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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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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경유지에서 / 채윤희
중국 부채를 유럽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게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의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대륙에 이르러 불온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한 끝 열릴 때
나, 아름다운 부채가 되기
열망은 그곳에서 끝난다
■ 조선일보
럭키슈퍼 /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 부산일보
숲에 살롱 /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지요 비 오는 오후에도 어김없이 이야기에 중독된 여자들이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감수분열하듯 옆에서 옆으로 다음 손님을 부르네요
여자는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머리카락을 잘라요 몸이 생기기 전부터 손가락만 있었던 것처럼 손은 여자를 떠나 가위를 들고 허공에서 춤을 춰요 원피스에서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꽃무늬들이 살짝 얼굴을 빼자 잎사귀들이 떨어져요 떨어져서 허공으로 떠다니는 꽃들. 차를 마시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알지 못해요 가위질 소리에 맞춰 간간이 웃음소리를 끼워 넣을 뿐. 유리문이 밀릴 때마다 들어오세요 붙여진 팻말에서 글자들이 살짝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죠 비밀과 상처는 오늘은 괜찮고 내일은 거대해지다 모레면 잊고 글피엔 주저앉게 만드니까요 쉽게 묻는 게 좋을까요 쉽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수다장이들이 수다스럽게 찻잔을 부딪치며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하네요
■ 문화일보
상자놀이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 영남일보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손연후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고양이를 기르는 일
누구나 동그란 노란색으로 웅크려본 날들 있었지
쉼표 모양 씨앗처럼 고요히 꿈꾸는 연습
감자야, 하고 부르면 눈이 동그래져서 딸꾹 하고
딸기향 나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당신 넥타이에도 딸꾹거리는 딸기가 묻었어,
우리는 서로의 코를 쿡 찌르며 웃어버렸지
커튼을 열면 우리도 고양이 꼬리처럼 기다랗게 기대어 보고
노란 고양이 무늬 닮은 햇빛이 머리 위로 얼룩덜룩 흘러내렸지
반짝이는 유리잔마다 함께 이름을 붙이던 날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거래, 여기저기 우리 이름을 붙이자
우리는 감자 눈동자 속에 살고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살고
사람들 와르르 모였다 흩어지는 보도블록 횡단보도에도 길쭉하게 누워 있는 거야
수많은 버스 차창 손잡이에도 상냥한 고양이 키스처럼 토닥토닥 흔들리고 있는 거지
하늘이 자몽즙 같은 노을빛으로 젖어들면
기다란 빨대 꺼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어볼래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 퐁퐁 터지고
푹 익은 노을 냄새 싫어하는 감자는 자꾸만 빨대를 타고 기어오르고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위로 쑥쑥 자라나는 노란색 빨대를 올려다봤지
높이 더 높이, 어느새 굵어진 줄기에서는 샛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날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꿨어
감자는 점프를 잘했고 우리는 고양이 무늬로 웃으며 서로에게 손을 뻗었지
하늘에서 빨간색 노란색으로 뒤섞여 열리던 우리의 기다랗고 사랑하는 미래들
감자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사랑에 대해 말해야 해
우리는 노란색이었고, 커튼을 열면 유리잔마다 함께 반짝이며 살아있었지
우리는 씨앗처럼 가벼워 이 계절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늘씬한 고양이처럼 숨차게 달려보지 않겠니
매일 밤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는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고
통통 고양이 발소리 다가오자
우리는 눈 맞추며 함께 큰소리로 웃어버렸어
■ 경인일보
일 잘하는 요즘 애들 / 전예지
프린터기가 또 말썽이다
이 애물단지를 버리든가 고치든가 이게 대기업의 수준인가요?
하루에 기본 다섯 번을 1층에서 2층으로
걸어야 하는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으로
왼쪽 끝 후문 쪽에서 오른쪽 끝 정문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프린터기를 하나 놔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겨우 몇 십 만원이 아까워서 사람을 갈아 버린다
두 여자는 욕이란 욕을 다 입에 담지만
차마 입을 벌리진 못한다 멋쩍게 서로 한숨만 쉴 뿐
낡고 늙은 마트에 새로 생긴 텅 빈 매장의 취급은 이 정도
[자리 비움]
자기는 왜 자꾸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
일하기 싫어?
하필 매니저가 없는 날
혼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본부장이 찾아온다
억울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나마 매니저보다 깡다구가 있다
프린터기가 2층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어쩔 수,
말대꾸도 하고 참 요즘 애들 무섭다
눈이 순간 흰자로 뒤덮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머리 빠진 본부장은 혀를 찬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본부장이 매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으론 여전히
■ 국제신문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박재숙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 전북일보
빈 집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 강원일보
목다보
송하담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못. 나무의 빈 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 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히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 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에겐 노동은 어려운 말. 그의 일은 산책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였다. 숲과 숲 사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걷고 걸었다.
