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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여행4 - 단테의집을 보고 베키오궁전에서 메디치가문 영광을 생각하다!
메디치 은행 은 로마와 아비뇽에 피사공의회와 독일공의회등 "교황이 4명" 이나 할거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격렬하게 대립할 때 피사공의회에서 선출되었다가
독일 황제에 의해 감옥에 갇힌 요한 23세 에게 석방 몸값 으로 거액을 대출한다.
다들 이제는 메디치 은행이 파산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저런 신용을 지켜본
다른 교황을 포함한 유럽 각국의 왕과 영주들이
그들의 돈을 신뢰할수 있는 메디치 은행에 맡기면서 오히려 유럽 금융계를 평정 한다.
“불행에 처했을 때 도우는 자가 진정 친구라???” 이때 석방된 요한 23세는 빈털터리라!
죽으면서 손가락 하나 를 잘라 메디치 은행에 보내니 메디치 은행 금고에 고이 보관되었다.
후일 메디치 가문에서 레오 10세가 교황 이 되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불러
“세례자 요한” 그림을 그리는데“둘째 손가락을 들어 예수를 가르키는 모습”을 주문한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이 치켜든 손가락은 바로 요한 23세 교황이 죽으면서 메디치 은행에
보낸 손가락이니“나 메디치가의 신용”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일러나???
그러고는 칼차이우올리 거리 Via del Calzaiuoli 를 걷다가 왼쪽에 코르소 거리를 만나
좌회전해서는 두 번째 블록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내려가니.....
거기 자그만 골목 광장에 사람들이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보니 우리가 찾는 바로 그
단테의 집 이니 4유로 하는 표를 사서는 입장을 하니 여러 사진들이 벽면에
가득한 데, 당시 피렌체의 생활과 무기류며 전투도와 지도 등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
단테 의 모습도 보이지만 당시 피렌체의 생활상을 알수 있는 여러 자료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으니 단테는 1,307년에 장편서사시 “신곡”을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 로 저술해 중세 유럽의 문학, 철학과 신학의 전통을 대표하는 데.....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와 함께 르네상스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
라틴어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이탈리아어로 시를 쓴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이라 본다.
이는 조선의 유학자가 한자 가 아닌, 통시글이자 언문, 암문으로 비하했던
한글 로 시를 짓고 글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니,
독일의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의 출발점을 단테 에게서 찾는 이유인 것이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어릴때 부터 고전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신곡” 중에서 단테의 인도자가 된 베르길리우스 처럼 라틴 작가를 규범으로 했다고 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문학적 전통이나 아랍세계의 사상도 도입하고
구이니첼리의 영향을 받아 “사랑”을 탐구한건 1274년 베아트리체와의 만남 에서 비롯된다.
당시 북이탈리아는 로마의 교황청을 따르는 게르프(교황파) 와
신성 로마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황제파) 으로
두쪽을 갈라져 서로 격렬하게 반목했는데 피렌체에서는 게르프가 정권을 장악한다.
이후 게르파(교황) 는 자립정책을 내건 체키가 등 비안키(백당) 와
상업상의 이익에서 교황과 강력하게 결합한
도나티가 등 네리 (흑당) 로 분열하여 상호간에 또다시 치열한 정쟁이 일어난다.
단테 는 귀족의 공직취임의 금지가 완화되자 명목상으로는 의약업 조합에 가입하여
1295년 부터 시 행정의 공무에 임하고
백인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1300년에는 플리오레가 되었다.
비안키(백당) 에 속하였던 단테가 로마 교황청에 사자로 가 있는 사이에
피렌체에서는 흑당이 우세해져 결석재판에서 단테는 시외추방과 벌금형 에 처해졌다.
그후 벌금을 지불하러 출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이 선고 되었으므로
이후 고국 피렌체의 땅을 밟지 못하고 떠돌이 망명생활 중에 “신곡”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신곡 지옥편에서 단테는 지옥으로 갔다, 자신이 살던 세상이 지옥같아서 악몽을 꾸는걸까?
지옥 입구에 이르러 보니 "여기 들어오는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신곡의 원 이름은 "희극 La Commedia" 로 추방된 자의 서적이라 피렌체에서는 "금서" 였으나!
보카치오 가 "데카메론은 인곡" 이고 " 단테 저서는 신곡" 이라고 불러 널리 읽히게 된다.
망명생활의 초기에 단테는 동지들과 모의해서 피렌체 복귀를 획책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시인으로서 어려우며 힘든길을 걸었는데 1,321년에 라벤나에서 객사 한다.
이탈리아를 공격해온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7세가 1,313년에 급사한 후에는
고국 피렌체에 돌아갈 희망이 없어져
고난스러운 생활 중에 지옥ㆍ연옥ㆍ천국의 3계 를 생각했었나?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과 연옥을 여행하고 천국에서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나는데!
그럼 자신의 사랑 고백인데 연옥편에서 "사랑의 지성을 가진 여인" 이라는 표현을 썼으니....
