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섭 金祉燮 (1884 ~ 1928) "의열단원으로서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
1884년 (음)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김병규(金秉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곧바로 백부 김병두(金秉斗)의 양자가 되었다. 출생지인 오미동은 풍산 김씨 집성촌인데, 조선조 퇴계학의 본산으로 정통 유학의 맥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한 곳이었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호는 추강(秋岡), 자는 위경(衛卿)이다.
1891년경부터 족숙인 운재(雲齋) 김병황(金秉璜)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어려서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할 때부터 천재라 하는 이름을 들었다 하며, 성년이 된 뒤로 재사라는 칭호를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운재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운재의 아들인 6살 연상의 동전(東田) 김응섭(金應燮)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김응섭은 한성의 법관양성소를 다녔는데, 고향에 내려올 때면 서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1903년 삼남과 관동 지방을 순회하며 동정을 살피고, 시세의 변화와 국운의 쇠락을 통감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질풍노도처럼 전개되고 있던 계몽운동의 소식을 김응섭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1907년 3월 보통학교 부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같은 해 5월 상주보통학교 부교원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교원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908년 2월 17일자 김응섭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이 성 법학사를 이루어 매우 기쁘고 큰 영광”이라고 표현하고 자신의 출세 의지를 다졌다. 1908년 11월 상주보통학교 교원을 사직하고 상경하였다. 사립 광화신숙(廣化新塾) 일어전문과에 입학하여 일어를 습득한뒤, 재판소 번역관(통역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1909년 8월 전주구재판소 번역관보를 거쳐, 같은 해 11월부터 금산구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로 근무하였다. 이즈음 일제가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강탈한 「기유각서」가 발효되어 1909년 11월 법부가 폐지되고 통감부 사법청이 개설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 법부 소속 재판소의 번역관이 아니라, 일제 통감부 재판소의 통역생 겸 서기가 되었다. 이렇게 일본에게 당한 모욕은 훗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금산구재판소 서기로 재직 중 경술국치를 당하였다. 이날 저녁 금산군수 홍범식(洪範植)은 그에게 상자 하나를 맡기고 객사로 나가 자결하였다. 집에 돌아와 홍범식이 맡긴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족에게 남긴 유서와 함께,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홍범식이 품고 있던 유서는 일본인이 탈취해 갔으나, 그에게 미리 맡겨 놓은 것은 장남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에게 온전하게 건네졌다. 홍범식의 자결에 큰 감명을 받고 그의 장례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1911년 9월 영동구재판소 통역생 겸서기로 전임되었다. 1913년 1월 공주지방법원 영동지청(1912년 영동구재판소가 개칭됨) 서기를 사직하였다. 향리로 돌아와 우국 동지들과 교유하며 독립운동의 의지를 세웠다.
1915년 5월 김응섭이 평양에서 대구로 변호사사무소를 옮기자 서기로 취직하여 상주출장소에 근무하였다. 이 시기 김응섭은 대구에서 비밀결사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김응섭의 변호사 업무를 돕는 한편 그가 관계하던 조선국권회복단을 지원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중국을 왕래하였다.
1920년 8월 서울에서 미국 의원단 방한에 조응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1921년 만주, 중국 관내, 러시아 연해주 등지를 왕래하며 동지 규합에 동분서주하였다. 가을 경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초겨울 김재봉(金在鳳)과 함께 극동민족대회 대표로 이르쿠츠크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여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가입하자마자 곧 대규모 암살 파괴 공작에 참여하였다. 당시 의열단의 암살 파괴 공작은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김한(金翰)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시현(金始顯)을 중심으로 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두 계획은 모두 실패하였다. 김한의 경우는,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 의거 직후 이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김시현의 경우는, 1923년 3월 밀정의 밀고로 유석현(劉錫鉉) 등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제는 6천여 명의 한인 동포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의열단 지도부는 일제의 만행을 응징하고, 연이은 실패를 만회할 거사를 추진하였다. 일제의 수도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고 주요의 대관을 암살할 계획이었다. 이를 실행할 의열단 기밀부 특파원에 자원하였다.
1923년 12월 20일 밤, 대추 모양의 소형 폭탄 3개와 나카무라 히코타로(中村彦太郞)라는 가명의 일본인 명함 30매를 가지고 윤자영(尹滋英)의 알선으로 미쓰이(三井)물산 소속의 석탄 운반선 텐조산마루(天城山丸)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이 배는 평양에 들렸다가 열흘 뒤인 12월 31일 일본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였는데, 그 날 밤 몰래 상륙하였다. 곧바로 후쿠오카현 야하타(八幡)시의 히젠야(備前屋)라는 여관에 들었다. 여기서 1924년 1월 3일까지 묵다보니 가져온 자금이 부족하여 회중시계와 담요까지 전당 잡혀 여비를 마련하였다. 1월 3일 밤 에다미츠(枝光)역을 출발하여 의거 장소인 도쿄(東京)로 갔다.
