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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 제36장 강호난정 그 승려는 비록 앉아 있었지만, 마치 태산과도 같은 우람하고 굵은 목과 어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승포 밑으로 드러난 피부는 거무틱틱하기 그지없어 강인한 인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얼굴 또한 검은색이었는데, 유난히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단한 위 압감을 느끼게 해서 담력이 약한 사람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주름살 한 점 없이 팽팽한 얼굴은 나이를 알아볼 수 없게 했으나, 의외로 눈썹과 수염은 반백(半白) 을 이루고 있어 중년이 훨씬 지난 나이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정해는 그 승려를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분은 혹시 흑면백안염라승이라 불리던 흑미륵 원정대사님이 아니십니까?” 장옥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소협은 정말 눈이 날카롭군요. 여섯째 사숙님은 지난 10여년 동안 강호에는 거의 나오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한눈에 알아보다니….” 정해는 속으로 쓴웃음을 집어삼켰다. 장옥연이 일전에 팽파진의 주루에서 흑미륵 원정대사에 대해 그토록 큰소리 치지 않았다면 자신이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원정대사를 어찌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 그때 진산월의 뒤에 서 있던 뇌일평이 안광을 번뜩이며 그 승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는 것이 아 닌가? “오랜만이오. 세월이 상당히 많이 흘렀는데 그동안 전혀 변함이 없구려.” 원정대사는 이미 뇌일평이 자신을 향해 다가올 때부터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가볍게 고 개를 끄덕였다. “뇌시주가 멀쩡한데 내가 먼저 시들해질 수야 없지.” 그의 음성은 우락부락한 외모만큼이나 굵직한 것이었다. 더구나 말투가 승려답지 않게 거칠고 투박 해서 마치 시정잡배들의 그것 같았다. 하나 뇌일평은 그의 그런 말투를 익히 알고 있는지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당신은 그 일 이후 두번 다시 강호에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다시 나온 거 요?” 원정은 기광(奇光)이 번쩍거리는 눈으로 뇌일평을 슬쩍 올려보다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문사형의 부름을 받았소. 그보다 뇌시주야말로 용케 아직까지 강호에 붙어 있는구려.” 정해는 원정의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말 한번 삭막하게 하는군. 지금은 예전보다 한결 성격이 누그러졌다고 하는데도 저 정도니 과거에 는 어땠을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구나.’ 아닌게 아니라 원정대사가 과거에 강호를 횡행(橫行)할 때는 어찌나 성격이 과격하고 거칠었던지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비단 마도인(魔道人)들에게만 공포스러운 존재인 것이 아니라, 겉만 번지르르한 정파인들에게도 한없이 무서운 인물이었다. 오죽했으면 염라대왕에 비유하여 염라승 이라는 별호가 붙었겠는가? 하나 나이를 먹어 비록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격렬했던 성정(性情)이 온순해졌다 해도 그 천성적 투박함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396 원정의 시선이 뇌일봉의 뒤에 서 있는 진산월 일행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은 잠깐 진산월에게 머물 렀다가 이내 그의 옆에 있는 임영옥에게 돌려졌다. 임영옥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원정의 부리부리한 눈에 번갯불 같은 섬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원정은 한동안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임영옥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문득 의미를 알 수 없는 나직한 탄식을 토해냈다. “너는 정말 커 갈수록 네 어머니를 그대로 닮아가는구나. 올해 네 나이가 몇이냐?” “스물 하나입니다.” “스물 하나라…. 평범한 여자라면 벌써 출가(出嫁)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뤘을 나이로군.” 임영옥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차분하면서도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저는 지금의 상태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너에게 평범한 아녀자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네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로서는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름지기 여자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삶이 있는 법입니다. 대사님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제 나름의 방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원정의 유난히 검은 피부에 한 줄기 붉은빛이 피어올랐다. 그것이 상대가 자신의 말을 가로막은 것 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수치심인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종남파의 고수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염라승의 얼굴이 검붉은 빛으로 물들고, 두 눈이 흰자위로 가득하면 한바탕 피바람이 일어난다는 강 호의 소문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다행히 원정의 두 눈은 아직까지는 정상으로 보였다. 원정은 그녀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고집이 센 것도 제 어머니를 닮았군. 네 아버지는 그래도 남의 말을 경청(敬聽)할 줄 아는 사람이었 다.” 임영옥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누가 보아도 그 것은 원정의 말에 수긍할 수 없다는 뜻이 담긴 모습이었다. 