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가면 아침은 식당에서 사 먹는 게 일상화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이미 아흔을 넘기셨고, 고등학교, 대학교 때 자취생활을 합치면 칠십 수년간 밥을 해 드셨으니, 밥 해 드시는 게 귀찮아질 때도 이미 오래 전에 지났지요. 집밥 직접 해 드실 때보다 사 먹을 때 식사량이 많으신 것도 제가 사 먹자고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가는, 이제는 단골집이 된 아침밥집, 전주식콩나물해장국대관령황태찜엔 자주 보는 얼굴들이 여럿 있습니다. 새벽에 배트민튼 치고 오시는 동호회원들, 인근 아파트공사장 작업자들, 항상 혼자 와서 드시는 70대 건장한 어르신...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이들은 일곱 분의 어르신들입니다. 주인장 말씀을 들으면 일주일에 세 번 오시는데, 보훈병원에서 오신다기에 환자냐고 했더니, 환자는 아니고 상이군경으로 보훈급여를 받으시는 분들로, 주 3회 병원에서 봉사를 하고 오시는 거랍니다. 오시면 주방에 들어가 반찬도 챙겨 나오고, 식사를 하시고 나서는 빈 그릇 모아 주방에 반납하고 식탁도 닦고, 사장님 바쁘실 땐 서빙도 도와주십니다. 이런 손님은 어디에서도 본 바 없습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당신들이 국가 보조를 받고 계시고, 그냥 받기만은 마음이 불편하시어 봉사를 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분들을 뵐 때면 꼭 목례를 합니다. 봉사를 받아도 될 연세. 보훈 경력에 봉사를 하시니 참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저는 대학 때 봉사 서클에 다녔기에 봉사에 대한 기본 마인드는 갖추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 자체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예전엔 봉사는 시간 여유 되고, 금전적 여유 있을 때 하는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아니란 생각을 가지던 터에 이 분들을 뵈니 제 단편적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그나마 다행인 건, 대학생활 이후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나마 수년 전부터 봉사를 시작했고, 늘일 건수를 찾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단 겁니다. 사실 ‘여유’란 것도 사치입니다. 봉사하면서 만나는 많은 이들이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봉사가 좋아서’, ‘봉사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많아서,’ ‘나눌 부분이 있어서‘ 참여하고 있음을 이제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은퇴하면서 봉사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친구들이 적지 않음이 참 큰 위안이 됩니다. 이런 얘기 들으면 참 행복해집니다. 다음 달엔 봉사 일정 몇 건이 잡혀 있습니다. 그걸로 새삼 위안 삼으며 부끄러움을 감춥니다. 아래, 노동시인이 얘기한 것처럼, 봉사는 나눔이고, 그를 통해 성장이 따르는 게 아닌가, 깊이 생각해 봅니다.
나눔과 성장(모셔온 글)========
언 땅이 풀리는 해토의 절기가 오면 흙마당가에 쪼그려 앉아
얼음발 속에 뜨겁게 자라는 여린 새싹들을 지켜보느라 눈빛이 다 시립니다.
언 흙을 헤치고 나온 새싹들은 떡잎이 둘로 나뉘면서 자랍니다.
나뉘어야 자라는 새싹들
그렇습니다. 나누어야 성장합니다.
커지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새싹도 나무도 나뉘어야 자라납니다.
사람 몸도 세포가 나뉘어야 성장합니다.
커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성입니다.
커나가는 조직은 정보와 지식, 비전과 자유와 책임을 잘 나누어 함께 공유하는 만큼 멈춤 없는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눠야 커지고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나누어야 서로 이어지고 함께 모여들어 커질 수 있습니다.
크다는 것은 하나를 이루어낸다는 것이고
큰 사람이란 나누어 쓰는 능력이 큰 사람이고
크게 나눔으로 하나를 이루어내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잘 나누어 상대를 키움으로 자기도 커나가는,
지공무사의 사람이 아닌 지공지사의 사람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성장이 정체됩니다.
시들어가고 뒤처지고 부패하고 적대합니다.
나누지 않을 때 싸움이 생기고 분열이 생깁니다.
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누려면 나눌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늘 새롭게 나누어줄 삶의 감동과 이야깃거리가 있어야합니다.
새로 학습한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고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보살펴줄 시간과 물질과 건강이 있어야 나누려는 마음도 자라납니다.
함께 나눌 가치 있는 일과 희망이 능력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눔과 동시에 자기를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크게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나눔과 함께
자기 자신이 세상과 이어지고 몸을 통하여
내 몸과 내 큰 몸이 하나로 창조적 맴돌이를 이루어야 합니다.
천 골짝 만 봉우리 물을 받아들여 큰 물둥지를 이루어야
너른 들녘을 푸르게 피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선 자리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땀 흘려 일하고 공부해야
자기 안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맑은 눈뜨고 자기를 불살라가는 투혼의 불덩이어야 나눈 만큼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나눔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가난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누려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누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나누겠다는 굳센 다짐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를 잘 나누어 쓰는 능력입니다.
두텁게 언 흙을 헤치고 나온 저 작고 여린 새싹은
여유가 있어서 떡잎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가 바로 살기 위해서, 자기가 바로 크기 위해서, 그 작고 여린 자기를 처음부터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는 능력도 생명체와 같아서 쓰지 않으면 퇴화하고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누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돈을 많이 벌고 크게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삶의 외피와 삶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삶의 속살과 목적,
아니 삶 자체를 삶의 껍데기와 바꿔버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삶의 핵심 능력이고
인간성의 본질인 사랑과 영성을 성장시키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인간으로 바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인간으로 바로 크기 위해서는,
내 삶의 핵심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바로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함 그대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는 능력이 커나가는 만큼 나눌 거리도 커지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고 참된 성취입니다.
그것만이 멀리 가고 오래 남는 창조적 맴돌이인 것입니다.
사랑이란 지금 그대로의 자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을 통해 자기 자신이 성장하고 상대를 성장시키고
모두가 진보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누어 자신과 상대를 함께 키워내지 못하는 것은
사랑도 정의도 진보도 아닙니다.
함께 하나 되어서도 성장하지 못하고, 나누어도 성장하지 못하는 건 진보가 아닙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나눔, 성장하지 못하는 성숙은 진보가 아닙니다.
창조적 맴돌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눔을 통한 성장과 성숙의 긴장된 떨림,
그 살아 움직이며 이동하는 균형점이
참된 사람의 자리이고 진정한 진보의 자리입니다
잘 나누어 보살펴야 성장함으로 성숙할 수 있고
성숙함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눔의 손은 보살핌의 손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다 나누고 마침내 고목처럼 부드럽게 쓰러지는 생이 있습니다.
쓰러져 돌아감으로 다시 새싹처럼 부활하는 생,
그래서 죽음마저 최후의 나눔이고 사랑이고 희망인 생,
그런 일생이기를 기도하는 신생의 시간입니다
언 흙을 뚫고 치열한 숨결로 자라나는 새싹들을 바라보며,
나눔으로 빛나는 작고 여린 얼굴들을 묵묵히 들여다보며,
내 안에서, 세상에서, 나눔으로 자라나는 푸른 희망 하나 하나를
뜨겁게 지켜봅니다.
고개 들어 해동청 하늘 바라보는 눈빛 시려옵니다
-----박노해의「사람만이 희망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