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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이드의 상류층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천한 것들과는 다르다는 그들만의 자부심 때문인지 그들 간에는 유별난 것들이 유행하기 일쑤였다. 이번의 여름만 보아도 다른 이들보다 좀 더 희귀한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을 가지고 자존심을 겨룬 탓에, 애꿎은 이베이드 민초들의 등허리를 휘게 하기만 하였다.
그런 그들이 가진 괴상한 유행병 중에서 최고를 꼽자면, 목욕에 대한 관념이다. 이베이드의 상류층 중, 특히나 귀족층의 인사들은 천한 것들이 마시고 뱉어내는 물을 불결하게 여기기에, 우물물이든 강물이든... 천한 것들과 똑같은 물로 몸을 씻는 것을 오물을 끼얹는 것만큼이나 모욕적으로 여긴다.
당연히도 그들이 몸을 씻는 경우는 연중에서 특별한 날 -자신의 탄생일이라던가 혹은 종교적으로 지정된 안식일 전날 밤 등- 에만 행하기에 그들의 몸에서는 상당한 악취가 풍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악취를 가리기 위한 향수가 당연스레 그들에게는 당연한 사치품이자 애용품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눈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수가 것이, 그들 사이에는 씻지 않아 악취가 심하면 심할수록 미남, 미녀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참으로 독특한 그들만의 세계가 아닐 수 없지만, 그들의 그런 잣대를 가지고 이베이드의 최고의 미녀를 꼽아 보자면 바로, 유력한 왕위후계자인 위치린 공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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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엘 재상은 연회장 구석의 벽에 기대선 채로 홀로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들기는 나쁜 습관이 훤히 드러난 모습만 보아도 현재 그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한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전의 자신이 에비시안 왕자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역시 그 자리에서 받아들여야 했는데.'
이미 지나간 이야기기는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 왕자에게 가서 받아들이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터인데, 마음속의 무언가가 아직도 그런 재상의 결단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찾아내고자 그는, 자신의 마음속 호수에서 허우적거리며 찾아내려고 노력하였지만,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를 않았다.
현실에서 점점 벗어나는 재상의 머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여성의 싸움소리라던가, 저 멀리 달려나가는 붉은 머리의 소녀 라던가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의 상태로 어떤 여성이 그의 코앞에까지 다가와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당신, 꽤 괜찮네."
재상의 정신은 어떤 여성의 요염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고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입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는 자신의 바로 눈앞에 서서 유혹해오는 미모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모가 어쨌든 그에게는 그저 성가신 방해꾼처럼 느껴질 뿐이었지만, 이를 감추고자 억지 미소를 지었다.
옅은 갈색 머리에 쭉 찢어진 눈매, 이베이드의 상류층다운 화려한 치장에 가슴이 파여 훤히 드러난 드레스... 다른 누구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한눈에 위치린 공주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재상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조금은 놀랐지만, 곧 무슨 말이든 꺼내려는 그의 입술을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막았다.
"아니 아니, 말은 필요 없고... 어때? 내가 중요한 용건이 있는데..."
그녀의 유혹적인 말투에 재상은 그녀의 '중요한 용건'이라는게 무엇인지를 금세 파악했다. 그녀가 수많은 남자를 자신의 침실로 끌여들어오는 방탕함은 이미 타국인 재상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소문이 퍼져 있었고, 실제로 지금 그녀는 재상의 앞에서 자신의 매끈한 허벅지를 슬쩍 들어내 보인 채로 가느다란 손으로 재상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렴과 충심이라는 단어만이 재상의 모든 것인 재상은 그녀의 손길을 뿌리쳐 한 걸음 물러서서는 공손히 거절했다.
"죄송합니다만, 저 역시 다른 중요한 용건이 있습니다."
재상의 단도직입적인 거절에 공주는 조금 기분이 나빠왔지만, 곧, 자신의 유혹에 한 번에 넘어오지 않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주변의 남자들은 그녀의 손짓만을 꼬리 치며 기다리는 충실한 '개'들 뿐이었기에, 이런 그의 거리를 두려는 태도가 그녀에게는 더욱 마음에 들었으리라. 그녀는 이번에는 아예, 두 팔로 재상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는 풍만한 가슴을 그의 가슴에 밀착시키며 더욱 매혹적인 목소리로 그의 마음을 흔들려 하였다.
