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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해체될 때 왕조와 함께 백성과 영토의 대부분이 당나라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일단 고구려의 무게중심은 당나라로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뒤이은 발해가 고구려의 백성과 영토의 상당부분을 흡수했지만 발해 또한 요나라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지금의 중국 속으로 녹아들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백성과 영토의 일부가 신라에 흡수되기도 했고 또 그 활동영역의 많은 부분이 한반도에 걸쳐 있었으므로 한국사에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한민족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고구려가 한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했고 한민족의 인적 구성에도 크게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민족사로 보기는 힘들다.
한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구려의 활동무대가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더구나 평양을 도읍으로 삼기도 했으므로 고구려는 한국사의 일부가 된다. 또 한민족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고구려인의 일부가 한민족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한편 고구려는 또한 중국사로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먼저 고구려 왕조를 구성하였던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핵심 세력이 어떻게 되었나 살펴보자.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은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자 당나라로 끌려가 사평태상백원외동정이라는 직함을 받는다. 그리고 677년에는 요동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요동주도독 조선군왕에 임명되어 당나라의 여러 주로 흩어진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681년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부흥을 도모한다는 혐의로 유배되어 이듬해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당나라는 그를 위위경으로 추증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686년 보장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고 698년에는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충성국왕에 봉해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다. 그러자 당나라는 699년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그 이후에는 안동이 점차 나라를 이루어 818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치기도 했다.
고구려말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은 연개소문이 죽자 대막리지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그러나 지방을 순시하던 도중에 동생들이 정변을 일으켜 평양을 장악하고 자신의 아들을 죽이자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그리고 거듭 당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당나라는 연남생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그러자 연남생은 휘하의 국내성 등 6개성의 백성과 당나라 군사에 의하여 공략된 3개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그들과 합세하게 된다. 당나라는 즉시 그를 사지절요동대도독 상주국현토군개국공 식읍 3천호에 봉하고 고려 정벌군의 앞잡이로 내세워 평양성을 함락시킨다. 그 공으로 그는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에 제수되고 변국공 식읍 3천호에 봉하여진다. 그 뒤 당나라의 수도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당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기자 677년 그 관리로 임용되어 일하다 679년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연남산은 대막리지였던 형 연남생이 지방을 순시하는 틈을 타 작은 형 연남건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조카 연헌충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연남생이 당군의 앞잡이가 되어 평양성을 포위하자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하였다. 그 뒤 당나라로부터 사재소경에 봉하여지고 당나라의 수도에 거주하였었는데 작위는 요양군개국공에 이르렀다.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은 아버지가 고구려에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당나라에 파견되었는데 당나라는 그런 그에게 우무위장군이란 직함을 내리고 수레, 말, 비단 및 보도를 주어 국내성으로 돌려보낸다. 이후 평양성이 함락되자 연헌성은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우림위를 겸하였다. 그러나 후일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만다. 측천무후가 뒷날 그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을 추증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개장하였다.
이렇게 당나라로 흡수된 연개소문의 후손들은 모두 성을 '연(淵)'에서 '천(泉)'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당시 당나라 황제의 이름이 이연(李淵)으로 황제의 이름과 글자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세 사람의 무덤은 모두 뤄양에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패망한 후의 과정을 살펴보면 고구려 왕조를 구성했던 핵심 세력은 대부분 당나라의 귀족이나 관리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고구려가 패망한 후에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중국의 광명일보가 고구려의 패망이후 주민들의 이동을 추정한 자료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중국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그 자료를 보면 고구려인의 3/5은 당나라로 흡수되고 1/5만 신라로 온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려의 인적구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고구려는 원래 부여사람이 졸본에서 세운 나라다. 그리고 후기에는 낙랑군의 중심지였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700여년의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하면서 국가의 주도세력을 중심으로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종족이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중국학자들은 이를 구려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는 이 고구려인을 중심으로 해서 주변의 말갈 등 여러 민족을 포함하는 다종족국가였다.
