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군역의 의무가 있었고 검열을 위해 소환될 수 있었다. 단, 그럴 때면 가장 좋은 장비만 쓰였지만. 스스로 적절한 장비를 갖출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가난한 테마 군인은 군사적 하인이 되거나, 비정규병(문자 그대로 하면‘염소 도둑’으로 알려진)혹은 쩨코네스-Dzekones-주둔 부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10세기 즈음 그리고 아마도 어쩌면 보다 일찍, 동부 테마 군인은 그의 무슬림 상대편과 거의 같아져 있었다. 하지만 물론 당시 이슬람 쪽의 변경 부대는 기원이 여럿인 혼성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란인 기병, 개종한 슬라브 탈영병 그리고 7~10세기 동안 안티오키아, 킬리키아 그리고 타우루스 산맥에 거주해오고 있는 시리아의 아랍인 등.
비잔티움쪽의 이란인 망명자들은 9세기에 별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흑해 연안에 정착했다.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골짜기에서 온 투르크인들은 숙련된 기마 궁수로 비잔티움 군대에 비슷하게 통합되었으며, 흑해 북쪽의 유대교화된 광할한 투르크 칸국에서 온, 하자르인들은 동맹군 그리고 용병으로 종사했다.
비잔티움의 이슬람 아랍인 전쟁 포로들과의 관계는 상당히 친절하고 따뜻했으며, 제국은 이 숙련된 전사들이 개종해서 제국의 군사적 잠재성에 추가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그런 포로들이 오면 특별한 예식이 동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신호에서는 엎드리는 반면 경비병들은 창을 거꾸로 잡았던 것 같으며, 두 번째 신호에서는 다시 일어서는 한편 경비병들은 창을 위로 고쳐 잡았다. 아랍인 포로들은 수도에서 히포드룸 경주를 관람했고, 허리띠가 없는 하얀 튜닉을 입은 상태에서 연회에 참석했다. 그들은 모스크 하나를 소유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 성벽을 불가르인들에게서 지키는 데 최소한 한 번은 도움을 준 바 있다.
전술
‘그림자 전쟁’이란 게릴라 개념은 여전히 10세기에도 비잔티움 전략의 중심이었지만, 제국이 이슬람 이웃들에 대해 공세적 정책을 채택하면서 동부 테마 군대의 기병 구성 비율이 높아졌다.
비잔티움은 다양한 면에서 그들의 아랍 적들인‘이슈마엘라이트들’을 베꼈거나, 혹은 채택했다. 적극적으로 적의 계획에 대한 첩보를 구했고, 습격의 때-Season-가 시작되기 전에는 적의 영역에 상인을 가장한 스파이를 투입했다. 농사꾼 복장을 한 군인들을 습격자들의 예상 침투로에 남겨두기도 하는 한편, 위장을 위해 칙칙한 색상의 서코트인 에파노클리바니아를 입은 다른 군인은 비잔티움의 영역을 통과하는 적을 감시했다.
사카(아랍어 사콰흐-Saqah-에서 연원했다.)로 알려지는 후위를 방어하는 소규모 기병대는, 주력 부대 보다 여러 날-Several Days-먼저 파견되어, 적보다 앞서서 후퇴할 수도 있었다.
이 선봉대의 임무는 해당 지역을 조사하고 침입자의 구획들을 선별하는 것이었다. 비잔티움의 부대들은 그 다음에는, 이런 진격 구획들을 차단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적에게 매복을 할 때면 군인들은 도로 양편에 배치되어야 했고, 어느 정도 완전히 잘못 짚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기병의 지원을 받았다. 적이 본거지로 돌아갈 때 타격하는 게 더욱 쉬운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지휘자들은 중기병을 전위로 쓰는 건 적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는 때에만 하도록 조언 받았다.
이상적인 비잔티움 지휘관은 기병은 개방된 지역에 자리를 잡는 반면 보병은 높은 곳을 선점하게 하면서, 적보다 앞서서 울퉁불퉁한 지형을 점유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보병은, 궁사와 투창 투척자의 전면에 방패 든 자가 서도록 하고 또 이들 양 옆에도 궁사와 투창 투척자를 세워서, 좁은 골짜기를 차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 아랍 습격대도, 그들 뒤를 미행 중인 자들을 잡기 위해 자주 매복을 남겨 두었다. 그들은 비잔티움의 공격을 받을 경우 약탈자들이 후퇴할 수 있도록, 그 뒤에서 방패 벽을 형성할 엄선된 보병도 일부러 떼어 놓았다.
레오 6세의 탁티카는 비잔티움의 궁사들이 이슬람측의 말을 노려서 독화살을 쏘도록 조언하며, 이는 슬라브족에게서 받아들인 전술일지 모른다. 10세기 즈음의 비잔티움 활은 길이가 거의 1.5m에 달했고 화살의 그것은 0.7m였다.
6세기에 처음 언급되는 솔레나리온도 흔한 경보병 무기가 되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의 불이었다-열 사람을 커버할’수 있을 불길을 토하는 사이펀관은 비잔티움의 주요 군사적인 발전 중 하나였고, 공성전에 더해 이따금씩 개활지에서의 전투에서도 쓰였다.
첫댓글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합성궁을 안 썼나봐요. 1.5m 면 거의 웨일스장궁 사이즈 아닌가요?
물론 이슬람쪽 병사들도 동로마쪽의 군장을 배꼈겠죠?
네. 기병 무장이나 편제에서 상당한 모방이 있었습니다.
서로 싸워가면서 교훈도 얻고 서로 좋은게 있으면 채용하고 그랬던 모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