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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고문의 뿌리 조갑제 닷컴에서 발취한 내용의 일부이다. 이자들이 누구인가? 역사를 왜곡하고 괴변을 늘어놓아 권력들의 아첨꾼이다. 이승만, 전두환, 이명박, 윤석열 과 같은 편을 비호하는 자들도 이승만 총독의 해방쇼를 말하고 있다. 2차세계대전 미, 소, 중, 영, 프 연합국과 침략국 독, 일, 이 국가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날짜가 1945년 8월 15일 이며 해방과 같은 날짜다. 맥아더와 일본이 함상에서 협정한 기막힌 남한의 식민지 건국을 조갑제 닷컴의 글에도 당시 환경을 말해주고 있다. 해방이 되어도 여전히 왜구들이 장악한 대한민국, 경찰은 왜구들을 상관으로 모셨고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 있다. 남한과 북한을 장악한 미국과 소련이 갑자기 돌변하여 충돌하게 된 배경은 일본이 강탈한 황금 때문이다. 황금의 위력은 천황도 살리고 전범들도 살린다. 갑자기 좌빨 공산주의란 생소한 용어가 사람 잡았다. 교활한 왜구들의 공작이 성공하여 한국은 강자들에 의해 제2 식민지가 되어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국민들은 짓밟힌 자존심을 찾아 올 때다. 4,10 총선은 국민들이 독립군이 되어 단 1명의 왜구도 남김없이 청소하는 날이다. 조상의 목을 짤라가 무덤을 만든 악마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지도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다. 처벌대상자일 뿐이다.
나치 전범들을 추적하듯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들을 추적하여, 그들이 어떻게 살아 왔고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알리는 것은, 지금의 고문기술자들을 위한 경종도 될 것이다. '고문한 자가 못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고문당한 자가 발을 펴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이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두 개의 폭력장치를 두었다. 그것은 경찰과 헌병이었다. 이 양대 폭력집단에는 1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일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들 일제 경찰·헌병 출신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직면하게 됐다. 북한에선 소련군과 공산당에 의해 많은 친일부역자들이 추방 구속 기소되고 투옥 사형되었다. 이를 피해 수많은 일제경찰 출신들이 살길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한의 일제경찰들은 놀라운 현실감각과 기민한 변신, 그리고 굳은 응집력으로 전환기에 대응했다. 그들은 여운형(呂運亨)의 노선에 반대, 해방 뒤에도 총독부의 충복으로 남아 있다가 미군 상륙을 맞는다. 미군의 일제경찰 출신 중용 방침과, 친일성향이 강했던 한민당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서 친일경찰 출신들은 북한에서 쫓겨난 일제경찰출신들까지도 포용, 군정 3년간 최강의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독립투쟁 경력이 있는 양심세력과 양민들을 탄압, 경찰에 대한 반감을 국민들 속에 심었고, 이런 반감은 좌익이 주동한 폭동에서 분출되기도 했다. 정부수립 뒤 일제경찰 출신들은 계속해서 경찰권을 장악하여 온갖 음모와 술수로써, 친일파의 단죄를 노리는 반민특위를 와해시킨다. 일제경찰 출신의 일부와 일제헌병 출신들은 군의 수사기관도 휘어잡아 이승만 정권을 지키는 양대 파수꾼 역할을 맡게 됐다. 부산정치파동을 전후하여 이 양대 조직은 독재의 장기화 공작을 위해 수많은 고문·조작·살상을 감행했다. 그들은 이런 과정에서 과거의 후견인이었던 한민?세력을 탄압하는가 하면 정의감이 강한 독립투사들을 주로 희생시켰다. 이승만 독재정권하에서 일제경찰 출신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등계 형사 출신들은 정권의 3대 파수꾼인 경찰, 특무대, 헌병의 중추부를 장악, 폭력배들은 외곽집단으로 이용하면서 권력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들은 충견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길만이 유일한 생존의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끊임없이 정치사건을 조작해갔다. 