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4일이었다.
힌남호 태풍이 불기 시작한 오후 3시경, 주위는 어둑해지고 비가 내렸다.
서귀포를 지나 제주시로 야채를 싣고 달리는데
인가가 없는 4차선 도로에 방호막이 보이고 무언가 검은 물체가 어른거렸다.
속도를 늦추며 "바람에 날아온 검정비니루가 걸쳐졌나 보다" 지레짐작으로
달렸는데 검은 물체가 차 앞으로 달려들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할머니는 앞으로 꼬꾸라지더니 몇 초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달려가 할머니를 일으키니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선 차에 있는 티슈로 지혈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지나가던 차들이 갓길
에 차를 세우고 119에 신고를 해주었다.
아저씨 한 분이 "삼춘, 아들 이름이 누게광?" 의식이 돌아온 할머니가 아들 이름
을 대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다.
같은 동네 사람인 것 같았다.
119 차가 오고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는데 남편이라며 할아버지가 달려오셨다.
"바람 부는데 뭐허러 나와서게" 할머니를 나무라면서도 측은하게 할머니를 쳐다
보며 손을 잡는다.
경찰은 피해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며 "치매환자 같다"면서
현장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보험사에 연락하라고 했다.
배달 시간이 급박해 달리면서 보험사에 전화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할머니는 치매환자로 검은 윗옷을 가슴에 꼭 껴안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 씌운 옷이 비바람에 날리자 옷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이미 유턴선을 지나 1차선으로 무작정
달린 것 같았다.
키 작은 할머니라 방호막에 가려져 있어 거기서 사람이 튀어나오리라 전혀 예상을
못한 내 잘못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께 환자의 상태를 들어보니 마침 추석 연휴라 중환자실에서 날뛰는 할머니
를 제어할 수 없어 침대에 팔다리를 묶어 놓았다고 전하면서 울먹였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내 가슴도 찢어지는 듯 하여 "죄송합니다" 라고 했더니
"내가 보호하지 못해 그런거니 너무 미안해 하지 말라" 며
"왜 하필 그 시간에 ...... 아주머니와 집사람의 運인가보다 생각한다"고 말씀하신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 며 외려 나를 안심시키는 할아버지가 고마웠다.
며칠 후 전화 드렸더니 "병원에서 남편만 찾는다면서 일단 집에서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해 집에 왔다"고 했다.
얼마 후, 다시 전화했더니 "집에서 며칠 있다가 다시 병원에 입원을 했고 얼마 전에
퇴원했다" 며 "이제는 전화 안 해도 된다" 면서 좀 귀찮아 하는 느낌도 있었지만 일단
은 안심했다.
한 달여 후 경찰에서 보내온 문자로 진술서를 써 문자로 보내고 48,000원 벌금을 내고
사건은 마무리 됐다.
9월 5일은 조부모님 제사였다.
이어 추석을 보내고 그 와중에도 일은 계속했다.
일주일 후, 일본에서 바이어들이 부인과 동행으로 회사에 방문했다.
4일을 관광지와 식당으로 안내하면서 서툰 일본어로 통역을 하며 몹시 피곤했지만
내색도 못했다.
서서히 아프기 시작한 몸은 입맛을 완전히 잃어 밥을 못 먹고 앓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일은 맡기고 환자가 돼 한 달 사이 4키로 몸무게가 빠졌다.
무기력해지고 피로하고 밥을 못 먹으니 집 앞 내과에 가서 수액으로 버티었다.
아들은 "엄마 증상이 코로나휴유증 같다"며 "2,3개월 휴유증으로 고생했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한 번도 코로나 백신을 안 맞았지만 열도 없고 인후통도 없었다.
'사람마다 증상이 다른가' 하고 '코로나휴유증이라면 언젠가는 낫겠지'하며 방치했다.
방치하는 사이 병은 깊어져 급기야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다.
당뇨, 혈액, 소변, 심전도검사를 했지만 이상은 없었다.
"혈액도 깨끗하니 신경정신과 찾아가는 게 좋겠다"며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경정신과를 찾아가니 "예약 안 하면 진료 안된다"며 거절 당했다.
한 달, 두 달 전에 예약을 안 하면 진료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친구들이 맛있다는 음식을 가져오고 "보신탕이 최고"라며 문 앞에 두고 가기도 했지만
먹을 수 없어 냉동실에 쳐박아 두었다.
내과에서 처방 받은 '식욕촉진제'도 효과가 없었고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한약도
지어 먹었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더 앓았다.
수면제에 취해 잠을 자고는 아침에 눈 뜨는 시간이 공포스러웠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견디어 내야 할까'
자율신경계 기능이 없어서인지 배가 차가워져 핫팩을 배에 둘렀다.
어디가 특별히 아픈 데는 없는데 시름시름 앓아 쓰러질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이 덜 붐비는 외진
병원에 입원하려고 딸에게 전화했다.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으며 다행히 신경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할 수 있었다.
의사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말하며 "소란스런 입원실 보다 집에서
안정을 취하며 약을 잘 먹고 운동을 하라"고 처방전을 주었다.