신은 죽어 나무에 깃들고
아버지는 죽어 신이 되었다
나무가 햇살을 키우고
나는 매일 신의 술어를 읽는다
목어처럼 해저를 걷는다
■ 매일신문
왜소행성 134340
유진희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나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빛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 경남신문
엽록체에 대한 기억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 경상일보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신춘희
눈사람 한쪽 눈이 삐뚤게 붙어 있다
돌멩이 하나 머금었다
지금 조금씩 녹고 있는데
눈두덩이가 시릴 만큼 너를 오래 붙잡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는 점점 온기를 갖고
안타깝지만 너는 점점 부피를 줄이고
한동안 우린 밀착된 결빙으로 중력을 버티지
눈송이들 모여 숨겨둔 방
이곳은 해의 꼬리가 닿지 않아 심장을 두기 좋지
두근대는 돌멩이가 감정이라면
겨울은 안전한 밀실이야
사람들은 그저 눈빛을 얹어주거나
손끝으로 훑어볼 뿐
녹아내려야 하는 운명엔 관심이 없지
내가 너를 지키는 방법은
구름을 불러 모으는 일
눈이 자꾸 짓물러지고 있어
눈 속에 갇힌 마음이 죄다 흘러내리고 있어
우리가 견뎌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처음 눈덩이 궁글렸을 때의 설렘 같은 거
아이들 모두 돌아간 뒤 입꼬리를 움직여본 거
별들이 싱싱해서 우리는 하나였던 거야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낮이야
돌멩이와 눈덩이가 분별되어야 하는 시간이야
마지막 냉기가 사라지면
너는 나를 놓아줄 테지
그때까지 나는 너의 공중이 될 거야
머리가 기울고 있어
몸에 금이 가고 있어
물의 장례가 시작되고 있어
툭, 돌멩이 하나 그렁그렁 쏟아져 내린다
■ 세계일보
비 오는 날의 스페인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 서울신문
반려울음
이선락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으다라 써졌다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
세면대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구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 삼킵니다 씹어도 건데기라고 없는 위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 뜨고 있는 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
배가 고프단 얘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던 아이들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되어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 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 경향신문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 한국일보
시드볼트
오산하
눈을 감았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를 떠올리면서 습한 냄새를 맡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 길거리의 새를 하나둘 세면서 걸어
눈이 마주쳐도 날아가지 않는 새 발로 바닥을 밟아도 도망가지 않는 새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까맣게 피멍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서 생일 축하해 문자를 받고 시차가 생겼어 하루 늦게 생일을 맞이하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과 선물 받은 오르골을 돌리면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노래는 언젠가 끝나겠지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대 거기에 자신을 묻을 거라고 했어 나는 Green Day의 Holiday를 들으면서 반역자! 반역자! 죽어버린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아 곧 종말이구나 그래서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구나
두 개의 음 두 개의 박자 머리 위로 떨어지는 15층의 사람과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차 사람의 바싹 마른 피부와 솟구칠 힘도 없는 피 물 물 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 다 녹아버린 얼음의 흔적과 끈적한 더위가 있어
라는 붙잡아도 부서진다 길을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새를 가만히 쳐다봤어 새가 내 눈알을 파먹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었어 계속 굴러가다가 영원히 남도록 그곳은 마치 도서관 같다
추워 라는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았어 이건 한 세기 전 살아있던 사람의 눈알이구나
계속 걸었어 뚝 뚝 흘리면서 걸었어 끊어진 다리 뒤집어진 배 치지 않는 파도 하늘에서 떨어진 새 검은 새 검 눈동자 뽑힌 눈알 굴러가는 심장 굴러 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
■ 전북도민일보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김종태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을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띔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뚜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쫓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 한국경제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웅큼취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 국제신문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박재숙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 광남일보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이정임
잘방잘방
가을 강은 할 말이 참 많답니다
저렇게 눈부신 석양은 처음이라고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도무지 닫혀 있던 입
흰 귓바퀴 꽃을 봅니다
안개 짙은 그 하얀 꽃을요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 두 바퀴 세 바퀴 현(絃)을 타 봅니다 눈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밖으로 찔끔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 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말한 적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둘 돌아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 한라일보
엄마 달과 물고기
김미경
물고기는 내 오빠다
오빠가 물고기인줄 알면서도 내 엄마 달은 물살에 휩쓸려 떠밀려가는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눈물이 없는 달
우리가 잠든 밤마다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놀라고 걱정스럽게 만드는 달 말이다
이런 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만 많다
물거품이 이는 곳에 가면 은빛 곡선을 가진 오빠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기가 발을 핥고 있어서 젖 물릴 때가 됐다고 한다
물고기의 얼굴은 내 얼굴
우리는 형제다
물속에 잠긴 달이 운구릉을 헤적거리다 곱은 다리에서 암흑 속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검은 그림자에 싸여 비틀거리는 아빠도 함께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힘이 세다.