1924년 1월 5일 아침 도착하였는데, 도중에 제국의회가 무기 연기된 사실을 알고 왕궁 폭파를 결심하였다. 도쿄 시나가와역(品川驛)에 내려 도쿄 지도를 구입한 뒤 다카다노바바역(高田馬場驛)으로 갔다. 와세다쓰루마키마치(早稻田鶴卷町)의 근처 여관 미즈호칸(瑞穗館)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1월 5일 낮, 도쿄 지도에서 왕궁을 찾아본 뒤 히비야(日比谷)공원에 도착하여 왕궁 정문인 사쿠라다몬(櫻田門)과 나주바시(二重橋)를 실지 확인하였다. 이후 점심을 먹고 세이코우겐(淸光軒)에서 이발을 하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같은 날 오후 7시 20분경, 양복 주머니에 3개의 폭탄을 감추고 니주바시 부근에 다다랐다. 이때에 동소를 순회 중이던 히비야경찰서의 오카모토 시게요시(岡本繁榮)순사가 불심 검문을 하려고 하였다. 이에 폭탄 하나를 꺼내 안전핀을 뽑고 순사에게 던졌다. 순사가 멈칫하는 순간 주머니에서 나머지 폭탄 두 개를 양손을 꺼내 들고 왕궁 정문 앞 다리로 뛰었다. 정문 앞 석교에 다다르자 왕궁을 지키던 일본군위병 두 명이 양쪽에서 총을 겨누면서 뛰쳐나왔다. 다급한 나머지 안전핀을 뽑지 못하고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3개의 폭탄 모두가 불발되었고, 그 자리에서 격투 끝에 붙잡혔다.
불발된 원인에 대하여 일본의 『시사신보(時事新報)』는, “김(지섭)이 던진 폭탄은 크기가 3촌 정도의 수류탄으로 육군기술부가 감정한 결과, 25미터 떨어진 인마도 살상할 수 있는 정교한 것이다. 불발로 그친 이유는 최초의 일발은 오래 지하에 보존하여 두었던 까닭에 습기가 들어가 뇌관으로 통하는 선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뒤의 2발은 낭패한 나머지 안전핀을 제거할 틈도 없이 그대로 위병을 향해 던졌기 때문이다”라고 보도하였다.
1월 6일 오전 밤새 히비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기소되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예심에 회부되어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월 7일 국내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이중교(二重橋) 투탄 의거’에 대해 일본 내무성 공표를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이 사건(김지섭 의거)은 그 외에도 동경으로부터 도착한 전보가 있으나 경무 당국으로부터 게재 금지의 명령이 있음으로 다만 이상의 내무성 공표만 게재함”이라고 하여, 더 이상 보도하지 못하였다. 2월 2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감에 수용되었다.
4월 24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이 종결되었다. 이날 예심종결로 일제의 보도금지 조치가 해제된 뒤 일본의 『시사신보』와 국내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각종 신문에 김지섭 의거를 호외로 종합 보도하였다. 폭발물 취체 벌칙 위범(違犯), 강도 미수와 선박 침입죄로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스스로는 반역 사건에 해당하므로 이른바 ‘대역죄’로 생각하였다.
4월 27일 일본인 야마사키 게사야(山崎今朝彌) 변호사가 변호사 선임 문제로 감방을 방문하였다. 이때, “나는 결심과 각오가 있어서 한 일이니까 지금 와서도 아무 할 말이 없다. 변호사의 변호도 나는 받지 않을 예정이다”고 심정을 밝히기도 하였다. 4월 28일 병세가 호전되어 일반 감방으로 옮겼다.
1924년 9월 9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제1회 공판이 시작되었다. 변호사는 6촌 동생 김완섭(金完燮),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야마사키 게사야 등이 참석하였다. 공판 중 재판장이 직업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직업은 독립당원”이라고 하였다. 10월 11일 제2회 공판에서 일제의 악정을 통박하였고, 검사는 사형을 구형하였다. 10월 16일 제3회 공판이 열렸는데, 최후 진술에서 “차라리 죽을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지 않겠다”며 무죄 방면이나 사형을 요구하였다. 11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결심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11월 11일 도쿄공소원에 항소하였다.
1925년 1월 아침부터 불법 감금을 이유로 이치가야형무소에서 단식에 돌입하였다. 1월 14일 형무소장의 사죄로 열흘에 걸친 단식투쟁을 중지하였다. 3월 25일 도쿄공소원에서 제1회 공소심이 개정되었으나, 인정심문만 마쳤다. 5월 13일 도쿄공소원에서 제2회 공소심이 개정되었다. 재판장이 요코야마(橫山)에서 오카(岡)로 변경되어 실질적인 공판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런데 재판장이 불공정한 재판을 진행하자, 변호인단이 분개하여 퇴정하는 동시에 재판장 기피 신청을 제출하며 파란을 야기하였다.
하지만 변호인들이 제기한 재판장에 대한 기피 신청을 스스로 기각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이유는 “나는 조선 사람이니 일본 사람인 재판장이 어떠한 사람이 되던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 신청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제1심의 검사 청구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고 하였다.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받자, 더 이상의 재판을 스스로 거부하였다. 공소심 판결 직후 야마사키 변호사가 의논도 없이 상고를 하자, 8월 18일 이를 취하한다는 서면을 제출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 시내의 이치가야형무소로부터 도쿄 외곽의 지바(千葉)형무소로 비밀리에 이감되었다.
1928년 2월 20일 오전 8시 30분경 갑자기 옥사하였다. 2월 23일 동생 김희섭 등이 지바형무소에 도착하여 지바의과대학에서 부검을 실시하였으나 사인은 뇌일혈로 판명되었다. 일제의 강요로 유해는 지바의과대학에서 화장되었다. 3월 8일 일본 경찰이 감시하는 가운데 밤에 오미마을 옛집 뒷산 장판재 동쪽에 봉분도 없이 평장되었다. 1945년 11월 3일 동지들과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다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금산재판소 서기 시절 김지섭과 부인 [판형1] |
김지섭의 의열단 신임장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