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중간 - 최정란
시간도 공간도 아닌 이 세계 미간도 행간도 아닌 이 세계 잠기고 불타고 녹아내리는 혼 놓고 백 놓고 허깨비로 헤매는
엎어지고 자빠지는 허방과 늪과 흙탕과 끌탕, 무르고 정처 없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 절벽도 골짜기도 없이 천 길 뚝 끊어지는 가파르고 뭉클한 마음이 수시로 떨어져 내리는 엉겁결에 비명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취한 것도 맨정신도 아닌 마신 것도 안 마신 것도 아닌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망치거나 낙화하거나 추락하거나 몰락하거나 슬프고 고프고 아프고 하소연과 엄살과 허세의 바닥에서 목젖에 이끼 끼도록 침묵하는 수도자로 침 튀기며 떠벌거리는 속물로 민달팽이처럼 꿈틀거리는 이 세계 원숭이처럼 비틀거리는 이 세계
불도 물도 아니면서 불과 물인 학생도 선생도, 선수도 코치도 아닌 곤도 붕도 아닌, 속도 성도 아닌 세간도 출세간도 아닌 이 세계
취한 술병의 빨간 엉덩이를 보여주는 이 세계 나비도 애비도 모르는 반풍수의 이 세계 가파르고 뭉클한 이 세계 희미한 희망의 손을 간절하게 내미는 점선의 측은만 남은 이 아름다운 세계
ㅡ계간 《시산맥》(2023, 겨울호) *********************************************************************************************** 이도 저도 아닌 지점에 '어중간'이 있습니다 인간의 성정에도 '중용'이 있어 따르기를 권면합니다만, 실행은 몹시 어렵습니다 삶을 마주하는 태도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도 됩니다 그래도 지지자들로부터 신뢰를 쌓은 지도자는 굳은 심지를 지닙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고, 일구이언하지 않으며 함부로 약속하지 않습니다 입이 가벼워서 구설에 자주 오르던 이들이 출판기념회를 열어 선거자금을 모으는 계절입니다 거짓말과 배임 횡령 의혹을 받던 이들이 국회에서 쫓겨나고도 다시 입성을 노리나 봅니다 상식과 원칙을 무시한 대가를 어찌 치루려는지 어중간한 동지들이 입맛을 다십니다 도덕적이면 절대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는 세간의 평가가 틀리기만 바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