"아~주, 잠깐이면 될 텐데... 그만한 시간조차 없어?
공주는 윗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체통은 어디다 두고 왔는지, 뒷골목의 여자들처럼 대놓고 매달려서는 그에게 음란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한 그녀의 시선을 감당하기가 곤란해진 재상은 다른 이들 쪽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의 눈에 여럿의 귀족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아니, 감시하는 것이 보이자 그제야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위치린 공주가 재상을 유혹해온 것은 계략을 위해서가 아닌, 공주 본인의 욕심 때문이었겠지만 어느 쪽이든 공주와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공주파 측에서는 상당한 이익이다. 왕자가 제안했던 청혼이나 약혼과는 다르게 이번의 것은 '미인계'. 정치적으로 거의 정상에 위치한 재상의 직함을 가진 디자엘 재상이 위치린 공주의 치마폭에 놀아나거나, 혹은 이를 계기로 정식으로 관계를 갖게 된다면은 공주파 측에서는 드레마 왕국 전체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다름이 없어질 것이다.
머릿셈을 끝낸 재상은 시선을 돌려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쭉 찢어진 눈매는 평소에는 악한 인상을 강조해 주었을지언정, 남자를 유혹하는 몽마처럼 매혹적인 눈동자가 그 안에 담기어 있다면은 이는 오히려 그녀의 매력에 거부하기 힘든 매료적인 힘을 더해주었다.
어지간한 남자라면은 그녀와 함께함으로써 얻는 영광과 지위... 그리고 쾌락을 얻고자 그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을 터인데 재상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짜증만이 점차 밀려왔다. 생각 중이었던 것을 방해당해서일까? 아니면 이미 마음속에 정해둔 여성이 있어서 였을까? 어째서 정해둔 여성이라는 말이 떠올랐는지 재상은 의문스럽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매혹적인 향수향과 그 속에 섞인 그녀의 악취로 계속해서 자극해오는 그녀에게 곤란하다는 미소를 보이고는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가볍게 떨어뜨렸다.
"정말로 곤란합니다.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점은 진심으로 사죄드릴 뿐입니다."
재상은 상대가 일국의 공주인지라 최대한 조심조심 거절의 말을 하며 그녀에게서 떨어졌지만, 공주는 자신이 항상 자신해왔던 미모와 매력으로 그가 넘어오지 않자, 차츰 쌓여가던 불만은 굴욕으로 그리고 분노로 금세 바뀌었다. 그녀는 전의 유혹하던 태도가 차라리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돌변해서는 손을 들어 재상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가면에 금이 가듯 짙은 화장이 갈라지더니, 추악한 마녀조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끔찍한 얼굴로 변해서는 입에서 뱀이나 독충이 쏟아져 나올 듯한 욕설을 그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그 두 사람을 감시하던 이들은 예상치 않던 나쁜 결과가 일어나자, 우르르 몰려와서는 재상과 그녀를 어떻게든 떼어놓고자 용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돌발적인 변화에 재상은 당황했지만, 아무리 가슴 속이 불편하고 머릿속이 복잡해도 재상은 재상. 그 다운 부드러운 미소만을 유지한 채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전 이미 마음속에 정해놓은 여성이 있어서..."
재상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고자 누구라도 이해해 줄 만한 거짓 변명을 꺼내놓은 것이지만, 공주는 그런 재상의 말을 어떻게 이해한 것일까? 양팔을 붙잡혀 강제로 떨어져 나가면서도 한창 욕을 퍼붓던 공주는 '정해놓은 여성'이라는 말에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곧,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한 조소적인 미소로 바뀌었다.
"그래, 먼저 찍어놓은 년이 있다는 말이지...? 그러면 그 년이 누구지?"
재상에게 협박하듯이 묻기 시작하는 그녀의 어투는, 재상이 누구라고 말을 꺼내기만 하면 그 여성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주변의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재상은 자신이 급히 꺼낸 말이 오히려 독이 됐음을 후회했다. 아니, 정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급히 꺼냈던 말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는 오직, 한 여성만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 깊은 마음속의 의사가 그의 혀를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닐까?