기독교세계에서 "사랑이란 하나님의 전유물" 이었는데
욕망밖에 모르는 인간이 사랑을 하다니 이는 혁명이라!!!
때문에 단테의 신곡을 "중세 기독교 세계의 장송곡" 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단테의 신곡” 하면 바로 연상되는 것이
“괴테의 파우스트” 인 데.....
두 사람 모두 정치를 했고 물러난 뒤에는 오히려 문학적으로 성숙해 신곡과 파우스트를
썼으며 인간 구원은 베아트리체와 그레첸 같은 여신 을 통한다는 공통점 등...
하기사 이번에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피에타로 황금사자상 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도
여자 (엄마 미선 - 조민수) 를 통한 구원을 말했네?
괴테 는 1,786년 9월 독일의 칼스바트를 떠나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니...
베로나 파도바 베네치아 페라라 볼로냐 피렌체 페루자 아시시 로마, 나폴리와 시칠리아라!
남국은 음울한 독일과는 달리 하루하루 새로운 껍질을 벗으며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라... “그나라를 아시나요”“레몬꽃이 피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라고 적었다.
그가 1,786년에 여기 피렌체에 도착해 단테의 집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13~14세기의 인물인 단테가 쓴 신곡을 읽고 평한 얘기는 전해진다.
“지옥편은 처참하고 연옥편은 애매하며 천국편은 지루하다”
훗날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신과 악마가 인간을 통해 벌이는 진리와 욕망 쾌락의 이율배반 을 묘사했는 데.....
하지만 프랑스 혁명후 나폴레옹을 만나기도 했으며 인간 이성의 발현을 찬미하던
개화된 시절에 살았던 그이기에
기독교 문명의 암흑시대인 "중세를 이해" 하기 힘들었기 때문일러나?
피렌체 출신으로 고국에서 추방된 이 중에는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 도 있는 데....
그는 르네상스 말기 이탈리아의 사상가로 피렌체 공화정부의 서기관으로 재직했다.
외교, 군사면에서 활약하는 중에 숱한 저작을 펴냈으며 정치는 힘의 관계에서 비롯되니
분열된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서는
도덕 관념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등 "마키아벨리즘" 을 제창했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멀리 동쪽 바닷가 라벤나에서 쓸쓸히 죽었는 데,
마키아벨리 는 반메디치파로 몰려 추방 되고
후일에는 오히려 친메디치파로 의심되어 배척되어 죽었던 것이라!
그런데 지금 피렌체시는 라벤나시에 단테의 무덤 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네?
피렌체 시내 두오모 남쪽 “단테의 집”을 나와 강변쪽으로 골목길을 세블록을 걸으니
별안간 넓은 광장이 나오는데, 이른바 피렌체의 중심 시뇨리아 광장이다.
여기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에 있는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은
중세 피렌체 공화국 당시 피렌체의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시뇨리아 광장은 시민의 공공 집회장이었는데,
물의 요정에 둘러쌓인 넵튠의 분수와 코시모 메디치의 기마상과 여러 조각상 사이로
미켈란젤로 의 다비드상 과 사비니 여인 이 눈에 들어온다.
피렌체 Firenze 는 예술의 도시요 꽃의 도시라 불리는 데,
멀리 에트루리아 시대 부터 기원을 가진 도시로 르네상스 가 태동한 곳이며
단테와 마키아벨리 가 살았던 도시이다.
시뇨리아 광장 한켠에 있는 베키오 궁전 앞에는 여러 조각상이 서 있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다!
조각을 하던 초기에 한 소녀가 왜 그렇게 계속 돌을 두드리냐고 물었단다. 그러자
“저 바위는 그냥 돌이 아니란다,
난 그 속에 잠자는 천사를 깨우는 중이란다”라고 말했다나?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의 후원 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및
브루 넬레스키, 보티 첼리, 도나첼로등 예술가들이 남긴 많은 건축물들을 볼수 있다.
메디치가 는 1434년부터 1737년에 걸쳐 피렌체에서 약종상으로 출발해
은행업에 진출해 성공한 명문가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통치자로서 학문과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 가 되었다.
조반니 디 비치 는 1,420년경에 교황청의 은행가로서 거금을 모으자
정치계에 투신하여 활약하였고
아들 코시모 메디치 는 구 지베층에 의해 추방된후 민중의 지지로 복귀한다.
그는 교묘한 처세술로 정치, 외교에 업적을 올렸으며
유럽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는등 상업자본에 힘입어 미술가를 보호 하고
문화의 기초를 다졌으니 "국부의 칭호" 를 받았다.
1469년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 가 승계하여 경쟁자 인 파치 가를 누르고
조부의 치적을 발전시켜
학자들을 지원하고 고대미술을 수집했으며 국왕들에게 대부업을 하였다.
인문주의적 교양을 폭넓게 지녔던 그는 학예와 철학 연구를 장려하였으나
뒤를 이은 피에로 는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게 되자 시민들의 반발을 사서 추방되었다.
