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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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가벼운 교통 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읍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와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者도 아닌 죽은 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문학과지성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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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와 빤쓰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스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 『손』(문학세계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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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아버지 구순 생신 때, 형과 나눈 대홥니다.
-너 요즘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봤냐?
-아니. 넷플릭스 안 봐.
-아이유 연기가 물이 올랐더라.
-아이유가 연기도 해?
-그럼 <나의 아저씨>도 안 봤어?
-키다리 아저씨?
-아니 아이유 나오는 드라만데 그거라도 꼭 봐라.
그렇게 해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게 되었는데,
극중에서 이선균(박동훈 역)의 동생 기훈 역을 맡은 송새벽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오만 원에서 몇 백 원 빠지는 거 사 입어. 내가 오늘 죽어도 뭐 교통사고 당해 죽든 강도 당해 죽든
병원에 실려가 빨개벗겨놔도 절대로 기죽지 않게 비싼 팬티 사 입어. 형은 얼마 짜리 사 입어? 이거는 되게 중요한 거야. 죽어서는 쪽팔린 거 대책이 없어. 죽어서는 팬티 못 갈아입어. 오늘 죽어도 쪽팔리지 않게 매일 매일 비싼 팬티 입고 비장하게 산다는 거야."
그 순간 떠오른 시가 바로 오늘 띄우는 두 편의 시였습니다. 드라마 작가도 어쩌면 오규원, 손현숙 두 분의 시를 이미 알고 있었을까요?
지난주 일주일 내내 감기를 지독하게 앓았습니다.
이번 주에는 이 지독한 감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2025. 3. 24.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첫댓글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꽃무늬 내복을 입었었던 기억이 납니다. 곧 수의로 갈아입게 되었지만요.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더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더 와 닿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잘 드시고 감기신 물리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