공주는 그가 무슨 말이든 꺼내기만을 기다렸음에도 오히려 딴생각에 빠진듯한 모습에 더욱 화가 나서는 멋대로 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그래... 말할 가치도 없다? 즉, 그 망할 년이 나보다 낫다? 나는 그 년에 비하면 더럽고, 색만 밝히는 똥만 가득 찬 년으로 보...읍, 읍...!"
드레마와 손을 잡아도 왕자파를 누를지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키는 공주의 시비적인 말투에 누군가가 그녀의 입을 부랴부랴 막았지만, 공주는 여전히 눈치가 없는지 자신의 입을 막는 손을 깨물어 빠져나와서는 손가락을 들어 외쳤다.
"내 기사가 대신하여 이 모욕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
절대 원치 않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자 공주파측 영주들은 하나같이 이마에 손을 올리며,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공주의 머리를 강제로 내리눌러서라도 어떻게든 사과시켜, 그에게 화해를 받아낸다 해도 이미 본전은 건지기 힘들거늘...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그녀의 돌이킬 수 없는 행각에 그들은 만사를 포기하고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는 결투를 신청받은 이상, 모두의 눈에 나약한 책벌레로 밖에 보이지 않는 디자엘 재상이 결투에서 결코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보나마나 공주는 결투를 빙자해 그를 반죽음 혹은 반불구로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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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 공작은 누군가가 옆에서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서 잡아당기려 하자, 그자의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남자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그 끔찍한 고통에 주저앉는 그 남자의 얼굴을 걷어차는 그녀를 누군가가 뒤에서 양팔로 안아 구속하자, 그녀는 독이 가득 오른 고양이처럼 앙칼진 소리를 질렀다.
"어디를 만지는 거야! 이 변태 자식아!"
공작은 자신의 뒤로 밀착한 남자의 얼굴을 자신의 뒤통수로 들이받았고,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손을 놓자, 그녀는 그 틈에 잽싸게 빠져나와 그자의 턱을 갈겨버렸다. 기절해 바닥에 뻗어버리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며 남아있는 비겁한 남정네들의 수를 확인했다.
'앞으로 둘.'
그녀의 싸움방식은 어린 시절, 어린 여자아이의 몸으로 자신보다 나이와 덩치, 대가리 수를 능가하는 소년들을 상대로 싸우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로자리오 성자가 가난하게나마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자라던 그때에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항상 부족했기에, 남자아이들은 이를 차지하고자 상대가 어린 여자아이라 해도 봐주거나 하지를 않았고, 힘이나 체구로 밀리는 그녀로서 그들에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는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저 다리 세 개 달린 치졸한 짐승들에게 잘 써먹고 있었다.
"어딜 가던지 비겁한 자식들은 꼭 있단 말야!"
여자라도 여자같지 않는 여자인 공작이 필요할 때에만 여자라고 내세우는 태도는 일단 넘어가자. 공작이 남은 두 명 중 한 명에게 달려들자, 그자는 당황했는지 근처에 굴러다니던 의자를 집어들어서는 그녀에게 휘둘렀다. 여자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비겁한 녀석에게 당할 그녀가 아닌지라, 공작은 달리다 중 몸을 낮춰 미끄러지듯 의자를 피함과 동시에, 위로 보이는 그의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당연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랑이 사이를 붙잡고 몸을 숙여오는 그자의 얼굴을 한 번 더 걷어차 넘어뜨린 그녀는 여유로이 몸을 일으켜, 혼자 남아 벌벌 떠는 남정네를 돌아보며 녹색 머리를 쓸어올리는 여유로움을 과시했다.
혼자서는 승산이 없음에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벌벌 떨던 그자는 무언가를 보았는지, 방금 전의 겁먹은 얼굴은 어디가고 희희번덕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런 급작스런 변화에 공작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그자가 보던 방향 쪽을 돌아보았다. 그편에서는 발정난 늑대새끼들 마냥, 음흉한 눈빛을 품은 채로 우르르 몰려오는 다리 셋 달린 짐승들이 보이자 공작은 기가 막혀 왔다.
