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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엽기 혹은 진실..(연예인 과거사진) 원문보기 글쓴이: ⓧ헤이이봐자네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 날입니다.
그리고 이주일도 채 남지 않은 광주 민주화항쟁 5.18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인인 헤이이봐자네와 함께 5.18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지자는 의미에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나라일이 뒤숭숭한 요즘, 우리 나라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워보자는 새로운 각오를 다져봅니다.
5.18 민주화 항쟁의 전개과정을 최대한 요약해서 정리했으나 역시 스크롤 압박이 심합니다.
다는 읽지 못하시더라도 부분부분 굵은 글씨, 색깔이 다른 글씨만이라도 읽어주세요.
그것마저 귀찮으시다면 사진과 그 밑에 적어진 글귀만 봐주셔도 감사합니다.
-글쓴이 헤이이봐자네
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지요.
수업중에 담임샘이 심각한 얼굴로 들어오셔서 전부 집으로 돌아가라 하셨어요.
영문도 모른 채 우리는 겁에 질려 집으로들 향했지요.
그로부터 광주는 전쟁터가 되고 우리는 암흑속에서 총소리, 싸이렌소리, 헬리콥터 소리에 떨었지요.
-5.18 당시 고등학교 재학중이던 "정종연"씨
5월 17일 0시 비상 계엄령 확대실시
계엄포고 10호 ; ①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 대학 휴교
③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④ 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⑤ 언론 사전검열 등의 조치
한편 김대중전대통령님을 비롯한 정치인 수백명을 강제 연행.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을 투입했으며 특히 서울과 광주가 주요 공격의 목표.
시위 진합 훈련을 수련한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정예부대가 무력으로 진압을 함으로써 5. 18의 비극은 시작.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 공수부대원간 최초충돌
비상계엄으로 대학 휴교 조치가 취해진것을 모르던 전남대생들이 등교하려다 계엄군에 의해 제지당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 발생적 시위 시작->전남대생들 "계엄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침.
이때까지는 평화시위였으나,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가 해산을 하도록 두어차례 방송 한 뒤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잡히는 학생마다 곤봉으로 머리와 어깨등을 구타, 연행.
학생들 연행 후 거리에 나와 시위 가담 여부에 관계 없이 남녀를 불문하고 때리고 짓밟았으며
쓰러진 사람은 질질 끌고가 트럭에 실음. "광주 시민을 상대로 한 대학살극" 이라고 불러도 무방할만큼
무자비하고 난폭했으며 도주하는 학생들과 청년들을 뒤 쫓아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은 모두 구타하고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혀 연행시킴.
이 때 연행자 대학생 1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시민 184명 등 합계 405명.
그러나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음.
당시 외친 구호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김대중씨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5월 19일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를 즐겨라"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들이 시내 전 지역에 걸쳐 삼엄한 경비를 서며 공포분위기 조성. 금남로는 차량 통행 금지.
시민들이 금남로로 모여들기 시작. 학생은 몇 없고 대부분 일반 시민.
10시 40분경, 경찰과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인 해산을 요구.
그러나 시민들 해산하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
11시 10분경, 군용트럭 30대에 탑승한 공수부대가 도청과 금남로 사거리에 진출, 시위군중 압박.
(공수여단 1,140여명이 시위 진압에 나섬)
11시 30분 경,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18일과 마찬가지로 잔인한 대학살극 연출.
항의하던 할아버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기사, 고시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린 학생들 등 남녀노소 가리지 않음.
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그 안에서 젊은 사람이 발견되면 무작정 구타 한뒤 연행.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 채 군 트럭에 실려갔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원망도 많이 했다. 아버지가 우리 가정을 위해서 하루만 참았으면.
민주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나. 내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는 거 아닌가,
그 자리에 안가셨으면… 매국노라도 좋으니까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
-5.18 당시 친구에게 이끌려 도청 앞으로 갔던 故"기남용"씨의 아들 "기근"씨
5월 20일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금남로 2가~3가, 약 2천명의 시민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가 금남로 입구까지 행진하며 시위에 참여.
"공수부대원 물러가라", "우리를 죽여라", "계엄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금남로에는 공수부원 대신 1천여명의 경찰이 나타남.
학생과 시민들은 연막탄을 터트리며 경찰을 향해 다가갔음. 갖가지 구호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보도 블럭을 깨서 던졌음.
