 시내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몇 명 근무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 아버지를 돌보시던 의사나 내 제자들한테 내 병을 치료하자고 가기는 나는 정말 싫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금요일 저녁에 내가 퇴근을 하였는데 아내가 나를 불렀다.
“여보, 지금 생각해보니 단장님이 의사 집안이잖아.
맞아 그 형님(단장님 사모님) 형제들도 의사인 것 같았고,
무슨 의사협회 간부라고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거기 전화 한 번 해봐야 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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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성당 전경 |
서초동에서 성당 나닐 때에 아내는 아파트 레지오 활동을 참으로 열심히 하여 많은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그것을 본 이웃 사람들이 너도 나도 성당에 다니길 원하여 많은 교우들과 함께 지냈고, 나도 아내에게 등을 떠밀려서 지역장도 하고 레지오도 하면서 고등학교 때에 밴드부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가대에 들어가 부단장을 하였었는데 그 때 우리 성가대의 단장을 맡아서 나를 끔찍이도 아껴주시던 단장님 내외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부인과 아내와 또 다른 교우 두분을 합쳐 네 사람은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달 만나는 사이이며, 연중 한두 번은 남편들도 같이 만나 연극이나 오페라를 본다든지 하고 저녁을 먹는 사이였다.
아내는 사모님과 전화를 시작하였다. 간단한 안부 인사가 오간 후
“형님 그런데 좀 큰 병원에 형님 통하는 곧 좀 없어? 실은 우리 양반이 어제 내시경을 했 는데 위암이래. 내가 답답해서 그래. 급히 수술을 해야 된다는데 좀 알아봐 줘.”
“응 그래? 아이구 어쩌다가?
설마 오진이겠지, 송선생님이 그러실 리가 있나? 딴 병원에 가서 다시 한 번 해봐.
내시경도 오진 나는 수가 많데.”
“아냐, 형님 내가 좀 급해서 그래, 형님 집에 누가 의사라고 했잖아. 아닌가?”
“응, 의사가 맞긴 맞아, 그건 그렇고 서울대병원은 잘 모르겠고 신촌 세브란스는 좀 아는 사람이 있긴 한데, 그 보다 오진일 수도 있으니까 다른 병원에서 내시경을 다시 한 번 해보라니까? 우리 송선생님이 그러면 안되지, 안되고 말고.”
평소에도 치과의사인 단장님은 물론 그 사모님까지도 워낙 그런 이야기를 안하시는 분들이라서 몰랐었는데 알고 보니 사모님의 오빠가 신촌 세브란스 ○○과 과장이면서 병원 원무를 총 관장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더 물어볼 것도 없이 단장님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하였고, 단장님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를 해줄터이니 기다리라고 하시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 20여분 있으려니 사모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아이고, 송선생님 안녕하세요.
아까 데레사(아내의 세례명)씨한데서 들었는데요 아마 오진일거예요. 또 혹시 만에 하나 오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위암은 병도 아니래요. 치료하면 대부분 다 완치된대요.”
하시고는 아내를 바꾸라고 하셨다.
“네, 형님 제가 받아 적을께요. 네 됐어요. 말씀하세요.
네, 그냥 바로 원무과 S○○ 교수님을 찾아가면 된다고요.
네? 다음 월요일 오후 2시에 바로요? 그렇게 빨리요?
네, 네 감사합니다. 형님.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만나서 드릴께요.
네, 네. 들어가세요.”
나는 단장님 사모님 덕분으로 병원에는 가지도 않고 집에서 전화 한통화로, 보통 2, 3주일씩이나 걸린다는 진료를 바로 3일 후인 다음 월요일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빨리 진료를 받게 되어 좋기도 하였지만, 한편 머리 저쪽 한 켠이 멍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학생들에게
‘어디 빽 같은 거 동원하지 말고 자기 실력으로 순서대로 하라’
고 항상 가르치던 당당하고 떳떳하던 내 모습이 한 순간에 휴지처럼 구겨지는 것 같아서 참으로 씁쓸하였다. 결국 급하니까 한 방에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 인격자가 되는 나를 보고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 1-3 제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습니까?