"도대체, 왜 이 나라의 남자란 것들은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입는 거야?"
그녀는 투덜투덜 거리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무리 중, 선두의 남정네가 몸을 통째로 던져오자, 그녀는 뒤로 구르기라도 할 듯이 몸을 뒤로 눕히며, 달려오던 남자의 양 옷깃을 잡아 달리던 방향 그대로 뒤로 내던졌다. 그리고는 그를 던지는 힘을 타, 뒤로 굴러 몸을 일으키고는 자신의 어깨를 잡으려 드는 남정네의 팔을 꺾어, 다리 사이를 걷어찬 후에 옆으로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양쪽에서 달려든 두 남정네에게 공작은 양팔을 잡혀버렸다. 그렇지만, 역전의 전사이자 성검의 기사인 그녀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먼저, 오른쪽 팔을 잡은 자의 발을 강하게 밟고서, 그자가 고통에 발을 빼는 타이밍에 맞추어 오른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한 발로 서는 순간을 노려 잡아당기는 힘에 중심을 잃어 '어어' 하는 그자의 면상에 박치기를 먹인 공작은 다른 한 놈을 돌아보며 짜증스럽게 소리질렀다.
"차라리 한 놈씩 덤비면 덜 억울하지, 남자라는 것들이 뭐 하는 거야"
그녀는 마음속 불만을 토해내며, 자유로워진 오른팔로 자신의 왼팔을 잡은 자를 향해 휘둘렀다. 허나, 그자는 겁을 먹은 건지, 일부러 그런 건지 손을 놓고 엎드려 그녀의 공격을 피하더니, 떠나는 님을 붙잡는 아낙네처럼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무슨..."
그 남정네의 꼴불견 같은 행동에 우습게도 다리가 묶인 그녀가 당황해 대응이 늦어지자, 다른 녀석이 그녀의 오른팔을 붙잡아 힘으로 내리누르기 시작했고, 그 틈에 수많은 자가 그녀를 덮쳐 체중으로 그녀를 엎어눌렀다. 아무리 날고 기는 그녀라지만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힘으로 그녀를 누르기 시작하자 방법이 없었다.
"야 이 비겁한 자식들아!"
수많은 남정네에 의해 엎어진 자세로 바닥에 깔려버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게 된 리프 공작은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 찍어누르려 하자, 이 굴욕만큼은 죽어라 저항하며 마음속을 대신해 소리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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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눈앞의 푸른 머리의 남자가 불현듯 던져온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의 눈앞으로 바람이 불어오며 그 남자의 무릎까지 닿는 긴 푸른 머리가 호수처럼 아름답게 출렁거렸지만, 카린의 눈은... 귀는... 지금껏 여왕으로서 해온 자신의 과거가 하나하나 되살아나 대신 채워갔다.
'지금까지 나는 무얼 위해 살고 있었지?'
자신이 왕관을 쓰고, 왕의 홀을 쥐고, 왕의 망토를 걸치고 왕좌에 앉은 것은 5년 전, 10살 때였다. 그때부터 디자엘 재상이 새로 재상으로 들어오기 전의 2년간의 기간은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특별한 추억조차 없는 암흑 속의 삶이었다. 그때에는 그저 앉아만 있었다. 모든 것은 베르제바브 대공이 처리해 주었고, 그녀는 그저 귀에 들려오는 모든 것이 머릿속에는 들리지 않은 채, 인형처럼 고개만 끄덕이기만 하는 무의미한 삶뿐이었다.
물론, 그동안의 텅 빈 마음속에도 적어도 한 가지쯤은 들어앉아 있는 게 있기는 하였다. 그저 누군가라도 좋았다. 자신을 구해달라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외로운 자신을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꺼내달라고 이뤄질 리 없는 소원을 항상 소망했다. 그리고 재상이, 그 떠오르는 듯한 아침의 태양과 함께 타오르는 듯한 주홍빛의 머리를 흩날리며 자신의 곁에 나타나 주는 것으로 그 소망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건 달라.'