4·19의거의 주요 원동력은 권력의 주구 경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였다. 그러나 4·19와 5·16은 8·15 때와 마찬가지로 일제경찰들은 단죄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의 유산을 이어받고 말았다. 일제, 미군, 한민당, 이승만 등 민족과 정치노선이 상반된 여러 권력집단을 섬기는 데 이력이 난 경찰은 5·16뒤에는 군부 통치집단을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게됐다. 이런 변신의 과정을 통해서 일제경찰 출신들은 이 땅에 가치관의 전도, 고문, 용공조작, 그리고 교묘한 변명의 논리를 확산시킴으로써 사회정의를 황폐화시키고 관민간에 위화감과 불신감을 조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글은 일제경찰 출신들의 해방 뒤 행태를 사례별로 일별해 본 하나의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 고등계 출신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고 있는 지금, 친일경찰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시급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글이 그런 연구에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일제경찰의 4할이 조선인 해방 당시 한반도에는 2만 6,677명의 일제경찰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약 40퍼센트인 1만 619명이었다. 직급별로는 지금의 경무관급에 해당하는 도경찰부장에 조선인이 1명, 경시급(지금의 총경)에 21명(일인 48명), 경부급(지금의 경정)에 105명(일인 433명), 경부보급(지금의 경감)에 220명(일인 790명)이었다. 나머지 조선인 경찰관 1만 272명(일인 1만 4,775명)은 비간부급인 순사부장과 순사였다. 윤종화(尹鍾華, 당시 황해도 경찰부장)는 일제통치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도경찰부장이었다. 충남 출신인 윤씨는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경시로 출발했다. 그는 1944년에 경찰부장이 됐다. 당시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이던 야기 노부오는 『일본과 한국』이란 회고록에서 자신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정신을 실천하는 뜻에서 조선인 경찰부장 임명을 총독에게 건의, 실현된 것이라고 자랑했다. 윤종화는 해방 직후(당시 40세)소련군에 끌려간 뒤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야기 노부오는 “윤씨가 처음으로 경찰부장이 되자 한국인 고급관리들은 대환영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가해행위를 최소한도로 줄이기 위해서도 조선인의 경찰고위직 취임은 환영할 만하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고 썼다. 해방당시 한국인으로서 일제경찰의 경시(지금의 총경급)까지 올라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확인되는 이는 다음과 같다. 전봉덕(田鳳德, 당시 경기도 보안과장, 해방 뒤 육군헌병사령관) 이익흥(李益興, 당시 평북 박천서장, 해방 뒤 내무장관) 윤우경(尹宇景, 당시 황해도 송화서장, 해방 뒤 치안국장) 손석도(孫錫度, 당시 서울 성동서장, 해방 뒤 중부서장) 최연(崔燕, 당시 경기도 형사과장, 해방 뒤 수도경찰청 고문) 노덕술(盧德述, 당시 평남 보안과장, 해방 뒤 수도청 수사과장과 헌병중령) 최경진(崔慶進, 당시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해방 뒤 수도청 차장) 노주봉(盧朱鳳, 당시 전남도 경시, 군정때 전남 경찰부장) 마지막 정례회의 1945년 8월 8일 오전 경기도 경찰부(현재 정부 종합청사 건너편 치안본부 별관 건물)에서는 정례 과서장 회의가 열렸다. 경찰부장 오카는 “일본의 항복은 이제 시간문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경시급 조선인 간부 3명- 형사과장 최영(崔鈴, 해방 뒤 崔燕으로 개명, 사망), 보안과장 전봉덕(田鳳德, 육군헌병사령관 역임, 지금 변호사), 성동서장 손석도(孫錫度, 뒤에 변호사)-이 참석하고 있었다. 