이상한 것은 원정의 반응이었다. 강호의 소문대로라면 의당 이런 상황에서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 당연한데, 원정은 다만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을 뿐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인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그들이 과거에 서로 만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임영옥의 어머니와 원 정이 심상치 않은 관계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으나, 확실한 것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진 산월조차 그들 사이의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영옥이 원정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0여년 전의 일이었으며, 그 일의 발단은 그 보다 훨씬 전에 벌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임영옥의 어머니는 한때 섬서성에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유명했던 두란향(杜蘭香)이었다. 그녀는 무림의 여인이 아니라 평범한 여염집 여인이었으나, 그 미모가 워낙 빼어나 많은 명문세가의 청혼(請 婚)을 받게 되었다. 397 특히 그중에서도 그녀의 고향에서 가까운 방가장(方家莊)의 구혼은 집요할 정도였다. 그것은 방가장주 의 아들인 방귀화(方貴華)가 두란향에게 흠뻑 빠져 상사병에 걸리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두란향은 엉뚱하게도 우연히 근처에 놀러왔던 떠돌이 무사와 사이가 가까워지니, 그가 바로 임장 홍이었다. 당시 임장홍이 속해 있는 종남파는 점차로 기세가 몰락해 가고 있었고, 임장홍 또한 그리 무 재(武才)가 뛰어난 인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란향은 온순하고 차분하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의 성품에 반해 그를 선택했던 것이다. 두란향이 임장홍과 결혼하는 날, 방가장의 후계자였던 방귀화는 남들의 눈을 피해 고향을 떠나버렸다. 그는 속세를 등지기로 결심하고 멀리 사천으로 가서 아미파에 귀의(歸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년 후, 강호무림에는 검은 얼굴에 화가 나면 눈알이 새하얗게 변하는 무시무시한 괴승(怪僧)이 나타나게 되니 그가 바로 불문에 들어간 방귀화, 즉 원정이었던 것이다. 원정은 강호에 나가 엄청난 명성을 쌓았으나 마음 한 구석은 늘 텅빈 듯한 공허함에 잠겨 있었다. 그 것은 이루지 못했던 과거의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두란향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결국 원정은 더 이상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불쑥 종남파를 찾아왔다.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중년의 임장홍과 그의 어린 딸, 그리고 봉긋하게 솟은 하나의 무덤이었다. 평소부터 몸이 허 약했던 두란향은 임영옥을 출산한 후 몇년 되지 않아 병(病)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원정은 가슴 가득 타오르는 울분과 허탈함을 견디지 못하고 임장홍을 무섭게 득달하여 그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 하나 두란향을 꼭 닮은 어린 딸의 눈물이 그렁한 커다란 눈망울을 보는 순간, 원정은 분노를 삭이고 씁쓸하게 돌아서야만 했다. 그 뒤로 그는 아미산에 칩거한 채 강호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이번에 강호에 다시 나온 것은 무려 12년 만이었다. 강호에 나오자마자 다시 두란향의 딸을 만 나게 된 것은 너무나도 공교로운 우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원정의 가슴에 회오리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 원정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할지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임영옥을 대하는 원정의 태도로 보아 그의 마음 속에 아직도 두란향의 그림자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장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원정은 무언가 상념에 잠긴 듯 약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고, 임영옥 또한 그 뒤 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눈치만 살핀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모 습들이었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구나. 잘됐네.” 갑자기 등 뒤에서 짤랑짤랑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오자 중인들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곳에는 짙은 녹의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가 깜찍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를 보자 낙일방 등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다름아닌 천봉팔선 자 중의 막내인 옥봉 누산산이었던 것이다. 398 누산산은 낙일방이 자신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자 앙칼진 표정을 지으며 그를 쏘아보았다. “왜 나를 보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거예요?” 낙일방은 이 성질 급하고 고집 세며 남자를 우습게 아는 어린 낭자와 말다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춤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것도 아니오.” 누산산의 아미가 더욱 찡그러지며 귀여운 콧등이 먹이를 찾으려는 표범처럼 실룩거렸다. “아무 것도 아니라뇨? 왜 날 보고 자꾸 피하려는 거죠? 나하고는 말도 하기 싫다는 뜻인가요?” 낙일방은 정말로 이 소녀와는 입도 뻥긋하기 싫었다. 자칫 잘못하여 말 한마디라도 실수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생트집을 잡혀 한바탕 경을 칠 것이 너무도 뻔했던 것이다. 하나 그녀는 그에게 피해 나갈 틈 을 주지 않았다. “빨리 말해요. 대체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죠?” 