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매주 월요일은 운동(스크린 골프)하고 당구 치며 종일 노는 날이다. 고정 멤버가 다섯명인데 핸디켑 경기로 천원에서 3천원 정도의 내기를 해 천원이라도 따는 날이면 기분이 한없이 좋다. 삶의 의미니 종교니 하는 거룩한 얘기를 하다가 그런 것에서 완전히 떠나 이렇게 마음껏 속물처럼 노는 날은 해방구에 온 느낌이다. 인간이 천사 같기도 하고 버러지 같기도 하다는 것을 잘 아는 나는 잘난척하다가도 금방 꼬랑지를 내린다.
나는 자잘한 세속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 좋다. 그래서 너무 거룩한척 하거나 도덕군자인척 하는 사람을 보면 괜히 타락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괴태의 파우스트에서 악마는 방황하거나 타락하기를 주저한다면 어찌 진리를 알 수 있느냐고 파우스트를 유혹한다. 세상을 알지 못하고 멸균실에서 맹물처럼 산 세상물정 모르는 이들을 흔히 샌님이라고 하는데 나도 사실은 그런 편이라 늘 타락하고 싶어 안달이다. 인간이 모순적이고 이중적이라는 것은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 신비이다. 내 속에서 악마와 천사가 밤과 낮처럼 출몰한다는 것은 황홀한 고통이다.
종일 놀고 한국과 스웨덴의 월드컵 축구 중계방송을 함께 보려고 치킨과 맥주 사들고 심도학사로 왔다. 경기는 아주 실망스러웠다. 유효 슈팅이 제로인 게임을 보는 것은 아무리 우리편이라 하더라도 지루하고 한심했다. 패스가 날카롭지 못해 공격이 안된다. 그나마 조현우라는 골키퍼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슛을 잘 막는 것이 대견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를 한 적이 있어 축구를 좋아하는데 대학 다닐 때 축구하다 관절을 다쳐 군대도 방위를 했다. 한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했을 때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하던 광란의 분위기가 그립다. 오늘은 환성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골 먹을까 조마조마하며 보고 있자니 맥주 마실 틈도 없다.
19일
오늘은 집 안에서 뒹굴거리며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인터넷 바둑 두고 닭은 왜 새벽에 울고 검은등 뻐꾸기는 왜 밤새도록 우는지 이런 저런 궁금한 것들을 네이버 선생에게 물어 보았다. 요즘은 참 좋은 세상이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인터넷에 다 있다.
20일
아직 국민연금 나오려면 며칠 남았는데 돈이 다 떨어져 아내에게 구걸하다 욕만 잔뜩 얻어 먹었다. 나는 남들에게 베풀기 보다 주로 얻어 먹는편인데도 어쩌다 보면 금방 돈이 떨어진다. 돈 떨어지면 집에서 가만히 지내면 되는데 왠지 초라한 느낌이 든다. 돈을 초월했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다. 나야 용돈이 떨어진 정도지만 생계비가 떨어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선생님과 덕산 휴양림 걷고 강화에 사는 두분이 함께 오셔 로이카페에서 차 마시고 심도학사로 와 복식 탁구를 쳤다. 탁구를 치니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로이카페 매니저 이정님에게 며칠전 마신 술 생각이 나 언제 술을 다시 빚느냐고 물으니 술 익으면 초대하겠다고 재촉하지 말란다. 술 많이 마시고도 다음날 뒤가 이렇게 깨끗한 술은 처음 마신 것 같다.
일기를 써놓고 보니 나는 참 허접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태어났나?
첫댓글 왜 자꾸 미소를 머금게 되는지....
초등생 일기장 몰래 읽은 기분이 드네요.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