오카는 이들을 둘러보면서 “조선은 불행해집니다”고 매우 예언적인 말을 했다. 오카는 그때 가장 정확한 정보 루트를 갖고 있었다. 성동경찰서 맞은편에는 조선지구 단파수신소가 있었다. 수신내용은 조선총독, 정무총감, 조선군사령관, 조선군참모장, 체신국장 등 6명에게만 전달되곤 했다. 그러나 손석도 서장은 관할서장이란 명목으로 은밀하게 수신보고서를 한부씩 얻어 살펴본 뒤 경기도 경찰부장에게 보내고 있었다. 이 단파수신을 통해 오카 경찰부장은 대본영의 지시사항이나 전황보고를 알 수 있었고, 강화협상이 본격화한 것도 알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면 조선반도가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분할 점령될 것이라는 대본영의 예상도 수신했기 때문에 오카는 조선의 장래가 밝지 않다는 투의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1945년 4월 초 한반도가 전선화할 것에 대비하여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요시찰 조선인에 대한 처리방침을 극비리에 각 경찰서로 통보했다고 한다. 그때 황해도 송화(松禾)경찰서장이던 윤우경의 기억에 의하면 그 요지는 대강 이러했다. ①소련군이 한반도에 침입하면 공산계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라. ②미· 영군이 상륙하면 민족주의자를 예비검속하라. ③전선이 경찰서에 가까와질 때는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겨라. ④후방으로 옮길 여유가 없을 때는 적당한 방법으로 처치하라. 윤우경은 “이 극비친전 봉투는 2중으로 되어 있었고, 서장만이 보고 보관하라고 적혀 있었다. ‘적당히 처치하라’는 대목은 살해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고 회고 했다. 조선인 경찰관에 집중된 보복 해방은 일제경찰에 대한 보복사태를 불렀다. 일제 36년의 잔혹한 탄압을 생각한다면 그 보복의 정도는 만주나 중국에 비해 지극히 온건한 것이었다. 북한보다도 남한에서의 보복이 더욱 온건했다. 보복의 표적은 당연히 일제경찰이었다.「조선총독부종정(終政)의 기록」(山名喜男)에 따르면 8월 16일에서 23일 사이 조선에 있는 경찰관에 대한 폭행·협박 등 사건은 177건이 발생했다. 177건 가운데 조선인 경찰관에 대한 보복행위는 111건으로서 일본인 경찰관에 대한 보복건수보다도 훨씬 많았을 뿐 아니라 조선인 일반 관리들에 대한 건수(109건)보다도 많았다. 조선인 경찰관들은 주로 민중과 직접 접촉하는 말단들이었다. 따라서 원성을 많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과 동시에 조선인 경찰관들은 거의가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맞아죽는 이들도 생겼다. 충청북도에서는 일본인 경찰관은 한 명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지만 한국인 경찰관은 3명이 살해됐다. 전남 광주에선 한국인 경부가 맞아죽고 일본인 순사 한 명이 한국인으로부터 위협을 받자 자살했다. 경북에서도 한국인 경찰관 1명이 살해됐다. 일본인 관리 2명은 자결했다. 충남 공주에서는 조선인 고등계형사가 민중에게 얻어맞아 빈사상태에 빠졌다. 8월16일에서 25일까지 조선총독부에 보고된 보복성 피살자는 28명, 그중 6명은 일본인(2명은 경찰관)이었다. 조선인 피살자 21명 중 경원 1명이었다. 상해를 당한 67명의 조선인 가운데 40명이 경찰관, 구타당한 조선인 118명 가운데 경찰관이 67명이었다. 일제 탄압 구조의 하수인이었던 조선인 경찰관에 대하여 보복행위가 집중되었던 것은,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조선인 경찰관들의 행동을 짐작케 하는 자료다. 여운형 거부하고, 일제 계속 추종 여운형은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인 경찰권의 지휘권인수, ②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자 및 수형자의 석방, ③집회의 자유보장 등 약속을 받아낸 뒤 즉시 치안의 확보에 나섰다. 유도사범 장권(張權)을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장에 임명했다. 장권의 주위엔 많은 무도인과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8월 25일까지 전국 140여 개소에 치안대가 조직되었다. 중앙의 건준본부로부터 지시를 받아 조직된 것보다는 현지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더 많았다. 