낙일방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오. 나는 원래 표정이 이렇소. 그러니 낭자는 신경쓰지 마시오.” 누산산의 얼굴에 한 줄기 표독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신경쓰지 말라니…누가 당신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작자에게 신경쓴단 말인가요? 당신 눈에는 내가 당신에게 신경쓰고 있는 걸로 보인단 말이에요?” 낙일방의 얼굴이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그게 아니라…난 단지…단지….” 누산산은 집요하게 그를 물고 늘어졌다. “단지 무언가요?” 낙일방은 누군가가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정해는 물론이고 응계성 등도 모두 고개를 돌린 채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하긴, 누가 이토록 막무가내이고 천방지축인 어린 소녀와 의 말다툼에 끼어들고 싶겠는가? 낙일방은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서 그냥 말을 내뱉었다. “단지…소저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오.” “……!” 누산산은 두 눈을 부릅뜨며 작고 귀여운 코를 마구 벌름거렸다. 낙일방은 눈이라도 감고 싶은 심정으 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길길이 날뛰며 펄펄 뛸 줄 알았던 그녀에게서 아무런 말도 흘 러나오지 않았다. 낙일방은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하여 슬쩍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움찔 놀라고 말았다. 누산산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거린 채 입술을 꼬옥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갓 잡아올린 농어처럼 싱싱하고 팔딱거리던 그녀가 자신의 한마디에 갑자기 눈물을 보이리라 고는 상상도 못했던지라 놀랍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소…소저…” 마침내 누산산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낙일방은 황당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도움을 청했으나, 모두 쓴웃음만 머금은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네가 저질렀으니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399 낙일방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맞잡고 더듬거렸다. “소…소저…나는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난 그저…그저….” 낙일방은 ‘그저’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다음에 이을 말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낙일방이 쩔쩔 매고 있을 때, 갑자기 누산산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 았다. “건방진 자식.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나중에 여섯째 언니에게 혼나는 한이 있어도 가만두지 않겠 다!” 낙일방은 그녀의 날카로운 음성에 절로 몸이 움찔하여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그의 눈 앞에 녹색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누산산이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것 아닌가? 낙일방은 기겁을 하고 황급히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하나 그의 물러나는 속도보다 누산산의 돌진하 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짝!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낙일방의 뺨이 휙 돌아갔다. 뜻밖의 소리에 중인들은 모두 아연해졌다. 그들은 설마 이 당돌한 아가씨가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남자의 뺨을 때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하나 중인들 중 가장 놀란 사람은 졸지에 뺨을 맞은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자신의 왼쪽 뺨에 화끈 한 손자국이 남아 있는 것도 모르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니 누산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에 게 뺨을 맞았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하나 이내 그의 얼굴이 점차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노여움의 빛이었다. 그와 함께 그의 눈알이 괴이하게 번쩍거리며 코에서 거 친 숨이 흘러나왔다. 정해는 그것을 보고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 모습은 낙일방의 화가 극도로 치밀어 올라 도저 히 수습될 수 없는 폭발 직전의 상황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평상시에 성급하고 화를 잘 내 는 낙일방이었지만, 이런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한바탕 커다란 소란이 벌어지고는 했던 것이다. 급한 성격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한 낙일방으로서는 여인에게서 뺨을 맞았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칼 로 찔린 것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수모였을 것이다. 누산산은 괴이하게 변하는 낙일방의 모습이 약간은 이상하기도 하고, 약간은 흥미롭기도 한지 초롱초 롱한 눈을 반짝인 채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 어디에도 미안해 하거나 자신이 성급했다는 자책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식으로 당돌하고 도도한 기색이었다. “흐으…흐으….” 낙일방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멀리 떨어진 사람도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커졌다. 