다음날인 11월 10일은 놀토였는데, 고3 학생들 중에서 학교에서자율학습을 하고 싶은 학생들을 위해 교실을 개방하였고, 위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서너분의 고3 담임선생님들이 나와서 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나는 9시에 학교에 나갔다가 10시쯤 얼른 교문을 나왔다. 우리 학교는 교문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삼성산성당이 있었다. 나는 그 때 그 성당 성가대 단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성당 사목위원들은 물론 교우들에게도 조금은 알려진 공인이었다. 안으로 살며시 들어가니 마침 베란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지하에 있는 대성당으로 내려가성당 문을 살짝 밀었더니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토요일 오전이라 높은 유리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가는 햇빛 몇 줄기가 지하 3층의 성당을 어슴프레 밝히고 있었고 지하라서 별로 춥지는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뒤쪽 구석 의자에 앉아 습관대로 성호경을 그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리고 앞 벽면의 높은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예수님을 올려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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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성당 내부 |
성당 전면에 모신 예수님의 형상은 성당마다 모두 달라 전 세계를 통틀어도 같은 것은 없다고 한다. 또 요즈음 우리 나라의 어떤 성당에는 두루마기나 도포를 갖추어 입은 모습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성당 예수님은 마치 정형외과 진찰실에 있는 뼈대 모형처럼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채 아래만 적당한 천으로 가린 참 불쌍한 모습의 예수님이었다.
‘이왕이면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줄줄 흘리는 옆구리도 같이 만들지 않고,
그러면 너무 비참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에 가 보면 대개 부처님은 온화하신 너그러우신 모습에다가, 걸치신 옷도 너무 화려하고 고급이며 앉아 계신 모습이나 팔의 자세도 폼 나게 계시는데 반하여, 교회의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하기 그럴 수 없다.
‘저 사람이 내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지고 나를 구원할 사람이라고 하면 나는 과연 그것 을 믿고 따를 수 있을가?’
한참을 그냥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가 머리가 멍하게 비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갑자기 눈을 비비고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이 세상 살면서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그런 다음 내 머리 속에는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였다. 그 영화는 내가 네 살 남짓 되어 나를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마 10배속 아니 20배속은 되는 것 같이 번개처럼 평생의 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네 살 때, 상주 공성 솔미에서 토요일마다 김천 가시는 어머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싸릿문 기둥을 팔이 떨어져라 붙잡고 울던 기억에서부터, 지난 수요일 위암 판정을 받은 일과 어제 수능고사를 위한 마지막 총정리 수업을 한 것까지 무성영화 활동사진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그런 기억을 되뇌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천평과 같이 생긴 큰 저울을 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토요일마다 집에서 부업으로 기르는 돼지 우리를 청소하던 일, 이웃 집집마다 20여집을 돌며 음식찌꺼기인 돼지 꾸중물을 물지게에 지고 걷어러 다니던 일, 두 주에 한 번씩 성남 다리껄 아래 정미소에서 그렇게 까끌까끌한 왕겨를 담아 리어카에 실어오던 일 등이 저울의 왼쪽에 올라갈 때에는 제법 왼쪽이 무겁게 내려갔다.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되던 일을 담았더니 좀 많이 올라갔었는데, 우리집도 같은 선생닙집인데 왜 영철이네집보다 못 사는거냐고 아버지한데 달려들었던 일이 지나가자 오른쪽도 상당히 무거워졌다. 대학교 시절에선 그래도 점수를 많이 땄는데 문제는 군대생활이었다. 나는 공군 장교로 입대하여 중위가 되면서 돈도 한 푼도 없는 놈이 거것만 두쪽 차고 결혼을 하였는데 군대 4년 5개월이 지나가자 오른쪽이 왼쪽을 압도하고 훨씬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영동에서 처음 시작한 4년의 초년병 교사 시절은 내가 생각해도 페스탈로찌 사촌쯤은 된다고 생각한 것처럼 점수를 많이 받았는데 서울로 보따리를 싸가지고 와서 발버둥 친 몇 년은 공도 많았고 과도 많았다.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 생활, 그래도 일반회사와는 비교도 안되는 조용한 학교에 있는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우리 송설 친구들은 맨손으로 손톱이 다 달토록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로 아무에게도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억울한 때에는 술도 못 하는 체질이라 한강에 가서 팔이 빠져라 돌팔매질을 했댔다. 마누라와 한바탕 싸운 날에는 새벽에 차를 몰고 충북 음성 꽃동네로 달려가서 팬티도 걸치지 않고 앙상한 뼈만 남아 있는중환자실 환자들의 기져귀를 갈아주면서 인생 반성과 내마음 위로를 하였다. 당시 꽃동네 중환자실에는 50여분의 노인들이 계셨고, 10여명 기저귀를 바꾸어주면 대충 2시간 가량 걸렸다. 나는 거기서 일을 하면서 나에게 타일렀다.