제 시간에 약을 복용하고 엘리베이터 타는 대신 계단을 세며 9층까지 오르내렸다.
근처에 있는 공원을 햇볕 받으며 매일 몇 바퀴씩 걸었고 운동기구도 남 하는 것 보면서
따라 했다.
거꾸리에 매달려 하늘을 쳐다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빛나고 있었다.
밤하늘을 쳐다본지가 언제였던가.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아직 죽는 것은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는 않으려고 억지로 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목욕탕에 자주 갔다.
언제나 늦은 저녁 시간에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아 등이 휘어져 튀어나온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몸이 많이 야윈 것 같네"
"예, 아파서 몸무게가 많이 빠졌수다. 사실은 여차여차 해서 신경과 약을 먹고 있수다."
"에구우, 그랬구나. 실례지만 나이는 몇인가?"
"작년부터 경로우대 받암수다"
"제일 좋은 나이일세그려,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터지지.
옛날의 우리 어멍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
나도 암에 걸려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갔지만 병명도 모르던 차 아산병원으로 옮겨 입원했어.
수술하기 하루 전, 90명 중 한사람에게만 맞는 약이 있다하여 그 약을 먹고 오년을 더 살고
있지"
"무슨 암이였수광?"
"너무 복잡해 설명하기 힘들어. 이녁도 너무 걱정 말어 금방 좋아질걸세"
"제가 등 밀어 드리고 싶지만 기운이 없어서....."
"자네 몸이나 생각해"하며 웃는다.
며칠 후 또 할머니를 만났다.
몹시 반색을 하며 "얼굴이 좋아졌네"
"예, 약도 잘 먹고 운동도 부지런히 했더니 많이 좋아졌수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내가 좋아진다고 했잖은가.
나도 암에 걸렸지만 아직 살아있고 이렇게 이녁도 만나는 인연이 됐잖아"
나는 없는 기운이지만 할머니 등을 열심히 밀어 드렸다.
그동안 너무 자만하고 살아왔다.
힘든 몇 고비를 넘어왔지만 겸손하지 않았고 오만에 빠져 살았다.
35년 무사고 운전을 믿고 방심한 사고는 처음에 못 느꼈던 병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아메바처럼 나를 허물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건강하다며 코로나 예방도 한 번도 안 받았고 친구들이 임플란트 했다면 웃었다.
일 년에 한 번 치과 스켈링만 한다며 매달 내는 비싼 건보료를 불평했고 건강검진도
한 번만 받았다.
그것도 딸이 하도 성화부려서.
저녁 먹으면 드러누워 TV나 보고 인터넷이나 훓었지 운동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 흔한 실손보험도 들지 않았다.
이번에 딸이 들어 놓은 실손보험 덕분에 도움이 됐지만.
이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됐다.
늦은 밤까지 택배 일을 하는 기사님이 위대해 보였고
추운 날씨에도 분리수거하는 미화원들이 위대해 보였다.
발을 절뚝거리면서도 밀감 따러 가는 할머니들이 위대해 보였고
포장마차에서 붕어빵과 떡볶이 장사하는 청년이 위대해 보였다.
"아! 나는 참 세상 모르고 살았구나"
안일한 삶에 묻혀 살아왔음을 알게 됐다.
그 할머니 말씀대로 우리 인생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고로 고통의 늪에 빠지기도 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 갈 용기를 다시 얻기도 한다.
그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린 헛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부디 몽매한 저의 경험담으로 여러분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트라우마
나 우울증이 있으면 빨리 의사와 상담하고 처방을 받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며
두서없는 글을 맺는다.
첫댓글 예상치못한 일 때문에 그동안 지키고 쌓아온것들이 한번에 날라가는 경우가 숱하게 생기죠.
그러나 그런일을 계기로 내자신과 주변이 바뀌어 새로운 마음과 몸으로 다시 시작하면 그만큼
좋은일도 없는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동안 몸 그리고 마음고생이 심하셨군요.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면서 그 이전보다 더욱더 아름답고 멋진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어방 에 그 새로운 기운을 한가득히 불어 넣어주실것을 두손모아 기대합니다.ㅎㅎ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인생의 황혼길에 들어서면
허무와 무기력감에 빠지기도 하죠.
하지만
"함무니이" 손자의 반김에
아직은 살아 있어야함을 느낍니다.
돈을 못 벌어도
자주 아파도
세대를 이어가는 삶도 소중하다는 걸.
그동안
회장님께 말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3개월 동안 사용 안 한
새카만 아이패드를 충전시키자 환하게 불이 들어오고 글을 썼지요.
열렬한 환영인사 감사드리며
자주 얼굴 내밀게요.ㅎ
아우라님 일단 반가워요~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궁금했지만
정말 많이 바쁘신가 보다 했는데..그런 아픈일들이 있으셨네요
항상 씩씩하게 열정적으로 사시는 것 같아 좋아보였어요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또 활기찬 모습 돌아올거예요
힘내세요 화이팅 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이제서야 사람이 되어 갑니다.
아프고 보니
남에게 격려와 관심을 갖는 일이
참 소중하다고 이번에 절실히 느꼈지요.
추워진 날씨에 감기 조심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