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홍상수와 김기덕은 닮았다. 나의 이런 발언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지만, 현재 한국영화를 대표하며 세계적 감독으로 성장한 이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르지만 그러나 묘하게도 닮아 있다. 김기덕은 최근의 [괴물] 파동에서 드러나듯이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며 격정적이고 달변이지만, 홍상수는 자신의 감정을 행간으로 숨기고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눌변이다.
두 사람의 영화세계도 각각 극단에 놓여 있어서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김기덕은 표현주의 스타일로, 일상적 삶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극단적 세계를 자신의 상상공간에서 창조해서 독창적 표현방법으로 드러낸다. 홍상수는 사실주의 계열로서 우리의 일상적 삶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주력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영화세계를 갖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자신의 전 영화를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는 것은 같다. 김기덕은 원래 시나리오 작가로 출발해서 지금까지 감독한 13편의 영화는 모두 그의 오리지날 시나리오다. 홍상수는 김기덕의 절반에 가까운 7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모두 그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다.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만 구효서의 원작소설인 [낯선 여름]에서 기본 이야기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것도 홍상수 각본에 의해서 많이 바꿔져 있어서 원작과의 유사성을 찾는 게 쉽지 않을 정도로 홍상수적으로 각색되어 있다.
두 사람 모두 영화를 만드는 핵심 방법론은 반복이다. 김기덕은 거의 자기복제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영화를 스스로 복제하면서 조금씩 차이를 두고 변주하며 성장해간다. 김기덕 영화의 어디에서나 우리는 아주 쉽게 등장인물들에 의해 반복되는 행동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반복은 아주 중요하게 이용된다. 김기덕과 다른 점은 홍상수의 반복은 서로가 거울로 비춰보는 것처럼 대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다.(김기덕은 1960년 12월생, 홍상수는 1961년생) 그리고 무엇보다 데뷔연도가 같다. 지금부터 10년전인 1996년, 홍상수 감독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김기덕은 [악어]로 같은 해 데뷔작을 만들었다. 그리고 김기덕이 늘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처럼, 홍상수는 늘 콧수염을 기르고 다닌다.
[해변의 여인] 무대인사에서도 홍상수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면서 종종 걸음에 가깝게 작은 보폭으로 무대로 올라온다. 그가 무대 가장자리에 서자, 뒤따라 올라온 김승우는 홍상수를 무대 한 가운데로 끌고 간다. 인사말도 간단하다.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다]는 아주 간단한 말이다. 이런 형식적 절차를 빨리 치르고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얼굴 가득 드러나 있다.
김기덕이 경북 봉화의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제대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반면, 홍상수는 좋은 집안에서 자라서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중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을 거쳐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독립 프로덕션 시네텔 서울에서 지상파 방송사에 납품되는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영화는, 벤쿠버 국제영화제에서 용호상을,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작품인 [강원도의 힘]은 칸느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서 특별언급상을 받았다. 세 번째 작품인 [오! 수정]은 흑백으로 만들어졌고 역시 칸느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그의 가장 좋은 작품 중 하나인 네 번째 작품 [생활의 발견]을 거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극장전]은 칸느 영화제 경쟁부문에 연이어 진출했다.
홍상수 영화의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제목이다. 우선 데뷔작을 보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희한한 제목을 갖고 있다.(마포에 가면, [돼지가 고추장에 빠진 날]이라는 삼겹살집이 지금도 성업 중이다) 홍상수는 돼지가 갖는 팽창성과 우물이 갖는 수축성을 충돌시켜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의 새로운 제목 찾기는 계속 이어진다.
이제는 우리들의 귀에 낯익어졌지만, 그리고 실제로 강원도에서는 홍보문구로 사용하고도 있지만 두 번째 작품인 [강원도의 힘]도 처음 들을 때는 너무나 낯설었고 이상했다. 고추장의 힘도 아니고 주먹의 힘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생명체인 어머니의 힘도 아닌, [강원도의 힘]이라니! 이 엉뚱한 제목 붙이기에 나는 할 말을 잊었었다. 세 번째 [오! 수정]도 마찬가지다. 수정은 그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고 이은주가 열연한 수정의 영화 속 성은, 양이다. 그러니까 양수정이다. 그러나 영화 제목은 [오! 수정]이다. [오수정]이 아니라 오, 느낌표 수정이다.
네 번 째 [생활의 발견]은 임어당의 유명한 에세이집 제목이지만 그러나 요즘 세대는 잘 모른다. 지금의 6,70대 들이 청춘시절에 읽었을 그 책의 제목을 어떻게 영화 제목으로 붙일 생각을 했을까? 여섯 번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의 시귀절을 가져온 것이지만, 그 느낌도 낯선 것은 마찬가지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니, 그럼 남자는 여자의 과거인가? 여섯 번째 제목 [극장전]은 역전 하듯이 극장 앞이라는 뜻과, 춘향전 수호전 하듯이 어떤 이야기를 뜻하는 이중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해변의 여인]이야 나훈아의 노래로, 그리고 최근에는 쿨의 노래로 잘 알려진 제목 아닌가. 홍상수가 [해변의 여인]을 만든 동기가 궁금했다.
[오 년은 넘은 땐가 서울서 알던 여자분이 있었고, 그분과 비슷한 얼굴을 한 어떤 여자분을 지방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지방 국도변 식당에서 본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처음 본 여자분에 대해서 제가 괜히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잠깐 가졌던 것 같고, 그게 신기해서 제 기억 속에 그 일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얼굴이 비슷하면 속도 비슷한 걸까. 하는 생각은 제가 가끔 하는 생각들 중 하나였고, 그때도 그 생각의 끝은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다시 쳐다보고 싶은 질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해변의 여인]은 고현정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홍상수 영화 속의 배우들이 다 그렇듯이 고현정 역시 껍질을 깨고 인위적 굴레를 벗어던지며 가식 없이 진솔한 모습으로 관객들과 만난다. 홍상수는 철저하게 배우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연기하기를 주문한다.
형화감독 중래(김승우 분)는 미술감독 창욱(김태우 분)에게 서해안 바닷가로 하룻밤 여행을 제안한다. 결국 중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창욱은 자신의 여자친구 문숙(고현정 분)을 데리고 함께 서해안 신두리 해변으로 떠난다. 그러나 창욱은 유부남이다. 여행지에서 창욱 몰래 눈이 맞은 중래와 문숙은 섹스를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자 중래는 문숙에게 어제 밤과는 다르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이년 전쯤 아는 사람이 이틀 거치로 여행을 연달아 떠나는 게 유별나다 싶어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걸 제가 두 세 번 가본 적이 있는 신두리라는 서해안 해변휴양지와 연결시켜서 같은 곳을 이틀만에 다시 찾아간다는 상황으로 바꾸었습니다. 크게는 (오년 전의 기억과 이년 전의 기억) 이 두 가지의 기억과 변형된 상황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틀 안에서 인물들과 그들간의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그 이야기와 함께 이미지와 성의식에 관련된 속이야기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인물 구현의 구심점이 되어줄 배우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두리라는 구체적인 환경에 의존하면서 하루하루 쓰고 촬영하면서 제가 아직 알지 못했지만, 표현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발견하고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홍상수는 [해변의 여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상세히 진술했지만, 김기덕 영화가 그런 것처럼 그의 영화도 지금까지 손익분기점을 넘은 작품이 하나도 없다. 과연 [해변의 여인]은 대중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의 그 어떤 홍상수 영화보다도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해변의 여인]에서도 반복은 중요한 코드로 활용이 된다.
[반복은 영화 만들기의 좋은 틀이면서도 한 인물의 행동이 될 때는 강박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