이 어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며 막 앞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하나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가만히 움켜잡았다. “일방.” 나직하면서도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 음성을 듣자 분노로 가득찼던 낙일방의 두 눈이 한차례 크게 흔들리더니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400 금시라도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뛸 것 같았던 낙일방이 단 한마디의 조용한 음성에 냉정을 되찾는다 는 것은 눈으로 보고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낙일방은 고개를 돌려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장문사형….”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조용히 어루만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말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속에는 낙일방의 심정을 모두 이해한다는 무언(無言)의 뜻이 담겨 있 었다. 진산월은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는 낙일방의 어깨를 몇 차례 가만히 두드려준 다음 천천히 누산산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천방지축으로 세상에 무서운 것을 모르고 날뛰던 누산산은 진산월이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다가 오자 처음으로 찔끔하는 표정이었다. 하나 이내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다고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여봐라, 종남파의 장문인이 아니라 그보 다 더한 놈이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그녀는 암팡진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하나 의외로 그녀의 앞에 다가온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낭자는 정소저의 전갈을 가지고 왔소?” 누산산은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런데…그걸 어떻게 알았죠?” 진산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게 전할 말이 있지 않다면 낭자가 우리를 찾아올 리 있겠소?” 누산산은 그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큰언니의 전갈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나요?” “천봉궁에서 내게 용건이 있는 사람은 정소저와 단봉공주뿐인데, 단봉공주라면 낭자가 아닌 다른 사 람을 보냈을 거요.” 진산월의 말 속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누산산은 큰 눈을 떼구르르 굴리며 무언가 생각에 잠 겨 있다가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당신의 말은 공주님이라면 나같이 버릇없고 천방지축인 사람을 보내지 않았을 거라는 뜻인가 요?”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꼭 그런 뜻은 아니지만 낭자가 굳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소.” 누산산은 귀여운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바닥을 발로 세차게 찼다. “건방진 사람. 당신은 저 기생오라비 같은 작자보다 더욱 무례하군요.” 쿵! 그녀가 한차례 발을 굴렀을 뿐인데도, 주루 전체가 마치 지진을 만난 듯 세차게 뒤흔들렸다. 주루의 점 원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모든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누산산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이 깜찍한 얼굴 에 제멋대로인 아가씨의 공력이 이토록 놀라우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허공을 응시한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원정대사조차 두 눈에 한 줄기 흥미로운 빛을 떠올린 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401 진산월은 그녀의 고함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례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낭자요. 낭자는 여인의 신분으로 함부로 남을 향해 손찌검을 했을 뿐 아 니라, 자신의 임무를 망각한 채 전할 말은 전하지 않고 오히려 시비를 벌이고 있으니 낭자의 큰언 니가 이 사실을 알면 낭자에게 무어라고 하겠소?” 누산산은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며 성난 암호랑이처럼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당장이 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로 그를 향해 소리질렀다. “누가 당신 따위의 잔소리를 듣고 싶은 줄 알아요? 큰언니가 나에게 무어라고 하든 당신이 무슨 상 관이 있단 말이에요?” 종남파 고수들의 표정이 모두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말은 일파(一派)의 장문인에게는 너무나 모 욕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강호를 호령하는 천봉궁의 인물이라고 해도 너무나 지나친 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의 얼굴에 엄격한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상관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상관이 있게 됐소. 낭자를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낭자의 큰언니 가 낭자의 고약한 말버릇을 고쳐주지 않았다고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니 말이오.” 누산산의 입술이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해졌다. 너무나 입술을 꼬옥 깨물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깨가 연방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진산월의 말에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음에 틀림없었다. 