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한다는 것은.. .. ..
그리워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음입니다
멀리 있지 않아도
그저 가슴 저미도록 보고픈 사람 있다면
가슴에 두고두고 담아내도
모자라는 사랑이 있음입니다
그리워 한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음입니다
자그마한 몸짓 하나도
목숨처럼 소중히 하고픈 사람이 있다면
그 그리움의 전부를 죄다 추억으로 담아낼
아름다움이 있음입니다
그리워한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음입니다
언제, 어떻게 만난다 하여도
다 아름다운 만남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랑입니다
비처럼 우연히 찾아오든
운명을 쥐고 찾아오든
그리워 기다리고 있음은
모두 사랑입니다
홍자색 배롱나무
백일홍나무 (배롱나무)
이배롱나무는 백일홍 나무라고도한다
이꽃은 시골에서 주로 많이볼수있는데
이꽃이 세번피면 쌀밥을 먹을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알고보면 세번피는것이
아니라 백일동안 피고지고를 오랫동안
하기때문에 백일홍 ~배기롱~배롱 으로
말이변형되어 배롱나무라고 한다고 한다
이나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봤더니
전설도 있었네
분홍색 배롱나무
보라색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에 꽃을 피운다.
산천초목이 모두 초록 세상이라 배롱나무 꽃은 한층 더 돋보인다.
배롱나무는 중국 남부가 고향이며, 고려 말 선비들의 문집인
《보한집》이나 《파한집》에 꽃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적어도 고려 말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시집 오기 전의 중국 이름은 당나라 장안의 자미성에서
많이 심었기 때문에 ‘자미화(紫微花)’라고 했다.
글자로는 보라색 꽃이지만 붉은 꽃도 흔하고 흰 꽃도 가끔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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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배롱나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자미화는 보라 꽃이 아닌 붉은 꽃이 먼저 들어오지 않았나 싶다.
이유는 자미화가 들어오고 나서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 쓴 것으로 짐작되는
《양화소록(養花小錄)》에 “사람들이 이름을 제대로 익히지 않아 자미화를 백일홍이라고 한다”
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저자인 강희안도 붉은 꽃을 보았음을 알 수 있어서다.
꽃이 오래 핀다고 하여 백일홍나무라 하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배기롱나무로 변했다가 지금의 배롱나무가 된 것이다.
도종환 시인의 시 〈백일홍〉을 읽어 본다.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시인의 관찰력은 정확하다.
꽃 하나하나가 이어 달리기로 피기 때문에 100일 동안 피는 꽃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가지 끝마다 원뿔모양의 꽃대를 뻗고
굵은 콩알만 한 꽃봉오리가 매달려 꽃을 피울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래서부터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꽃이 피어 올라간다.
대부분의 꽃들은 꽃대마다 거의 동시에 피는 경향이 있으나
배롱나무 꽃은 아래서부터 위까지 꽃이 피는데 몇 달이 걸린다.
꽃잎은 6~7장이고 모두 오글쪼글 주름이 잡혀 있다.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도 주름을 펴주지는 못한다.
주름 꽃잎은 배롱나무만의 특허품이다.
배롱나무는 꽃이 오래 피는 특징 말고도 껍질의 유별남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오래된 줄기의 표면은 연한 붉은 기가 들어간 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얼룩무늬가 생겨 반질반질해 보인다.
이런 나무껍질의 모습을 보고 ‘파양수(怕瀁樹)’,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간지럼을 태우면 실제로 잎이 흔들려서 간지럼을 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일 따름이다.
식물에는 작은 자극을 일일이 전달해 줄 만한 발달된 신경세포가 아예 없다.
일본 사람들은 나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도 떨어질 만큼 미끄럽다고 하여
‘원숭이 미끄럼 나무’라고 이름을 붙였다.
배롱나무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남해안의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는 해룡(海龍)이 파도를 일으켜
배를 뒤집어 버리는 심술을 막기 위해 매년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해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얌전한 처녀를 선발하여
곱게 화장을 시켜 바닷가 바위로 보내 해룡이 데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 왕자님이 마을에 나타나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처녀 대신 바위에 앉아 있다가 용을 퇴치한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얼마 동안 머물던 왕자는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랑에는 마가 끼는 법,
왕자는 마침 출몰한 왜구를 퇴치하기 위하여 100일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마을을 떠나버린다.
매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왕자를 기다리던 처녀는
그만 깊은 병이 들어 100일을 다 기다리지 못하고 죽고 만다.
약속한 날짜에 돌아온 왕자는 그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이듬해 무덤 위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더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마치 왕자를 기다리듯 매일 조금씩 피는 꽃이 100일을 넘겨 이어지므로,
사람들은 이 나무를 백일홍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도 배롱나무 옛터의 명성을 잃지 않는 곳이 여럿 있다.
소쇄원, 식영정 등 조선 문인들의 정자가 밀집해 있는 광주천의 옛 이름은
배롱나무 개울이라는 뜻의 자미탄(紫薇灘)이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담양 후산리 명옥헌에는 키 4~10여 미터, 줄기 둘레 30~150센티미터의 고목
100여 그루가 모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롱나무 숲을 만들고 있다.
그 외에도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경주 서출지 등도 배롱나무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