■ 무등일보
만유인력
양승수
한 알의 사과가 저문다
잘 여문 것 좇아 줄기와 가지 따라
억지로 삼키던 몇 모금의 물 따라
바쁘게 걸어온 길에서 폴짝 뛰어오른다
느껴지지 않던 중력이 어느 순간 무거워져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떨어질 때가 된 사과는 서서히 붉어지는 것이고
떨어지고 난 사과가 여전히 싱싱한 것은
사라지지 않은 관성, 따르다 남은 습관 탓이다
사과의 단맛은 그런 식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과를 가졌을까
하루에도 몇 개의 사과가 공중으로 날아오를까
저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어
그러나 고작 몇 발자국 사과를 배웅 나갔다가
휘어졌던 가지가 그 탄력으로
복원되는 궤적을 그리며 돌아온다
돌아오는 가지 하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음 재촉하는 신호등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면
중력이 늘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거나
받아들이거나
도로에는 각자 서로 다른 중력으로 달려온 것들
잠시 멈추어 서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는 것을 아는 자동차는 없다
아무도 시동을 끄지 않는다
떨어진 낙과의 단맛 같은 엔진소리
정지선에 닿기 전 이 곳은 공중이다
바람이 지나온 커브길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뻗어나간 잎맥의 갈림길 따라
빨아들인 햇빛 같은 후회
꽃 피었다가 졌던 시간 흘러가지 않고 멈춰
오래 서성이던 발자국이었다가
흘러갈 곳 없는 소리들 엉켜있던 것이라 한들
사과를 두고 무슨 오해라 할까
■ 농민신문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강영선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지않는 시골집에서
안부 전화가 왔다
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샘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
곶감을 좀 보내 줄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 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이 된 빈집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 온다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주인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
하늘 번지수를 동사무소에 가서 물어야 할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 불교신문 (시조)
내성천변 물래실
구지평
어정쩡한 물안개가 저녁 강을 서성이다
속기 벗는 투명함에 산 빛이 검어질 때
실골목 저뭇해지는 내성천을 감싸고
굼닐대던 저녁연기 모래톱으로 불러내면
속 깊도록 시詩에 숨어 우련한 물래실이
갈라진 시간 틈새로 제 몸피를 드러낸다
허물어진 돌담 너머 마당귀에 마른 장작더미
텅 빈 방 잠긴 시간 푸른 여백 문장인데
이제야 적요를 푸는 한 올 한 올 자화상
평면으로 구겨지는 빛바랜 담초談草 위에
창문마다 달이 뜨면 거기에, 아! 거기에
묏등에 답청하시는 어머니가 서 있네
※물래실 : 경상북도 예천군 마을 이름
■뉴스N제주
다섯 개의 물의 장면
이정은
11월, 시침은 어디로 가고 없을까
카라꽃 조화를 11년째 키우고 있어요
물 없는 화병에서 꽃대는 올라오고
하얀 꽃잎은 향기를 뿜은 듯 버성기네요
속아주어야겠어요, 꽃이고 싶어 하잖아요
빈 화병에 물을 줍니다
찰랑찰랑 아파트 지하 수면실로 타고 내려가요
보일러 아저씨 잠이 깨요
달력 한 장 젖어요
2
양수리 두물머리
검푸른 물의 흐름이 엉켜있어요
마른 장작 타는 체취, 당신을 불러들인 건 나의 실수였습니다
목으로 넘어가는 와인 한잔이 나의 독주이기를
같이 했던 시간들은 윤슬처럼 흩어집니다
물의 카페에서 멀어질 때까지
3
어쩌지, 양수가 흘러내려
생명 다한 꺼져가는 촛불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녹아 굳어버린 촛농들을
무덤 삼아 수그러드는
작은 호흡
물의 끝은 여기까지
인큐베이터 안이 추워
4
어느 시인과 사랑을 했어요
더 이상 뭘 원하시는 거죠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몰라요*
5
구피의 유영이 당신의 눈동자를 흐리게 하지요
몰려다니다가도 삐진 양 꼬리치며 돌아서는
구피의 번식력이 안방을 휘젓고 있죠
앉아 있을 장소조차 없이 불어난 구피 종자들
쏟아진 물난리에 익사를 조심하세요
물의 장면, 되돌이표를 그려 넣을까요
*주. 김종삼의 시 <民間人>에서 가져왔으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첫댓글 올해의 신춘은 중년이라 표현해도 될까요?
획기적으로 낯선 기획이나 문장이 없이 대체로 서정적 안정감 있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획기적인 새로움도 기다려지는 곳이 또한 신춘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모아두니 편하군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신춘은 신춘의 맛, 해마다 신춘문예당선작을 읽으며, 나름의 시세계를 넓혀가는 맛......!
시사랑님의 말처럼 대체로 무난한 평이.....?! 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