메디치가는 1512년 피렌체로 복귀하여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와
레오 11세 를 배출 하였으며.....
독일의 황제 카를 5세 가 남하했을 때 "로마의 겁탈" 로 피렌체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정치력을 발휘해 황제의 힘을 빌려 복귀하였으며 가문을 이은 방계의 코시모 1세 는
1569년 민주 공화국을 폐지하고 토스카나 대공 이 되어 군주의 지위에 올랐다.
아들 프란체스코 는 과중한 세금 징수로 경제가 파탄났으나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였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1737년 7대 대공 잔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단절된다.
그에 앞서 로렌초의 딸 카테리나 (카트린) 는 종조부인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정치력으로
프랑스왕 앙리 2세 왕비 가 되어 역사상 카트린 드 메디시스 (메디치) 로 알려져 있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프랑수아 1세의 둘째아들 앙리에게 시집간 것은 1,534년인 데,
앙리는 형이 죽는 바람에 왕이 되었으나
20살 연상인 애첩에게 휘둘리니 카트린은 숨죽이고 인고의 날을 살았다.
시집갈 때 이탈리아 요리사들을 데려가 "포크" 를 소개하고 프랑스 요리를 다양하게 발전
시킨 이외에 마키아벨리 의 “군주론”을 가져가 밤낮으로 읽으며 참고 또 참았단다.
마흔살 남편 앙리 2세가 마상 창시합에서 죽으니
그녀는 기다린 보람(?) 이 있어 세아들을 차례로 왕위에 올리며 섭정을 한다.
하지만 기즈 공작이 신교도를 학살하면서 내란 이 일어나니 수습을 위해
신교도 위그노 나바르 왕국의 여왕 진달브레와 협상해서 그 아들 앙리를 사위로 맞았으나
파리의 결혼식에 참석한 신교도 는 "성 바르톨메유의 학살" 로 수천명이 죽는다.
이후 학살을 주도한 기즈 공작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연금하고 있던 사위 앙리를 탈출시켜
세력의 균형을 이룬후 아들 앙리 3세를 조종해 기즈공작을 죽이고
사위를 후계자 로 정하고는 카트린이 죽은후 앙리 3세 왕이 가톨릭 세력에게 암살당하자....
사위 앙리는 가톨릭으로 개종해 앙리 4세 로 왕이 되어 "부르봉 왕조" 를 여니
군주론에 심취했던 카트린이 설계한대로 된 것이라!
여기 수백년을 서 있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는 지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 졌으니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품인데 진품이나 다를바 없네?
그 옆으로는 메두사의 목을 벤 첼리니가 만든 페르세우스의 청동상 이 보이는데,
메두사 는 바다의 괴물로 폭풍을 지배하는 고르곤 자매중 하나인데 미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메두사는 바다의 신 넵튠에게 강간 당한후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뱀으로 변하고 얼굴은 흉악해 졌으며 누구든지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렸다네?
이에 머큐리(헤르메스)와 미네르바(아테네) 가 페르세우스에게 거울 방패를 주고
거울에 비치는 메두사를 칼로 베라고 일러
그 머리는 아테나여신의 방패 에 장식물이 되었다던가?
그러고는 1,494년에 민중들을 선동해 메디치 가문의 피에로를 추방하고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 는 이 광장에서 알렉산더 6세 교황에 의해 처형된다.
그러니까 4년후인 1,498년 반프랑스 외교정책을 취하라는 로마 교황의 명을 거부한
수도승과 피렌체를 파문에 처하니 시민들에 의해 화형당한 것인데 돌비석 은 찾을수가 없네?
지금은 시청사인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은 높이 94m 의 종탑이 있는
고딕 건축물로 14세기 초에 시청사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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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첫댓글 또 다시 여행하며 공부 하고 갑니다~자세한 설명 몰랐던 걸 다시 알게 됐네요
포스팅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감사합니다~
무어.... 변변찮은 글에.... 제가 고맙지요?
아주 오래전에 다녀오긴 했는데 사진속 배경은 기억에 조금 있는데 어디가 어딘지 도통 ㅎㅎ
덕분에 다시 추억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아.... 피렌체야 첫 유럽여행으로도 가는 유명 관광지라.....
아이구 머리 아파요 나도 저길 서너번씩은 다 갔다 왔지만두..
뭐 어쩌고 저쩌고 그라면 골치 아파요..
기냥.. 머리 식히러 갔는데.. 또 안다이 들이 나서서 떠들어 되면... 또 모리 아파..
기냥 베니스 처럼 아 그렇구나 파사의 사탑처럼 아 넘어지겠네 이렇게 보면 되는거이지.
뭐 남의 나라 역사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그러면... 중등학교 세계사 선생도 아니고..
우리는 머리 아프기 시작하는 거이라요..ㅋㅋ
ㅎㅎㅎㅎㅎ...... 아는척 하는게 병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