다시 중국학자들이 추정한 내용으로 돌아가서, 고구려의 패망 당시 고구려에는 69만여 호가 있었는데 이중 15만여 호가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며 인구로는 70여만 명이 된다고 한다. 이 70여만 명 중 30여만 명은 당나라 내 각지로 흩어지고 10여만 명은 신라로 왔으며 10여만 명은 말갈로 갔고 1만여 명은 돌궐로 갔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20여만 명은 유민이 되어 흩어지거나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인의 1/5정도만 신라로 왔다는 것인데 그 수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이 있을 수 있지만 고구려인의 일부만이 신라로 흡수되었다고 하는 경향은 뒤집을 수 없을 것이다.
흔히 요동지역의 여러 종족들을 세 갈래로 분류한다. 예맥계, 동호계 그리고 숙신계가 바로 그것인데 예맥계는 조선, 부여 그리고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이고 동호계는 몽골, 거란 등의 종족을 말하며 숙신계는 말갈, 여진 등으로 불린 종족을 통칭한다. 고구려는 다종족 국가이므로 예맥계뿐만 아니라 동호계와 숙신계 종족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 고구려인이라고 하면 예맥계만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해체는 고구려를 구성했던 여러 종족 중에서 예맥계가 소멸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해체 이후로 예맥계는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역사무대에서 급속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이 당나라로 많이 흡수되었다는 사실은 당나라에서 큰 활약을 했던 고구려 후예들의 사례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고구려 후예로서 당나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천남생, 고선지, 왕모중, 왕사례, 이정기 등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고선지는 당나라로 사민된 고구려인의 후손인데 그의 아버지 고산계도 군공을 세워 당나라의 장수가 된 사람이었다. 고선지는 747년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티벳의 군사기지인 연운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힌두쿠시 준령을 넘어 소발율국의 수도 노월성을 점령하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차단하였다. 750년에는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을 토벌하고 그 나라의 국왕을 포로로 잡아왔다. 751년에는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연합하여 쳐들어오자 7만의 정벌군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 제지 기술자에 의해 중국의 제지법이 서방으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755년 안녹산의 난이 발생하자 이을 평정하기 위해 출전하였으나 누명을 쓰고 참수되었다.
고구려후손인 왕사례 또한 755년 일어난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사공에 이르렀다. 그이 아버지도 당나라 삭방군의 장교였었다. 이정기도 당나라로 이주한 고구려 사민의 후예였다. 그는 안사의 난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이 되었다가 765년에는 고종사촌형인 절도사 후희일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올랐다. 이후 전쟁이나 반란군 토벌에 여러 차례 참여하여 공을 세우면서 15주를 차지하는 큰 세력이 되었고 778년에는 당나라 황실호적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781년 그가 죽었을 때에는 관직이 평로치청절도관찰사 사도태자태보동 중서문하평장사였는데 이 직위는 그의 아들 이납에게 이어졌다가 792년에는 이납의 아들 이사고에게 이어졌고 806년에는 이사고의 동생 이사도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사도는 당나라 조정과 대립하다 819년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다음으로 고구려가 패망했을 때 고구려의 영토는 누가 차지했는지 살펴보자. 위의 두 지도를 보면 고구려가 해체될 때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의 영토가 얼마나 작았던가 하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선양동아연구중심의 손진기 교수는 고구려가 해체될 때 고구려 토지의 1/3과 고구려 인민의 1/4만이 신라로 왔다고 추정하고 있다. 영토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도 신라는 고구려의 일부만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국학자들의 주장만 소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한국 학자들이 이러한 수치자료를 제시한 것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들을 종합해 보면 왕조, 백성 그리고 영토 이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어느 면으로 보나 고구려의 중심은 신라가 아니라 당나라로 이동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고구려가 해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는 발해가 건국되고 그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과 영토를 상당부분 차지하게 되지만 발해 또한 요나라에 흡수되어 최종적으로는 오늘날의 중국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따라서 고구려사는 한국사와 중국사에 모두 걸쳐져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진다면 아무래도 중국사 쪽으로 기운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객관적일 것이다.