그러자 금남로 1가쪽을 향해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 군중들은 뒤로 후퇴.
이들 중에는 고등학생들도 끼어 있었음.
버스와 택시를 세워놓고 젊은이들을 무작정 끌고 가는 과정에서 기사들이 구타, 연행당하는 일이 발생.
이에 분노한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 경기장에서 모여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금남로로 몰려왔음.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MBC, 세무서, KBS가 차례대로 시위대에 의해 전소.
이날 밤부터 모든 시외전화가 두절.
도청과 광주역 양쪽으로 몰린 공수부대는 급기야는 시위군중을 향해 집단 발포.
광주역 앞의 시위대는 날이 밝자 이때 사망한 두 구의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도청으로 분노에 찬 발걸음을 재촉.
5월 21일 시위에서 무력항쟁으로
20일의 충돌로 무장의 필요성을 절시히 느낀 시민들, 아세아 자동차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끌고 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차량 시위 전개. 시위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가 가는 곳마다 주먹밥과 음료수 등을 무상 제공.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맞선 시위군중은 대표를 선정,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협상.
그러나 협상을 벌이던 시간, 도청에서는 헬기를 이용해 시체와 기밀문서를 빼돌리고 실탄을 지급하는 등
본격적인 학살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음.
12시까지 퇴각하겠다던 계엄군이 약속불이행. 분노한 시민들은 차량을 앞세우고 도청을 향해 나아감.
장갑차 한 대가 전속력으로 시위대를 앞질러 분수대를 돌아질주, 전남대 쪽으로 빠져나갔고,
트럭에 실은 기름통을 불질러 밀어붙이는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하자 공수부대가 밀려남.
오후 1시 정각, 시민들이 이렇게 서서히 계엄군을 도청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을 때,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 시민들 시위를 중지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
바로 그 애국가에 때맞춰 일제히 요란한 총성. 공수부대원들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시작.
주위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들이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는 시민들을 겨냥하여 사격을 실시.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을 내릴 때까지 약 10분간 계속.
집단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 당했는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음.
시민들은 총 확보를 위해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로 이동.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나마이트와 뇌관이 확보, 그 외 각 지역에서 카빈 소총 등이 획득.
획득된 무기들은 즉시 광주시내로 반입되어 청년들에게 분배.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가자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 총 퇴각이 결정.
시민군들에게 완전히 포위 당한 계엄군은 길 양옆에 M60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퇴각.
계엄군은 도청 뒷담을 넘어 철수했으므로 철수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시민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녁 8시경 시민군 일부가 총을 쏘면서 도청 안으로 뛰어들면서 시민군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 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2007 5.18 백일장에서 당선된 "정민경"씨의 시
5월 23일 특전부대, 미니버스를 향해 무차별 사격
도청, 광주공원서 주둔하고 있던 특전부대 주남마을 뒷산에 집결,
대대별로 주변의 주요 고지를 점령, 광주로부터 화순방향으로 나가는 외곽도로를 차단, 외곽봉쇄 작전 수행.
광주에서 화순 방향으로 향하던 미니버스 한대가 녹동마을 입구에 이르자 매복해있던 특전부대 무차별 사격.
미니버스 탑승객 11명 전원 학살, 인근지역 주민 10명 부상.
몇시간 뒤 동일지역을 통과하던 미니버스에도 무차별 사격,
미니버스 탑승객 중 15명 학살, 나머지 홍금숙씨 외 2명과 인근 주민 부상.
부상당한채 특전부대에게 생포된 홍금숙씨 외 학생 두명은 강제로 특전부대 주둔지로 끌려가 홍금숙씨만 헬기로 후송,
나머지 두명은 소령의 지시에 의해 현장에서 즉결 사살.
5월 26일 시민수습대책 위원들의 죽음의 행진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는 제보를 들은 수습위, 긴급회의.
계엄군이 진입 시 광주는 피바다가 될것이 분명하다는 판단 하에
"17명이 총알받이로 나가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일시적이라도 막자"고 결의.
수습위원을 중심으로 농촌 진흥원 앞까지 죽음의 행진.