정해는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의 진산월이라면 누산산이 이보다 더 심한 말을 해도 빙긋 웃 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을 것이다. 진산월은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의 실수나 잘못은 상당히 관대 하게 넘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평상시와 달리 은근히 그녀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누산산의 성격으로 보아 ‘고약한 말버릇’ 같은 말을 듣고 참고 있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산산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돌연 앙칼진 고함을 토해내며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 다. “버릇을 고쳐준다고? 어디 고칠 수 있으면 고쳐봐라!” 정해는 이미 그녀의 얼굴이 변할 때부터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 그녀가 진산월을 향해 몸을 날리자 황 급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바로 그때, 그의 귓전으로 짤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를 막지 마라.” 그것이 진산월의 전음(傳音)임을 알아차린 정해는 내뻗었던 몸을 재빨리 멈춰 세웠다. 중인들의 눈에 녹영(綠影)이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누산산의 신형은 어느새 허공을 가로질러 진산월 의 코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하나 막 진산월을 향해 손을 내뻗으려던 누산산이 갑자기 짤막한 경호 성을 내지르며 뒤로 훌쩍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앗!” 중인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장내의 광경을 주시했다. 누산산은 진산월에게 다가설 때보 다 더욱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나 원래의 위치에 서 있었다. 어찌보면 그녀는 원래부터 제자리에 가만 히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 기세등등하던 누산산의 얼굴은 웬일인지 핼쑥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진산월이 아니라 그 뒤에 서 있는 임영옥에게로 못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402 임영옥은 여전히 죽립을 깊게 눌러쓴 채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나 시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그녀의 양손 중 오른손이 검자루를 잡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전 누산산은 막 진산월을 향해 손을 쓰려다 한 줄기 예리한 기운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의 목덜미 를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진산월의 뒤에 서 있는 임영옥이 발출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검을 뽑지 않은 상태에서 무형(無形)의 검기를 날려 누산산을 격퇴시킨 것이다. 누산산도 이것을 알았는지 표정이 여러차례 변하더니 이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흥! 과연 당신이었군요. 그 잘난 검술 솜씨를 언젠가는 한번 꼭 보려 했는데 잘 됐군요.” 임영옥은 오른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살짝 잡은 자세로 선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누산산은 그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눈빛이 차갑다 못해 표독스럽게 변하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한 척 서 있을 수 있나 보자!” 누산산의 신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무작정 빠르게 달려들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그녀의 몸은 앞뒤로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신중하게 임영옥을 향해 접근해 가고 있었다. 그녀도 속으로는 임영옥의 검술에 대해 은근히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누산산이 양쪽 어깨를 끊임없이 흔들며 앞뒤로 조금씩 이동해 가고 있는 동작은 표묘신보(飄妙神步)라 는 상승보법(上乘步法)의 일종으로, 이름 그대로 빠르면서도 신묘하기 그지없어 언제든지 공격과 수비 를 마음대로 전환할 수 있는 뛰어난 절학이었다. 언뜻 볼 때는 느린 것 같았지만,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임영옥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접 근해 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어깨의 떨림은 조금씩 그 폭이 커져서 종내에는 한 자 이상이나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함과 어지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이 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임영옥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누산산의 신형이 점차로 빨라지더니 마침내 하나의 호선을 그리며 임영옥의 전면으로 빛살처럼 쏘아져 갔다. 그것은 마치 수십명의 누산산이 한 곳을 향해 일제히 날아가는 것과 같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앗?”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아마 임영옥이 누산산의 신들린 듯한 동작을 막지 못하고 맥 없이 쓰러지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 맹렬한 기세로 임영옥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던 누산산의 몸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대체 임영옥을 난자분시할 듯 무섭게 몰아쳐가던 누산산이 왜 갑자기 신형을 멈춘 것일까?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누산산의 턱 밑 한 치도 안되는 곳에 임영옥의 검집 끝부분이 자리해 있는 것이 아닌가? 