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오기 전에 나는 모든 책을 다 팔아버렸
다. 헌책방 할아버지가 내 방에 와 내가 십 년
동안 간직하며 이사할 때마다 질질 끌어온 글자
의 떼를 모조리 데리고 가셨다. 잘 가요, 내 책
들아. 그것은 무척 무거웠다. <책이란 참 무겁군
요> 내가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럼
요. 아무래도 원래가 나무였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책 한 권 안 가지고 여기에 왔다.
일본말로 나무는 KI라고 하며 한국말로는
NAMU라고 한다. 십 년 전에 처음 한국말을 배
웠을 때 <나무>란 낱말이 나의 가슴속으로 뿌리
를 박았었다. 한국에 온 지 두 달 동안 줄곧 아
래만 보면서 돌아다녔는데 유월이 되고 처음으로
눈을 들어 봤더니 그들이 잎사귀를 살랑거리며
서 있었다. 그들을 <나무> 하고 부르면 내 속에
서 <나무>가 답례했다. 십 년 공들여 간신히 푸
르게 자란 잎사귀들이 눈부시게 펄럭이면서.
<한국에 유학 가기로 했어요. 이 년이나 지나
야 돌아올 거예요> 내가 그렇게 했더니 할아버지
는 책에 쌓인 먼지를 닦으면서 말했다. <그 무렵
에 나는 살아 있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꾸린 책
을 헌 트럭에 싣고 나갔다. <잘 가시오, 열심히
공부하세요> 하면서. 그가 평생 동안 얼마나 책
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할
아버지가 전에도 책을 사러 내 방에 왔을 때 한
사회심리학 책을 들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
다. <이 책은요 삼 년 전만해도 잘 팔렸는데 요
즘은 통 안나가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안 팔기
로 할게요. 사실은 자도 아직 안 읽어봤거든요>
<그게 좋을 거예요. 한번 읽어보시면 아주 좋을
거예요>
그래도 끝내 그 책을 읽지 않은 채 나는 떠나
게 됐지만.
여기 와서 나는 또 많은 책을 샀다. 나무 밑에
서 책을 읽으면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볕 모양
대로 생각이 흩어져 간다. 한 권의 책은 많은 나
뭇잎들의 역사로 가득 차 있다. 말을 잃어버릴
때야 침묵은 어느 나라 말도 아니며 어느 나라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한 권券의 말이 한 그루 나무의 삶과 어울릴 줄
안다면 어느 나라 말이라도 좋다.
말이 한 그루 나무의 내력을 지켜줄 줄 알고
그 나무를 키웠던 지하수 한 방울 한 방울까지도
엎지르지 않고 괴롭히지 않고 삼켜줄 줄 안다면.
다른 나무들이 다 벌거벗게 된 다음에도 푸른
잎사귀를 살랑거리며 서 있는 가로수 한 그루.
그것은 끝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는 눈과 같다.
또는 눈뜬 사람들 속에서 홀로 명목瞑目하는 사람 같
다. 나무들이 가장 싱싱하게 살아 있어 보이던
그 유월에는 다른 어느 나무와도 다름이 없게 보
였던 그 나무. 그리고 다음날 내가 본 것은 그
나뭇잎사귀 사이사이에 모여 앉아 지저귀고 있
는 참새들. 설레는 가슴처럼 들끓으며 서 있는
가로수 단 한 그루. 마치 말이 되기도 전에 사상
을 달래는 꿈과 같이.
[입국], 민음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