‘참 내, 목구멍에 밥술이라도 넘어가니까 별 호강을 다 떨고 있네,
여기는 연고자가 없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버려진 환자들만 2400명씩이나 거두어서 멕이고, 입히고, 치료해주고, 기도해주고, 죽으면 장사지내주고 그러는데, 너는 세상에 귀 하디 귀한 남의 집 딸들을 하루 종일도 아니고 수학 시간을 통해서 3년만 가르치라는데 무슨 인생에 불만이 그렇게 많은 거야.
그러고 또 있어,
야 송건수, 네가 가진 것 중에 네 것인 거 있거든 말해봐.’
생각해 보니 내가 가진 것, 우리 어머니, 내 마누라, 내 새끼, 내 집, 돈, 친구들, 교우들, 여러 가지 사람과의 관계, 교사로서의 노하우, 몇 권 안되지만 지은 수학 책들, …
이 중에서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모두 조물주께서 나에게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이지, 내가 노력했다고 다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저울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58명이 응시하여 2등을 하여 뽑힌 미림여고 수학교사, 다른 서울 교사들에게 행여나 뒤질세라 3년 동안 하루 네 시간만 자고 공부하던 일, 1984년 우리 반에서 전국 수석이 나온 일, 그 후 지금도 비교적 빈민촌인 신림동 미림여고가 전국 여고 중에 최고의 진학률(8학급 졸업에 서울대 22명, 연대 26명, 고대 13명, 서강대 7명, 이화여대 65명 등 우리 반에서만도 서울대가 6명이고 위의 명문 5개대에 25명이며 51명 전원이 서울 시내 대학에 모두 들어가는 전무후무한 일이 있은 후부터, 택시를 잡고 미림여고 가요 하면 알게 되었음)을 자랑하던 일, 그 후 16년 동안이나 4분의 교장을 모시고 헌신한 나보다는 자기들의 꾸린데가 혹시 들어날까봐 평교사를 2년 만에 부장을 시키고 다시 2년 만에 교감으로 승진시켜 교장으로 앉히던 일, 그것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자기들이 한 일을 정당화하려니 어제까지 이사장 앞에서 침이 마르도록 미림의 별이라고 칭찬하던 나를 하루 아침에 무능한 사람으로 없는 사건도 만들고 꾸미고 또 그런 아부하는 부류들을 시켜 사사건건 모함하기를 3년, 그 때 나는 매일 아침 뒤뜰에서 담배에 내 영혼을 의지했던 것 같아. 참으로 어리석게도 정말 참으로 어리석게도.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를 내려다 보니 손에는 땀이 흥건히 배여 있었고, 유리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가 달라져서 그런지 앞의 예수님이 약간 화난 얼굴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주변을 가만히 돌아다보니 아불싸! 나는 정말로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는 내가 생각해도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짐승보다 못한 잘못은 슬금슬금 뒤로 빼돌리고 있었다. 날이 시퍼런 양심은 내 심장을 칼로 저미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들을 바로 쳐다 볼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팔로 안아 저울의 오른쪽에 올려 놓는 순간 저울을 매달고 있는 튼튼한 세 가닥 쇠줄이 끊어져 버렸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예수님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이지 개똥보다도 못한 인간이었다. 그 순간 성당의 불이 켜졌다. 뒤를 돌아다 보니 수녀님이 미사를 준비하러 오신 모양이었다.