진입현장을 목격 후 이들은 탱크 앞에 드러누워
"우리를 먼저 깔아뭉개고 지나가라"며 목숨을 걸고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
5월 27일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최후의 항쟁
외곽지역의 시민들로부터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도청 행정 전화가 끊김.
도청 상황실은 술렁거리기 시작,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한다고 결정.
광주시내 전 지역을 돌면서 마지막 가두방송 시작.
새벽 4시가 지나며 총성이 울리기 시작. 도청 안에는 시민군 주둔.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며 닥치는대로 발포.
인기척이 나는곳에 무조건 총격. "폭도 소탕작전".
오전 5시 10분경 시민군 완전히 진압, 도청을 마지막으로 항전 끝남.
한편 이 때 KBS 광주 방송은 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며
"폭도들은 투항하라" "도청과 광주공원도 군이 장악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한다" 등
이 같은 방송을 되풀이, 간간이 행진곡 방송.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폭도'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
계엄군은 작전을 개시한지 약 1시간 30분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짓고 항쟁을 진압.
그리고 '80년 5월 광주민중의 무장투쟁도 열흘간에 걸쳐 끝.
마지막 가두 방송,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이번 게시물을 위해 조사하면서 모르던 사실도 많이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광주.
광주인이라는게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합니다, 대한민국.
사랑합니다, 광주광역시.
퍼가실분도 안계시겠지만... 최대한 많이 가져가주시길 바랍니다.
잊어서는 안될 우리의 귀중한 역사입니다.
BGM ; 오월의 노래
오월의 노래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갔지
망월동에 부릎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리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붉은 피피피
첫댓글 이미 다 구축해놓은 거 말아먹는데 이젠 생략.
"'5.18 정부 예산' 대폭 삭감..사업 차질 우려" 보고 하도 어이없어서 지난주에 썼던 글 다시 앞으로 끌어옵니다~ ^^;
명박이 떄문에 이거 또 일어나게 생겼네 ㅡㅡ 젭알 한반도에서 껒여
아..중학교때 손가락 하나 없으신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5.18때 시위하던 분이셨음..5월18일날 수업시간에 그날 항쟁했던 이야기 해주셨었는데..
5월18일은 학교에서 항상 아침에 묵념하고 시작해요, 광주인으로서 광주를 위해 희생하셨던 분들이 자랑스럽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어제 학교에서 화려한휴가봤는데... 너무슬펐어요..
권력자들아~~또다시 국민을 조종하려들면 이번엔 전국에서 들고일어날거다. 이제라도 제발 제정신차려라! 역사의 죄인이 되지말고...
나는자랑스러운광주인!
막 답답하고 찡하고 뭐라 말해야 하지... ㅠㅠ 죄송합니다... 아닌가, 뭐라 해야하지... ㅠㅠ 이런거 볼 때마다 할 말이 안떠올라요 ㅠㅠ
아 나 눈물 계속나네 .................
아정말..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데.. 정말 가슴아픕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어제부터 이상하게 자꾸 감정적이 돼가는지 눈물이나는게..기분이 영 이상합니다..왠지 예감도..썩 안좋고..별별 생각이 다 나는데 무력하게 촛불밖에 못드는 제가 한심하네요..
막 짜증나요 진짜 ....
저희아빠도 서울에서 민주항쟁 하셨다고했는데.. 원래 광주 분이 아니여서라 광주까지는 못가시고..
아 이거읽고 막 너무 속상해서 울었어요. 이때 저희 아빠도 고등학생 이셨는데 광주에 계셨거든요. 거기서 겨우 나오셨는데...... 그때 우리 아빠가 죽었으면 저도 없었을텐데 ㅠㅠ 아 너무 슬퍼요 ㅠㅠㅠ 우리나라 만약 2MB때문에 이렇게되면 저도 비록 고3 여학생이지만 총쏘면서 다 어떻게 해버리고싶어요 ㅠㅠㅠㅠㅠㅠ
이렇게 나라 지키려고 목숨 바치신 분들한테 빨갱이라니...장난으로라도 그런말 하는 사람들보면 진심으로 죽여버리고싶어요..
광주사람으로서 이게 광주만 알고있는 듯해서 너무 안타까워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폭도들이라고 우기는거 보면 패주고 싶어요. 그런사람들 518공원에 가보았을까요?
진짜 슬프다 ㅠㅠㅠ 절대로 잊으면 안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