누산산의 몸 이 조금만 더 앞으로 다가왔더라도 영락없이 그 검집에 목덜미를 격중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비록 검 봉(劒鋒)이 아니라 검집이라고 해도 급소인 목덜미에 맞았다면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을 것이 뻔했다. 403 누산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자신의 턱 밑에 있는 검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그 검집이 언제 어떻게 자신의 턱밑까지 접근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임영옥은 처음의 자세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단지 오른손에 가볍게 쥐고 있던 검을 검집째 위 로 살짝 들어올린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단순해 보이는 동작 하나로 무섭게 돌진해 오던 누산산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나 언뜻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그것은 시기와 속도, 그리고 방위(方位)가 완벽하지 않으 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동작이었다. 누산산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금세라도 그녀의 목덜미를 관통할 듯 목젖 바로 아래 위치한 검집의 끝에서 한가닥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와 그녀의 심령(心靈)을 제압하고 있기 때문 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조금만 더 시간이 경과했다면 비록 검에 찔리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누산산은 검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막중한 내상(內傷)을 입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임영옥은 아슬아슬한 순간에 검집을 거둬들였다. “휴우….” 중인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누산산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 누산산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연유야 어찌됐건 종남파는 천봉궁이라는 거대한 세력 을 적(敵)으로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산산은 한 차례 몸을 떨더니 은은한 두려움이 감도는 눈빛으로 임영옥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마도 조 금전의 일로 크게 혼이 난 모양이었다. 임영옥은 죽립 사이로 수정(水晶)처럼 맑고 차갑게 반짝이는 눈으로 누산산을 응시하며 나직하면서도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줄 때는 삼갈 줄도 알아야겠지.” 누산산의 눈빛이 세차게 떨렸다. ‘어…어리광을 부린다고?’ 사실 그녀는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깜찍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그녀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고 함부로 행동을 하는 것도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언제 이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있겠는가? 그녀로서는 오늘 당한 일들이 난생 처음 겪어보 는 수모와 치욕의 연속이었다. 누산산의 얼굴은 보는 사람이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갑자기 누산산은 발을 한 차례 구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주루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막 주루 밖으로 사라지려던 누산산은 웬일인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중인들이 어리둥절하여 그녀를 쳐다봤으나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진산월만을 똑바로 주시했다. “큰언니의 말을 전하겠어요. 물건은 원래의 주인을 찾아갔고, 물건의 주인은 사례하기를 원해요. 그러 니 날짜와 시간을 정하면 정식으로 초대하겠다고 하더군요.” 대부분의 중인들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었다. 하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404 진산월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로 사례받기를 원치는 않지만 초대해 준다면 기꺼이 응하겠소. 오늘 저녁이라면 아무 때나 괜찮다고 전하시오.” 누산산은 그의 대답을 듣자 이제는 할 일이 모두 끝났다는 듯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리더니 이내 주 루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정해는 그녀의 몸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재빨리 진산월에게로 다가왔다. “장문사형. 물건의 주인이라면….” 진산월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어 그의 말을 제지시킨 후 원정을 향해 포권을 했다. “대사께서 별다른 용무가 없다면 우리는 저쪽으로 가서 식사를 하겠습니다.” 원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산월 일행이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구석자리로 가자 장옥연이 아미를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여기는 자리도 넓은데 합석하면 되지, 왜 굳이 일부러 저런 구석으로 가는 거야? 우리와는 한자리에 있기도 싫단 말인가?” 그때 원정과 함께 앉아 있던 세 명의 젊은 승려 중 한 명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매는 그 젊은 시주와 함께 있고 싶은가 보군. 정 그렇다면 그 시주만 이리로 불러오면 될 게 아 닌가?” 장옥연의 얼굴에 한 줄기 붉은빛이 떠올랐다. 하나 장옥연은 이내 그를 쏘아보며 뾰로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흥!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면 오사형(五師兄)이 가서 그를 불러오지 그래요.” 그 승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사매의 부탁이라고 하면 그 시주도 사양치 못할 게 아닌가?” 이어 그가 진짜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장옥연은 기겁을 하며 펄쩍 뛰었다. “지금 뭘 하려는 거예요?” “뭘 하긴. 