“아, (성가대) 단장님이 계셨군요. 다시 불을 꺼드릴까요?”
“아니예요, 저도 막 가려던 참이예요. 미사 준비 하셔야죠.”
나는 코와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이기가 싫어서 수녀님의 눈을 피해 성당을 나왔다.
<계 속>
첫댓글 교직에 대해서 남은 잘 모르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네. 나도 한때는 술과 하루에 담배를 3갑씩 태웠는데 건강이 말이 아니었었다네. 서울로 와서 승진을 했지만 그 과정은 파란 만장을 겪었지만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권모술수로 장점보다는 단점을 부각시켜 모함하여 하루 아침에 추락시키는 일이 어찌 교직사회 뿐이랴. 그러나 모진 풍랑에도 겸허히 받아들여 내탓으로 돌리면서 슬기롭게 역경을 헤쳐 나와야지요. 눈물나는 얘기지만 이제는 잊고 하루 빨리 회복하여 인생역전을 시도하시길 바랍니다.
경북대사대 동창으로 진정한 사도를 실천하여 명문 미림여고를 중흥시킨 참 스승! 소중한 병상일기로 용기와 희망을 보여준 친구의 앞날에 더 큰 영광과 행운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이 글을 보면서 마치 극적인 소설을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병상일기니까? 위로부터 해야지 스스로 다짐합니다. 결론적으로 쾌차하시리라고 생각됩니다. 누구나 이 나이쯤 되면 병이 한 두가지가 있기 마련이고 병을 달래면서 친구처럼 이해하고 살아 가야 되니까요. 송선생님은 알아주는 스타 강사셨고 많은 봉사를 하신 분이며, 철저히 건강 관리하시니까 장수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등학교시절 문지알 자취방에서 한때 한방에서 지낸적이 있지? 늘 가까이 하고 싶은 친구 건수이지요. 이제 그렇게 두렵던 병상에서 벗어났으니 새로운 삶에 더욱 행복하길 빕니다.
경험을 나누고 서로 정보공유하고 더 나은 삶과 지혜로운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됨에 고개숙여 감사....GOD BLESS YOU!
먼저 송선생님 건강이 하루속히 회복 되기를 기원합니다. 나도 울산에서 위암초기 판정을 받고 2003년 10월10일 인천길병원에서 위절제 수술(4/3절제)를 받았다네, 수술받고 4년간 고생한것 말로 다할 없다오. 건강을 되찾는 방법은 음식조절(맵고 짠음식 사절) 잘하며, 공기 좋은 곳에서 운동(평지걷기) 열심히 하여야 만이 회복이 빠르다네, 또 한가지 아무리 좋은 음식을 섭취하여도 흡수을 잘되지않으니 좋은 음식은 4년지나서 많이 먹으시기 바라네, 한번 찾아뵙지 못한점 깊이사과드리면 하루속히 쾌유하시길 하나님께 기도드리겠네.
이기석교장님 충고 고맙습니다/ 박종근교장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모교를 위한 님의 수고와 마음 고생을 짐작합니다/ 김교수님 우리 같이 밥먹은지 좀되었지요?/이상종교장님 그 땐 당신이 더 많이 밥을 지은 것 같은데? 고마워요/ 동근아 네 소식 나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소식 주고 좋은 정보와 충고 주어서 고맙다/ 우리 송설 형제님들모두 사랑합니다
하나님! 송건수친구를 회복시켜주소서. 건수친구의 쾌유를 빕니다.
건수인형 얼굴 본지가 꽤 오래되어 몹씨 궁금하던차, 님을 김천 복집에서 만났을때 사실 내가 생각했던 모습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보여서, 그리고 그날 밥 반공기와 국 한그릇을 비운 님을 보고 다소 마음을 놓았다네. 다음에 만나면 좀 더 많이 드시고, 옛날 얘기를 하고, 그 다음 3번째 만나면 그때 님은 'trombone' 으로 sksms 'trumpet'으로 "Giant"를 "La Cumparsita" 를 불어 보았으면 참 좋겠구마. 소리가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