문제는 서울의 치안권 문제였다. 여운형은 정무총감 엔도가 당초 약속과는 달리 경찰권 이양을 거부하자 조선인 경찰관들을 동원, 경찰서 접수에 나섰다. 여운형에 호응한 종로서 보안주임 윤명운(尹明運) 경부 등 5,6명은 16일 오후 종로경찰서 등 4개서를 접수했다. 이들은 종로서 현판을 떼고 ‘한국경위대본부’란 큰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들은 일제 경찰제복을 벗어 던지고 ‘경위대’란 완장을 찼다. 조선인 경찰관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간혹 경찰제복을 입은 조선인들이 군중에게 뭇매를 맞던 분위기였다. 그러나 17일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첫째 조선인 경찰간부들이 여운형노선에 의구심을 갖고 윤명운(尹明運) 등의 친건준활동에 반발했다.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최연, 전봉덕 등 수십 명의 간부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여기서“여운형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하고 건준은 정부가 아니다”는 의견이 지배하여 “당분간 사태를 주시, 치안유지에만 전념한다”고 다짐하게됐다. 일본의 경찰과 군대도 경위대에 접수된 경찰서 탈환에 나섰다. 19일엔 일본군대가 서울시내에 투입됐다. 총독부는 이날 “여전히 총독부가 치안권을 갖고 있다”면서 “건준은 행정기관을 접수할 자격이 없다”는 성명서를 냈다. 달아났던 조선인 경찰관들도 조금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총독부는 조선인 경찰간부나 군수에게 경찰서장직을 넘겨주는 마지막 인사조처를 취했다. 일본군에 있는 조선인 장교는 해방이 됐는데도 조선군사령관의 명령을 받아 일군을 지휘, 치안유지를 하기도 했다. 조선인 경찰관들의 다수가 해방이 됐는데도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계속해서 일제의 충복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생리를 엿보게 하는 하나의 단서다. 권력에 빌붙어서 생존을 도모하는 데 이력이 난 그들은 자신들을 감싸주던 일제의 우산이 걷히자 도망갔고, 그 우산이 다시 펴지자 그 아래로 모여들었다. 이 우산을 잡은 사람이 일제에서 미군으로 바뀔 뿐 그 아래를 피신처로 삼은 친일경찰들은 그대로 남게 된다. 한국경찰의 가장 큰 폐단인 ‘권력의 도구화 전통’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방은 되어도 일제의 주구였던 경찰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귀환장병의 모임인 학병동맹과, 전문학교생이 중심인 조선학도대가 경찰서 재접수를 시도한다. 미군이 상륙한 직후인 9월 9일 학병동맹은 종로서 접수에 성공했다. 이에 자극받은 조선학도대는 성북서로 몰려갔다. 성북서장은 그 며칠 전에 파주군수에게 전보 발령되어온 서재식(전 한일은행장)이었다. 경찰서의 경비를 책임진 이는 일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 해방뒤 달아난 일본인 경찰을 채우기 위해 경찰관으로 급히 임명된 이(李)모였다. 조선학도대와 일본경찰은 총격전을 벌여 학도대원 2명과 경찰측의 최(崔)모 순사가 숨졌다. 이 동족상잔이야말로 남한에서 그 뒤에 벌어질 사태의 예고편이었다. 해방에서 미군 진주때까지 서울엔 세 갈래의 치안조직이 있었다. 경기도 경찰부장으로 있다가 해방 직후 종로서장이 된 최연은 ‘대조선경찰대’를 조직, 종로서에 본부를 두고 각 서의 조선인 경찰관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여운형의 경비대는 학생·청년들을 주축으로 하여 치안유지에 힘쓰고 있었다. 미군 진주가 늦어지자 달아났던 일본인 경찰관들이 소속 경찰서로 귀환하여 나름대로의 직무를 수행했다. 해방 뒤 조선인 경찰관 그룹의 지도자로 등장한 함경남도 출신의 최연은 당시 44세로서 가장 대표적인 고등형사였다. 혜산진경찰서의 고등게 형사로서 박달(朴達) 사건을 해결, 수백 명의 독립투사들을 잡아 가두고 그 공으로 경찰최고훈장까지 받았던 그가 해방 뒤 여운형이 영도하는 민족주의 세력을 기피, 일경편에 서서 권력의 향방을 놓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신이었을 것이다. 본명이 최영(崔鈴)인 그는 다카야마(高山淸只)로 창씨개명했다가 해방 뒤엔 최연(崔燕)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북한에서의 친일자 및 일제관료 처단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측의 행정권을 조선인민위원회에 넘기게 한 뒤 일본인 행정·사법관의 수뇌부 및 경찰관 등을 억류했다. 