사매의 소원대로 그 시주를 이리로 데려오려고 하는 거지.” 장옥연은 꽥 소리를 질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자리에 앉아요!” 자신보다 훨씬 어린 사매의 호통을 들으면서도 그 승려는 넉살좋은 웃음을 흘렸다. “싫으면 할 수 없고…아무튼 생기긴 참 잘생긴 시주로군.” 그가 다시 자리에 앉자 장옥연은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하나 다음 순 간 은근히 약이 올라서 샐쭉한 눈으로 그 승려를 흘겨 보았다. “오사형. 자꾸 나를 놀리는데, 어디 두고 봐요. 다음에 반드시 오늘 일을 후회하도록 만들테니….” 그 승려는 찔끔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굽실거렸다. “아이구…귀여운 사매, 제발 이 못난 사형 좀 살려줘. 사매가 조금만 못살게 굴면 난 아마 머리통이 온 통 새빨갛게 변하고 말거야.” 장옥연은 화를 내려다 이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깔깔거렸다. “호호…오사형의 머리통은 이미 빨간데 왜 내 핑계를 대고 그래요?” 아닌 게 아니라, 그 승려의 머리는 유난히 붉은빛이 많이 감돌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제법 준수한 편인 데, 얼굴은 물론이고 박박 깎은 머리까지 은은히 붉은색을 띠고 있어서 조금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 키고 있었다. 하나 주변의 무림인들은 이 말을 듣자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 승려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405 아미파의 일대제자 중 홍두타(紅頭陀) 계명(戒明)은 무공이 탁월할 뿐 아니라 재주가 많고 정의감도 투 철하여 아미파의 자랑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장옥연의 오사형인 이 쾌활한 젊은 승려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홍두타 계명임을 알고 놀 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 보니 계명뿐 아니라 다른 두 명의 젊은 승려들도 하나같이 신태비범한 모습이었다. 그들 또한 아미파의 일대제자들로, 키가 큰 승려가 독나한(毒羅漢) 계조(戒躁), 키가 작고 조금 통통한 승려가 온 미륵(溫彌勒) 계통(戒通)이었다. 계조는 평소에는 온순하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일단 손을 쓰면 불문(佛門)의 제자 답지 않게 날카롭고 독랄한 수법을 사용하여 독나한이란 별호가 붙게 되었다. 반면에 계통은 화를 잘 내고 급한 성격이면서도 실제로 싸움이 벌어지면 좀처럼 살수(殺手)를 쓰지 않아 온미륵이라고 했 다. 두 사람은 서로 대조적인 성격에 사용하는 무공 또한 판이해서, 아미파에서는 그들을 쌍이승(雙異僧)이 라고 불렀다. 쌍이승과 홍두타라면 아미파의 일대제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재들인데, 이들과 염라승 원정이 한 자 리에 앉아 있으니 실로 보기 드문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아미파의 고수들이 앉은 곳에서 가장 멀리에 자리를 잡은 진산월 일행은 별다른 말 없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낙일방이 진산월을 향해 무언가를 물어보려 했으나, 눈치빠른 정해의 제지로 급히 입을 다문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묵묵히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를 깬 것은 뜻밖에도 뇌일봉이었다. 뇌일봉은 신광(神光)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 하며 불쑥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뇌일봉은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물었다. “조금전에 천봉궁의 어린 계집애가 말한 물건이란 것은 혹시 봉황금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냐?” 진산월은 순순히 시인을 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물건의 주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 봉황금시라면 의당 천봉궁의 물건일 텐데, 그녀 의 말하는 투로 보아 물건의 주인이 천봉궁의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 듯하여 의아한 생각이 드는구 나.”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진산월에게 쏠렸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뇌일봉과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봉황금시가 강호에 알려진 대로 천봉궁의 물건이라면 봉황금시의 주인은 곧 천봉궁주일 텐데, 물건의 주인이 진짜 천봉궁주였다면 아무리 천방지축인 누산산이라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잠시 망설였다. 하나 질문을 한 사람이 그에게는 사숙뻘인 뇌일봉이어서 무작정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마음을 결정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천봉궁주는 봉황금시를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현재의 봉황금시의 주인은 그 사람의 후 인(後人)입니다.” 406 뇌일봉은 급히 물었다. “천봉궁주가 봉황금시를 주었다는 그 친구가 누구냐?” “그는 모용대협입니다.” 진산월은 정확한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나, 단지 모용대협이라는 말만으로도 뇌일봉을 비롯한 중인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강호(江湖)가 아무리 넓고 기인이사가 장강(長江)의 모래알처럼 많다 해도 무림인들이 서슴없이 대협(大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일세대협(一世大俠) 모용단죽 외에 달리 누가 있단 말인가? 뇌일봉은 무거운 표정으로 침음했다. “음…모용대협이 천봉궁주와 절친한 사이였다니 의외로군. 그렇다면 봉황금시의 주인은 모용공자(慕 容公子)로구나.” “그렇습니다.” 천하에 대협이 오직 한 사람뿐이듯, 모용세가에도 공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모용봉은 비록 강호무림에 정식으로 출도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오래전부터 그 이름만은 모든 강호인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것은 모용대협이 그를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공 언(公言)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강호는 이 아이가 책임질 것이오.” 