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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혁명의 동기부여
치밀한 계산 하에 경제발전의 근간이 된 5.16 혁명과 유신정권에 대하여 야당 정치인들의 일방적인 비판에 젊은 층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이글을 올리니 이미 반세기 전의 5.16 혁명과 유신정권의 업적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평가하기를 바란다.
그간 노무현 독재 정권은 박정희 대통령을 군사 독재자로, 친일파로 매도하려고 무던히도 애써 왔다. 그들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했다고 사기쳐 왔다
그러나, 만약 1961년의 5.16이 쿠데타였다면 어떻게 1962년 대통령이 윤보선씨였다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사실을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쿠데타는 박정희 소장이 아니라, 장면 총리가 일으켰다. 장면 총리의 쿠데타는 제일 먼저 직선제를 없애고 그들 스스로 간선제로 대통령과 총리를 선출하였는데 그들의 내각제 논리는 이러하였다.
최고 득표자 대통령은 허수아비가 되고, 청와대는 허수아비를 위한 양로원이요, 실권이 총리에게 있다. 즉, 선거에 이긴 자가 대통령(윤보선)이 되지만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요, 차점자가 총리(장면)에게 실권을 쥐게되어 내분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장면 총리의 정치적 쿠데타에 대하여 윤보선 대통령이 역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지지 기반이 약하여 올데 갈데 없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의 재가 하에 혁명 공약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쿠데타가 아닌 혁명이었다. 혁명당시 국군통수권을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중 누가 가지고 잇는지 몰랐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헌정사상 가장 공명한 선거
군사정부의 민정이양은 4..19 혁명으로 득세한 정치세력이 국민에게서 빼앗은 직선제 선거를 국민에게 되돌려 주어 1963년 10월에 대한민국 헌정 사상 가장 민주적이었던 선거가 있었을 뿐이었다. 국민들 기억 속에 양김씨에 대해서는 요란하게 선거운동하는 것밖에 없으나,. 박정희 후보가 선거운동하던 모습은 없다. 오로지 선명한 정책 제시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올바른 정책에 호소하였다. 그는 정책 대결로 선거운동을 끌고 갔기에 그의 시대에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다.
사실, 2공화국 시절 청와대 비서관들도 5.16군사혁명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일어났어야 할 혁명이었다고 회고한다. 즉, 4.19 시위를 하였던 학생들이 언제 김일성 만세를 외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며, 북한으로 넘어가겠다는 그들의 행진이 언제 김일성에게 남침의 기회를 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국가의 총체적 위기에서 적화통일을 막았기에, 민주행정의 틀을 튼튼히 하였기에,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필수 여건이었던 경제를 발전시켰기에 박정희의 5.16 혁명은 민주화 운동이었다.(.daum.net/issue21
-5.16혁명과 유신을 상습적으로 악용하는 야당세력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는 16일 한국 신문방송 편집인협회 초청토론에서 5·16에 대해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5·16과 유신(維新)시대에 대해 "찬반 논란이 있기 때문에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5.16 혁명과 유신의 흠결의 한 단면만 집중 부각하여 국민을 특히 당시의 시대적 현실을 모르는 젊은 층을 현혹시키고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정치적 이익 집단들은 또다시 유력한 대선 주자 박근혜 후보에게도 5.16 혁명과 유신을 강력히 비난함으로서 정권교체를 노리고 있다. 4.19와 5.16혁명은 민주화와 근대화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두 물줄기가 시작된 시범이라면 유신은 지속적인 경제개발을 통하여 이나라를 경제대국의 기반을 조성하여 오늘의 1조달러 무여강국이되었다.
그것도 분단국가에 남한경제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북한의 끈질긴 도발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정말 위대한 대한 민국인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월남팜병 반대 등 이나라 경제발전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던 그들이 훗날 정권을 잡았을때 유신정권이 공들여 일구어 논 이 땅에서 배불리 먹는 것외에 경제발전을 위해 무었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었다는 것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군사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한 박정권의 정책에 반하여 오히려 북한에 자금을 지원하여 그들의 핵개발계획에 일조를 한 것도 잘 알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전 "비리 척결에 대통령 친인척도 성역이 될 수 없다"고 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 세 아들에게 근신을 당부한 사실을 공개하며 "친인척을 엄중 관리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내 친인척 중에는 청탁을 주고받을 만한 주변머리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역대 대통령들은 가족 관련 잡음(雜音)이 들려올 때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했지만 한국 대통령의 후진적 비극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수치(羞恥)인 대통령 가족 비리는 계속됐다.