도에 따라서 사정은 약간씩 달랐지만 지사, 경찰부장, 경찰부의 각 과장은 공통적으로 억류되었다. 이들 중 범죄자로 분류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1945년말 만주의 연길로 보내져 수용되었다. 조선인 경찰관들은 모두 현직에서 추방되었고, 간부들과 고등계 형사들 중엔 억류되었다가 재판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소련군과 북한공산당측이 일본인과 조선인 부역자들에 대해서 실시한 수사 및 재판에 대해선 이런 자료가 있다. ‘악질 전직의 죄’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중 일찍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간 전 평안북도 내무부장 다카하시 히데오는 ‘억류개황보고서’를 작성, 일본정부에 제출했는데 그 요지는 이러했다 1945년 9월 2일 평안북도 임시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은 소련군의 명령이라면서 신의주에 있는 일본인 관민 유력자 40여 명을 소환하여 보안부 유치장에 집어넣고, 그날 밤 야마지 지사 등 12명을 전범이라면서 평양으로 송치하고 다음날 나머지는 풀어주었음. 1946년 8월 8일 평안북도 검찰소는 다카하시(전 평안북도 내무부장)와 다케오(전 평안북도 관공부장)를 다시 불러“일본인의 유력관리를 불구속 상태롤 조사하고 있는데 대해서, 조선인측 친일반동분자를 구속수사하고 있는 것과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비난이 있으므로 할 수없이 구속하겠다”면서 두 사람에 대한 보석을 취소, 신의주 인민교화소에 수용시킴.… 그뒤 10월 11일 두 사람은 기소됨. 기소요지는 “다년간 조선에서주요관직을 역임하면서 그 직무를 통하여 조선인민을 압박 착취한 것은 악질 전직의 죄를 구성한다”는 내용이었음. 10월 30일 평안북도 재판소는 다카하시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구형은 징역 2년). 12월 25일 다카하시 등 일본인 수형자 7명은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징역 2년 이하의 죄상이 가벼운 자는 석방한다”는 통보를 받고 석방되어 1947년 3월 일본으로 송환됨. …북한의 시·군·읍·면 인민위원회는 조선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해외망명가, 또는 한국내 형무소의 수형자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어 과거에 일본의 조선통치에 조금이라도 관여한 사람은 모조리 반역자 또는 친일분자란 이름으로 제거하고 있음. …신의주형무소에선 마사다(전 평북 경무과장)등 네 명의 일본인 관리가 복역중 영양실조 등으로 사항했음. 지금 신의주형무소에는 야마시다(전 신의주지방법원장)가 징역 5년, 하다마(전 신의주 쌍엽국민학교 보도)가 징역 5년, 가시하라(전 정주경찰서 보안주임)가 징역 4년의 확정 선고를 받고 복역중임. 야마시다의 범죄사실을 ‘다년간 사법관으로서 조선인을 압박하고 특히 조선인 사상범(공산주의자·조선독립운동자)에 대하여 사형, 무기징역 등 가혹한 판결을 내린 악질전직의 죄’임. 하마다는 국민학교 보도시절 장난을 좋아하는 한국인 아동의 손에 달군 젓가락을 갖다대어 상해를 낸 혐의임. 이 범죄는 수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하마다는 그 잘못으로 퇴직했는데도 다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복수적인 처벌로 보임. 평양형무소엔 야마자와(전 평양복심검사장, 무기징역), 모리(전 평양복심 차석검사, 징역 15년), 모토하시(전 평양지방검사장, 징역 15년), 와타나베(전 평양지방 검사, 징역 3년), 쓰치(전 평양지방 판사, 불명), 아라다케(전 순천경찰서장), 고토(전 순천경찰서 고등주임), 사토(전 정주 헌병) 등이 복역중이거나 재판받는 도중에 있음. 사토는 삼일만세사건 때 정주에서 조선인 혁명가를 여러 명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한소중임. 20여 년 전의 행위에 대하여서까지 이를 추궁할 정도로 집요함. 신의주 경찰서의 경부, 순사부장 등은 소련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보내진 듯함. 일본의 조선통치시절 이에 협력했던 조선인은 조선인을 위하여 선의의 협력을 한 것인데도 북한에서는 그들을 반동분자니 반역자라고 부르면서 형무소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하고, 고향으로부터 추방하는 등 박해를 가하고 있으며, 이를 피해 남한으로 도망하는 사람도 늘고 있음. 