이것은 5년 전 구대문파 장문인(掌門人)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모용단죽이 직접 한 말이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모용단죽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홍안(紅顔)의 어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림사의 장문인인 대방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말씀은….” “나는 이제 강호를 은퇴할 것이오. 하나 멀지 않아 이 아이가 무림의 커다란 봉우리가 되어 강호를 지 킬 것이니 여러분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그때부터 모용봉의 전설(傳說)은 시작되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당금 강호의 제1인자인 모용단죽이 스스로의 입으로 공언한 미래의 천하제일고수! 그뒤 모용단죽과 모용봉의 모습은 강호에서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구구한 억측을 뒤로 한 채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소문과 전설이 생겨났는가? 혹자는 그들이 깊은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희대(稀代)의 무학(武學)을 연마하고 있다고 했고, 혹자는 그들이 모용세가의 깊숙한 절지(絶地)에서 모용단죽조차 익히지 못했던 모용세가의 마지막 절학(絶學) 을 익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모용단죽이 모용봉에게 자신의 진원지기(眞元之氣)까지 아낌없이 전수하고는 세상을 떠났다고도 했다. 그중 어느 것도 확인된 것은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모용봉이 조만간 강호의 제1고수가 되어 자신들의 앞에 다시 나타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모용단죽이 결코 허언(虛言)을 할 리 없 다는 사람들의 철석 같은 믿음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모용봉의 재질보다는 모용단죽의 인간성을 더욱 신뢰했던 것이다. 407 뇌일봉은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이미 모용공자를 만나보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너는 그에게 순순히 봉황금시를 넘겨주었단 말이냐?” 진산월은 뇌일봉이 왜 봉황금시에 대해 이토록 집요하게 물어보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봉황금시는 원래 모용대협의 물건이었으며, 모용공자는 그것을 회수하기 위해 강호에 나왔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물건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뇌일봉은 한차례 움찔거리다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네 행동이 옳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봉황금시 때문에 그동안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 는데, 그토록 수월하게 돌려줬다니 공연히 아쉬운 생각이 드는구나.”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달리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커다란 짐이었던 그 물건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됐으니 무거운 부담 하나 를 덜게 된 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뇌일봉은 진산월의 넉살 좋은 대답에 어이가 없었던지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모든 무림인들이 탐내 는 천하의 보물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진산월의 머리 속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뇌일봉은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구나. 아무튼 그건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려무나. 그건 그렇고 모용공자의 초대에는 응할 생각이냐?” “그렇습니다.” “그가 정말로 단순히 봉황금시를 돌려준 것에 대한 사례를 하려고 너를 초대한다고 생각하느냐?” “그의 속마음까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단지 상대가 정중히 초청을 해온다면 특별한 이유가 없 는 한 초대에 응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뇌일봉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네놈의 그 느긋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하지만 강호라는 곳이 그렇게 단순하고 호의적인 곳만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산월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그제야 뇌일봉은 굳었던 표정을 풀며 천천히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대충 미시가 된 것 같구나. 슬슬 대회장으로 다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중인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대부분의 무림인들도 어느새 주루 밖으로 사라져 주루는 금세 한산한 모습이었다. 중인들이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이미 많은 무림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무림집회가 벌어지 는 초조암 앞의 공터로 모여들고 있었다. 집회장에는 구파일방을 비롯한 명문정파의 고수들이 대부분 자리에 나와 있었고, 상당수의 무림인들 이 주위를 빽빽이 에워싸고 있었다. 어찌 보면 무림대회가 시작된 오전보다도 더욱 많은 군웅들이 운 집하는 것 같았다. |
첫댓글 ㅈㄷㄱ~~~~~~`````````
즐감요 감사합니다~^^
잘밨어요
즐독입니다
ㅈㄷㄳ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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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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