박대통령의 자서전 형식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켜 패전의 책임을 오히려 정적들을 숙청에 이용하였고 전 인민을 우상화로 인민의 어버이로 군림하기 위한 과정에서 끊임없는 도발을 감행하여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 분위기로 조성하고 있는 당시에 한반도를 전쟁으로부터 평화정착을 위하여는 자주국방을 조기에 달성하여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꺽고 제 1,2차 경제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이 땅에 가난을 물리치고 번영된 조국건설을 이루기 위하여 정쟁과 내분에 휩싸인 야당에 정권을 맡기기 보다는 박대통령 본인이 독재정치 좀 하겠으니 훗날 본인이 이룬 업적과공과를 판단하라는 뜻일게다.
따라서 조국근대화를 획기적으로 이룬 유신정권을 비난하고 조국근대화의 국부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는 자들아!
이나라는 이조 500년 동안 당파싸움에 휘말린 끝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고 급기야는 일제 36년간 나라를 뺏았겼고 해방 후에는 남북이 분단되더니 북한의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켜 3년동안300만 동족이 목숨을 일었다.
전쟁이 끝나니 거대한 폐허로 변한 이땅의 민족은 미국의 원조로 간신히 정부가 지탱하고 있으면서도 휴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었다.
5.16 혁명정부는 자유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으로부터 가난의 대물림을 막기위해 새마을 운동을 추진했고 국가안보와 경제재건에 필요한 달러를 확보하기 위하여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지하 2000미터 막장에서 석탄을 캐고 시신을 딱는 일을 하였다.
미국의 차관 거절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에 차질을 만회하기 위하여 박정희 의장은 1964년 12월 8일 서독의 수도 본에 있는 에르하르트 총리 공관에서 전후 독일 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르하르트 총리 간 정상회담에서 우여곡절 끝에 광부와 간호사 7000여명의 월급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었던 것이다.
제1차 경제개발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이어진 연차적경제개발계획으로 경제자립과 자주국방과 위해 박정희 정권은 1972년의 10월 유신을 선포한다.
2.유신의 시대적 배경
당시의 급변하는 한반도의 주변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아시아 최빈국으로부터 민족중흥의 사명을 이룩하여 김일성 집단의 적화통일을 위한 끊임없는 도발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구국의 결단임을 온 국민이 인정하는데도 일부 재야세력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 해군사상 106년만에 처음 당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북한군은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비무장지대 서부지역에서 네 차례나 미군을 습격하여 11명을 죽였고, 남한의 국군도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시설을 공격하는 등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던 상황에서 1968년 1월23일 오후 1시 45분 동해 공해상에서 4척의 북한 해군 초계함정과 2대의 미그기의 위협 아래 미 해군 최신예 전자첩보함 프에블로호가 납치되었다. 장교 6명과 수병 75명, 민간인 2명을 포함하여 총 83명이 탄 프에블로호는 납치 당시 북한 원산항으로부터 40km 떨어진 공해상에 있었다.
납치된 정보함의 암호 등을 포함한 육해공군의 모든 비밀정보가 쏘련으로 넘어갔으며 따라서 미국방성은 일시에 정보체계를 변경하기 위해 막대한 국방비가 소모됨에 반해 김일성은 막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를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아 북한 인민들에게 우상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진함 침몰
1967년 1월19일 오후 1시50분에는 동해 거진 앞바다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우리 해군 소속 PCE 56함(당진함=650 톤, 함장=金承培 중령, 승무원79명)이 북한 해안포의 집중사격을 받아 침몰하면서 해군 장병 39명이 전사했다.
-청와대 습격사건 및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사건 1968년 1월21일 저녁10시경 북한의 124군 부대(게릴라 특수부대)소속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북악산 인근 까지 침투하여 경비중이던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죽이고 지나가는 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시민들은 죽였던 사건과 11월의 울진·삼척 무장 게릴라 120명의 침투사건, 이듬해 4월 4월15일 오후 2시 경에는 동해 상공을 정찰비행 중이던 미해군 EC121 정찰기 한대가 북한의 대공포화에 격추되어 31명의 승무원 모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닉슨독트린
1966년 월남전에 한국군 1차파병 이후 4차에 걸친 파병으로 한미동맹이 더욱 강화 됨에따라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위하여 미그 17기를 자체 조립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와 끈임없는 도발로 한반도에는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같은 해 7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고 1970년 미 의회를 통과하였다.
실제로 71년 3월 실제 2만명 가량의 미 7사단과 3개 공군비행대대가 철군했고 남한에는 5만명 가량의 미 2사단만 남게 되었다.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계획이다.