이들에 대하여 장래 일본정부는 적당히 구제방법을 고려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도의상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됨.(모리타 요시오.『조선종전의 기록』자료편) 필자는 2년 전 일본에 가서 이 다카하시 노인(당시 75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다카하시의 할아버지는 1907년부터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다카하시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중학시절부터 이 할아버지 집에서 생활하면서 경성중학과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중에 이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대학 졸업식날 가장 친했던 한국인 친구가 하던 이야기를 그는 잊지 못한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너는 아마 도지사까지는 하겠지. 그러나 네가 도지사가 되었을 땐 아마도 조선은 독립할 거야.”다카하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조선인이 언제까지나 일보 지배를 받고 있을 민족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고등계 괴수가 첫 人事에 깊이 개입 1945년 9월 7일 미군은 인천을 통해 상륙했다. 이날 맥아더 사령부는 포고문 제 1호를 발표, 38선 이남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포고문은 또 종래의 행정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선언, 공무원들이 직장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이 포고문은 해방 뒤 민중의 보복이 두려워 숨어버린 조선인 경찰관들에게는 원대복귀 명령이 됐다. 당시 지방은 물론이고 경기도 경찰부에서도 조선인 경찰관의 출근율은 20퍼센트(왜경 90퍼센트)선을 맴돌고 있었다. 지방에선 복귀한 일부 악질 친일경찰관들이 경찰서를 점거하고 있던 주민자치적인 보안대원들에게 붙들려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조선인 경찰관들의 복귀가 거의 마무리된 것은 미군진주가 끝난 10월 중순이었다. 미군정 당국은 경찰권을 총독부로부터 인계받고도 친일경찰관들을 제거하기는 커녕 그들을 중용했다. 이 조치는 친일파의 득세를 보장한 출발점이 되었다. 9월 9일 일군과 항복조인을 마친 하지 사령부는 총독부 수뇌부를 해임한 뒤 14일엔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와 오카 경기도 경찰부장 등 경찰 간부들을 해임했다. 미군정 당국의 경찰행정 책임자는 헌병대장인 시크, 경기도 경찰부장에는 스털링 대위가 취임했다. 스털링 대위는 맨 처음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의 임명작업을 벌였다. 이때 인선작업에 깊게 관여한 것은 스털링 대위와, 해임된 뒤에도 한동안 보좌역으로 근무한 오카 전 경기도 경찰부장 및 종로서장 최연 등 세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서울 시내 10개 서장으로 임명된 인사는 모두 일제때 경찰관과 관료 출신이었다. 종로서장 이성실(李聖實), 중부서장 손석도, 동대문서장 김정제(金正濟), 성동서장 이희상(李熙祥), 성북서장 김일석(金一錫), 서대문서장 최운하(崔雲霞), 마포서장 박주식(朴朱植), 용산서장 김정채(金貞彩), 영등포서장 윤명운, 창덕궁서장 변종현(邊宗鉉).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내 21개 경찰서장들도 반이 신인, 반은 일제경찰출신으로 임명되었다. 경기도 경찰부의 과장으로 임명된 이들도 전부가 일제 때 경찰 간부였다. 인사권을 쥔 경무과장에 최연을 비롯, 보안과장 전봉덕, 형사과장 홍병식, 정보과장 한승린(韓承麟), 건축과장 정덕현(鄭德鉉), 경제과장 문형식(文亨植), 소방과장에 김정배(金晶培)등이었다. 일반의 지탄을 가장 많이 받던, 독립국가라면 민족반역자로서 피고인석에 앉아야 할 고등계 형사 최연이 인사의 실무자인 경무과장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그뒤 북한에서 내려온 친일경찰 등 왜경간부들이 군정경찰로 대거 들어오는 창구 역할도 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