그래 달랐다. 재상이 나타난 뒤로 그녀의 주변은 햇살이 가득했다. 나이 든 베르제바브 대공은 더 이상 혼자 동분서주하며 그녀의 짐을 혼자 짊어질 필요가 없게 됐다. 불안한 수도의 분위기에 제대로 눈조차 붙이지 못하고 밤낮을 깨어 있던 리프 공작은, 안심하고 수도를 나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자신의 삶은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았다. 아니 행복했다. 사람으로서 행복했다. 하지만, 그동안 지금 이 질문을 받기 전까지 그녀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여왕으로서의 자신, 여왕으로서의 삶, 여왕으로서의 책무, 여왕으로서의 목표..."
바보 같았다. 이베이드의 수도에 오기 전 대공과 재상에게 선언했음에도, 더는 새장 안에 머물지 않겠다고 어른이 되겠다고 여왕이 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자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말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좋았던 자신, 꿈속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는 행복한 꿈을 꾸고자 잠들기 전 몇 번이나 기도하던 자신, 재상과 함께 울고, 놀고, 맞장구치고, 때로는 놀림당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행복했던 자신... 그런데 난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의 삶은 그저 소녀로서, 어른이 아닌 아이로서 원하는 삶이고, 소망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지금에 와서야 깨닫다니, 자신이 일국의 여왕이라는 것을 인제서야 깨닫다니, 대전에 서서는 여왕으로서의 위엄을 '겉으로만' 보이고 실상은 빨리 끝내고 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한 머리로, 수많은 이들의 충성과 책임을 짊어졌음에도 이를 배신한 자신이... 정말로 바보였다.
'하, 완전히 바보네 나.'
가난으로 고달픈 어머니께 공부하겠다는 거짓말로 돈을 타서는, 노는 데 쓰는 아이나 다름없던 자신의 과거에 지금껏 자신을 위해 충심으로 인생을 바쳐온 신하들, 리프 공작, 베르제바브 대공, 디자엘 재상, 건국의 영웅들, 그리고... 그리고... 이상을 위해 이 나라를, 이 꿈꾸는 이들을 물려주신 어머니, 아버지... 모두에게 할 수 있는 말도, 변명 한 조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난 정말로.. 정말로...'
카린의 붉은 두 눈동자는 점점 짙어지더니, 곧 눈물이 가득 흘러내렸다. 너무나 괴로웠다. 이런 질문을 던진 눈앞의 흰 옷의 남자가 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바람에 따라 팔락거리는 그의 흰 옷 때문일까?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그의 외모 때문일까? 이런 질문을 해준 그가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려다보는 신처럼, 천사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내려진 이 질문은 자신에게는 벌이나 시련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미안하다."
소녀의 울음섞인 사과. 이것을 원해서 꺼낸 질문이 아니었기에, 라미엘은 짤막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사과를 말했다. 그의 말투로는 미안하다는 감정은 전혀 담기지 않아 보였지만, 카린에게는 왠지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는 것뿐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보는 게 부끄럽고 창피한 것처럼 얼굴을 가리고 그저 울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위로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팔을 뻗어 그녀를 살짝 안았다.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하고 손으로 그녀의 붉은 머리를 달래듯이 연신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아버지,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러웠고, 이에 오히려 그녀는 더욱 견디지 못하고 소리 내 오열했다. 감정이란 건 말로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지만, 그녀의 울음소리는 그 누구라도 듣고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마음속 고통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 울음을 가장 가까이서 듣고 있는 그 역시 괴로웠다. 그렇기에 그저 그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스스로 일어서기만을 기다렸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성곽 위로 수많은 병사들이 횃대에 불을 지펴, 성을 덮쳐 올 어둠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줄줄이 이어지듯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꽃들은 성 전체를 감싸듯이 둘러싸 어둠이 스며들 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막상, 성곽 안쪽의 성은 이미 어둠으로 덮어져 희미한 윤곽만이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어둠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곧 해가 떠오를 것이고 그때까지만 어둠 속에서 견뎌내기만 하면 된다. 언제 올지 모를 여명의 그때까지만을 말이다.
ps. - 위의 내용은 픽션이며 전체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등 모든것은 현실의 정치,종교,지역,인물, 기타 등 모든 것과 절대 연관이 없으며 숨겨진 뜻 같은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