이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한국보다 월등한 김일성 정권의 무력도발에 대비해야 정부로서는 막대한 국방비 부담으로 경제개발계획이 초기부터 내내 발목을 잡히게 된다.
2. 7.4공동성명과 남북조절위원회
1960년대 말 비무장지대 교전이 비일 비재하게 일어나는 무력충돌은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지만 1972년 닉슨대통령이 죽의 장막을 혜치고 모택동을 만나면서 미중관계개선과 쏘련 수상 후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으로 동서간에는 냉전체제로부터 해빙무드가 조성되고 있었다.
한반도의 전역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던 한국정부도 국방비를 줄이고 경제개발을 위해 동서와해무드에 편승하여 1972년 5월 분단 이후 최초의 대북밀사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의 모란봉초대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일성과 악수(청산가리를 만지던 손)를 하면서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후 북한의 박성철부주석이 극비리에 남한을 찾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고 이후락과 7.4공동성명이 남북의 합의하에 이루어졌다.
1972년 7월 4일, 남과 북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밝힌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는 조국통일을 위한 기본입장과 방도를 밝힘으로서 우리 겨레의 통일의 밝은 전망과 희망을 안겨준 역사적인 성명이다. 동년 11월 4일 7.4 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추진하고 양측관계를 발전시키며 각분야별 힘을 합쳐 조국통일 원칙에 기준하여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후락과 북한의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만나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할 것을 합의하였다.
3. 10월 유신선포
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경제개발과 자주국방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남한으로서는 7.4공동성명을 주도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위해 3차례의 남북조절위원회를 개최하였으나 소극적이던 김일성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들어 북한측의 일방적 파기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김일성이 1962년 12월 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南朝鮮 解放戰爭을 위하여 채택된 이른바 4대군사노선(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을 비밀리에 추진하여 8년 만에 완성한 것이 남한정부에 노출되고 나서야 남북협상이 김일성의 위장 전술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일성은 1970년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의 보고를 통해 "4대 군사노선을 적극 추진한 결과 전체 인민이 총을 쏠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지역에 철통같은 방위시설을 구축해 놓았으며 중요한 생산시설까지 요새화하였다.
자립적 국방공업기지가 창설되어 필요한 현대적 무기와 전술기재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다"라고 언급, 4대 군사노선의 완성을 호언했다.따라서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남북적십자 회담에 이은 7·4 공동성명으로 인하여, 이념적인 공백상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즉 사회적 안정과 안보의식을 높여야 하고, 경제발전을 한 단계 더 높여야 하고 무었보다도 자주국방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어 역사적 구국의 결단을 위해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의 명분이 국가의 안정과 국력의 극대화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 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룬다는 것에 있었으나, 실은 국민의 판단과 비판 그리고 선택권을 제한하려는 비민주적이고, 장기 집권을 위한 기반 다지기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자원빈국에서 선진국민소득 2만불의 선진 경제대국에 진입하게 되는 튼튼한 기초를 딱은 것을 전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북이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에서 남한보다 위를 점하고 있는 북한의 경제와 국사력을 능가하기 위해 김일성의 지도력을 압도하는 국가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구를 감안한 것이다.
-5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1960년대부터 국내 좌익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하다가 1980년대 중반 공산주의의 허상을 깨닫고 1995년 전향했다. 한때 ‘학생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렸던 그가 1960, 70년대 주요 시국사건으로 꼽히는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안 교수는 오늘 출간되는 책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에 직·간접으로 겪었던 사건들에 관한 생생한 육성(肉聲)을 남겼다.
우리 사회 일각에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사건은 권위주의 정부가 반공주의를 앞세워 조작한 사건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979년 발각된 남민전 사건 관련자 29명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들의 활동이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행위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안 교수는 이들 사건이 정부에 의한 용공조작 사건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공산혁명 기도였다고 증언했다. 물론 수사 과정에서 때로는 폭력이나 고문이 있었지만 실체가 없는 사건을 날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62년 서울대 대학원생이던 안 교수는 빨치산 출신이자 인혁당 가담자인 박현채를 만나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밝혔다. 1964년 전모가 드러난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는 게 안 교수의 고백이다. 1968년 발각된 통혁당에 대해서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었다”고 그는 밝혔다. 통혁당의 서열 2위 김질락은 서울대 상대생이던 신영복(현 성공회대 석좌교수)을 지도했으며 신영복은 역시 서울대 상대생이던 박성준(전 성공회대 겸임교수)을 지도했다고 한다.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은 북한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했고 무장게릴라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이고 총기를 보관한 적도 있다.