발해는 중국사다. 어떤 사람은 고구려가 패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여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며 그 발해가 패망할 때 왕자 대광현과 수만의 발해유민들이 왕씨고려로 왔으니 결국 고구려는 왕씨고려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중국의 구당서에 의하면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으로 당나라의 영주에 살다가 당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699년에 진국을 세운 것으로 나온다. 이 진국은 713년 대조영이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 받게 되면서부터 발해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신당서에는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던 속말말갈족 출신이었다고 나온다.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틈을 타서 걸걸중상은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하는데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그가 죽자 아들 대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걸사비우의 무리와 함께 이해고의 추격군을 격파하고 이어 진국을 세운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대조영이 고구려인이었는지 말갈족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당서에는 속말말갈인이라고 나오고 구당서에도 고구려인이라 하지 않고 고구려의 별종이라 했으니 당시 고구려가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다종족국가였음을 생각해 볼 때 말갈족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더 객관적일 것이다. 설사 대조영이 고구려인이었다 하더라도 백성의 대부분이 말갈족이었다면 발해의 정체성은 말갈이지 고구려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기자가 상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기씨조선이 상나라의 계승국이 될 수 없고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위씨조선이 연나라의 분국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거의 모든 사서에서 발해를 굳이 ‘발해말갈’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발해는 926년 요나라에 병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유민이 왕씨고려로 유입된다. 특히 발해의 왕자 대광현은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934년 왕씨고려로 망명하였는데 왕건은 그들을 환대하고 대광현에게는 왕계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박옥걸 아주대 교수는 왕씨고려로 귀화해 온 외부사람들을 출신별로 통계를 내었는데 발해유민은 12만 2,268명 여진족은 9만 7,662명 그리고 몽골인은 1만 3,273명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를 들어 발해가 왕씨고려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발해의 왕족과 귀족의 대부분은 요나라의 귀족과 관리로 편입되었고 국토의 대부분과 300만 정도로 추정되는 백성의 대부분도 요나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할 때는 이러한 제3국으로의 소수 이탈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백제가 망할 때는 백성 12,000명이 왕과 왕족 그리고 고관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그렇다고 백제는 당나라로 흡수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 고구려가 망할 무렵에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을 이끌고 666년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이 함락된 후에는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669년 고구려 주민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를 들어 고구려가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는 전체의 큰 흐름에 비한다면 작은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발해는 요나라를 거쳐 오늘의 중국 속으로 녹아들었다고 봐야하며 발해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봐야 한다. 물론 발해의 영토 중 일부분이 현재 한민족의 영토에 속해 있고 일부 주민들이 왕씨고려로 오기도 했기 때문에 한국사와 전혀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에 비하면 발해는 한국사에 걸쳐져 있는 정도가 매우 미미하다.
고구려의 의미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신라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서로 이질적인 세 나라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삼한일통을 강조하게 된다. 원래 삼한이란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을 통틀어 일컫는 의미였지만 삼한통일에서 말하는 삼한은 신라, 백제 그리고 고구려를 아우르는 의미였다. 그 삼한을 하나로 통합하여 지긋지긋한 전쟁을 이제 그만하자는 뜻이었는데 실제로 신라의 통일 이후 한반도는 유례없는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삼한에 포함된 신라, 백제 그리고 고구려는 한반도라는 하나의 그릇에 담겨져 있어 지리적으로 밀접한 관계였을 뿐 원래부터 동질성과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라가 '삼한일통'을 내세운 것은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고 '내선일체'를 내세운 것이나 56개 민족을 통합해야 하는 중국이 '중화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이질적인 구성원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사와 중국사에 모두 걸쳐져 있지만 그 무게중심은 중국에 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은 보통 이런 반응을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논리네. 그럼 중국이 옛 고구려 땅이었던 한강 이북을 돌려달라고 할 거 아니냐?" 이 반응에는 몇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 고구려의 정체성을 따지는데 영토문제를 고려했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정체성과 현재의 영토소유권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또 영토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고구려인이 한민족이 아닌데도 한민족이라고 거짓 주장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둘째, 고구려가 중국사로 분류된다면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토가 중국의 영토가 되는 걸로 착각했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존속했던 기간은 약 700여년이다. 그 이전에는 다른 세력이 그 영토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근래 수 백 년 동안은 한민족이 그 지역을 차지해 왔다. 고구려가 존속했던 때를 기준으로 모든 나라의 국경선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여러 나라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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