-북한 인민 300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단군이래 처음있는 역사적 수치이다.
-박대통령의 포항제철과 조선소 추진
박대통령은 제철산업을 현역이던 박태준 장군을 앞세워 세계 경제사적으로 가장 저렴한 돈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하여 경제건설의 쌀역활을 자급자족 하였고, 노동집약형 산업으로 일본처럼 조선소 건설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박대통령은 포항제철의 경우 야당의 집요한 반대와 정치적 외풍을 막아주었고 조선소 의 경우 추진력 있는 정주영 회장을 불러서 “임자가 조선소를 지어 배를 한번 만들어 봐..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 줄테니까" 하니 정주영이 "각하 우리는 자본도 기술도 부족합니다. 조선소라니요?절대 불가능합니다" 하면서 실제 6개월정도 박대통령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박대통령이 정주영에게 마지막으로 "임자도 기업인 아니야? 나라가 없으면 기업도 없는거야 그냥 군말 말고 하시오" 라고 강력하게 지시해서 할수없이 조선업을 시작한 것이 지금의 지금의 제철강국이고 조선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과학기술처를 두어 국방과학 연구소와 과학기술연구소를 두어 인재를 양성하여 경제초석을 다졌고 오늘의 눈부신 방위산업과 더불어 무역 1조달러 시대의 주역으로 전 국민이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의 명분이 국가의 안정과 국력의 극대화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 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룬다는 것에 있었으나, 실은 국민의 판단과 비판 그리고 선택권을 제한하려는 비민주적이고, 장기 집권을 위한 기반 다지기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자원빈국에서 선진국민소득 2만불의 선진 경제대국에 진입하게 되는 튼튼한 기초를 딱은 것을 전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북이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에서 남한보다 위를 점하고 있는 북한의 경제와 국사력을 능가하기 위해 김일성의 지도력을 압도하는 국가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구를 감안한 것이다.
-박대통령의 첨령과 검소함의 일화(데이빗 심슨의 회고)
월남전 당시 M16자동소총제작업체 맥도날드 더글라스 회사 중역 데이빗 심슨의 방문을 받고 한 국가의 대통령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을 잊지 못했다며 당시를 회고.
부채와 파리채를 두고 각국 원수 접견시에만 에어컨을 가동하는 집무실에서 심슨은 "각하! 이번에 M16 소총의 수입을 결정한데 대한 회사가 드리는 작은성의"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흠, 100만 달러라. 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못 만져볼 큰 돈이구려" 대통령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순간 나는 그 역시 무기 구매 사례비를 전달하며 만나본 각국의 지도자들과 다를바 없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각하! 이돈은 저희 회사의 관례적 성의 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때 눈을 감고 있던 박대통령이 나에게 말했다."여보시오 한 가지만 물읍시다," "네 각하!" 이 돈을 정말 날 주는거요." "네. 물론입니다.각하!"
"그러면 조건이 있소." "네 말씀하십시오."
대통령은 봉투를 다시 내쪽으로 내밀며 "자 이돈 100만달러는 내돈이요. 내 돈이니까 내돈으로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당장 이 돈만큼 총을 더 가져오시오.
당신이 준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독일에서 그리고 멀리 월남 땅에서 피 흘리고 땀 흘려 바꾼 돈이요."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소총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 훗날 그는 "나는 그의 얼굴에서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국부의 모습을 보았다." 라고
4.결론
결론적으로 말하면 유신은 남북이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에서 남한보다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북한이 전 인민의 우상화로 제왕적 독재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일성을 능가하는 리더싶의 지도자가 시대적으로 필요하였으며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은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기치아래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이룬 것이니 전국민이 인정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으로부터 비난 받는 것은 통탄할 일이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2년 4월 24일 북한은 군창건 60주 기념보고회에서 군총참모장 최광 보고를 통해 4대 군사노선의 강화와 함께 「전군의 주체사상화」를 강조하며 △군사기술 향상 △철저한 규율확립 △기본전투단위인 중대의 강화 등을 촉구했으나
남한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막대한 국방예산을 사용하므로서 경제, 군사면에서 북한에 대해 비교가 않되며 1조달러의 무역강국의 저변에는 유신정권의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단결된 국민의 피땀어린노력으로 이루어 진 결과이다.
더구나 박대통령 사 후 지독히도 유신을 비난하여정권을 잡은 역대 통치자들이 자식들의 비리와 부패로 감옥에 가거나 자살을 하는 작금에 현실 속에서 그 분의 무덤에 침을 뱉을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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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 글은 다믐 게시판에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