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마 18:21-35)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추석을 앞두고 있습니다. 명절이라고는 하지만 옛날처럼 명절 분위기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면서 마냥 즐길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19 팬더믹은 많은 것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모이지 못하여 명절도 제대로 지낼 수가 없었고, 사회관계도 새로운 형식으로 맺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전통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새로운 가치관,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이라고 해도 가족이 만나는 것보다는 긴 연휴가 보너스처럼 생겼다고 생각하고 여행을 하거나, 개인적인 휴가를 보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기후변화도 새로운 질서와 사회관계를 요구합니다. 예전과 같이 계절에 따라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농업, 어업이 바뀌고 있고, 보통의 경제활동도 바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고,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것에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위기감입니다. 변화는 의식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나 때는 말이야’ 혹은 ‘옛날에는’ 같은 말이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로운 질서 속에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위기 때는 대부분 ‘혼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게 됩니다. 하지만 혼자 살아남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은 모두가 함께 망하는 길입니다. 위기일 때 함께 헤쳐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식민지로 삼아 주권을 빼앗았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이들은 자발적으로 친일 행위도 하고, 어떤 이들은 무기력하게 순응하여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은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저항운동을 하였습니다. 식민지체제에 순응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안전보다 나를 되찾고 우리 민족이 더불어 사는 것을 꿈꾸었기에 독립투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국가는 그분들을 존경하며 훈장을 수여하고, 그 뜻을 후손들이 기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위기 때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위공직자로 임명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8년 정부수립일이라고 말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일본 국적이라고 하는 말은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일본 국적을 가지고 일본에 저항하니까 반정부세력, 반국가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주장대로 독립운동가들은 테러리스트라는 말입니다. 또한 건국이 정부수립으로 완성되었다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주권을 주장하며 세운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헌법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이 또한 일본이 우리나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주장입니다. 정부도 없고, 국가도 없는 미개한 조선을 식민지 삼아 근대화시켰다는 일본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또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부패하고, 무능하고, 약하여서 나라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약한 나라는 침략해서 주권을 빼앗아도 되는 것입니까? 어떤 말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해도 그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고, 국민의 자긍심을 짓밟는 매국 행위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공직에 임명할까요?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용산 대통령실 안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추천하고, 임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부정하지 말라, 친일 행위를 멈추라고 하면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머물러 있다고 비난하는 정부 인사들이 있습니다. 일본하고 대결해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일본이 사과를 많이 해서 피로감을 느낀다고도 합니다. 형식적인 사과의 말보다 그들의 마음이 중요하다고도 합니다. 일본이 식민지배의 부당함과 강제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 마음에 진정성이 있다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 마음이 어떤 것일까요?
히틀러 나치 정부가 무너지고 난 뒤 유대인 포로수용소 벽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forgive, not forget.’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유대인 수감자가 쓴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복수를 다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수하는 대신 용서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용서하지만, 이 일을 잊지는 말라고 역사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식민지배를 받으며 온갖 고초를 당하고 수탈을 당했습니다. 4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국민들은 모든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자유도 빼앗겼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일본에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잊지 않고 역사로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잊어버리자’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시대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우리나라는 1948년에 시작된 새로운 나라라고 하자고 합니다. 자기 부모는 나라도 없던 떠돌이였습니까? 아마 살아남기 위해서 친일을 하든, 식민지배에 순응하며 출세를 꿈꾸던 사람들이었겠지요. 조금이라도 저항 의식이 있었다면 일본의 주장을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비판한다고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빨리 2년이 지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이기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를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용서한다고 하면 과거를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인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없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잘못을 비난하지 않고 같은 인류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잊지 말라는 것은 같은 범죄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은 쉽게, 빨리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범죄, 독재정부의 범죄를 쉽게 잊어버리니까, 친일파가 생겨나고, 독재에 협력하고, 독재 권력을 가진 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역사학자가 말했듯이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범죄에 대해 복수하는 것은 폭력의 무한 반복이 될 뿐입니다. 용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범죄는 공동체의 질서와 규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하는 것도 인류 공동체의 규칙과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계속 전쟁하고, 복수하며 지낼 수는 없습니다. 용서하고, 공동체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은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입니다. 지도자는 공동체 구성원이 실족하지 않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 잘못한 이가 있으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15-20절에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질서와 규칙을 위해 법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의 본문처럼 법으로 다스리기도 하지만, 공동체는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잘못한 이도 너그럽게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일반 사람은 세 번 정도 용서하면 많이 용서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를 말합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충분한 용서 횟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무한 용서입니다. 공동체에 남기를 원하면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왕이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있는데 갚을 능력이 되지 않아 그 빚을 탕감해줍니다. 일만 달란트는 아마 17만 년 치 연봉쯤 됩니다. 그 많은 빚을 탕감받았는데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협박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가두었습니다. 이것을 본 이웃들이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임금은 노하여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을 불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도록 합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은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탕감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작은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미워하고, 욕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음을 깨달을 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입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 이웃이며 형제자매입니다. 누가 잘못을 하면 주님의 사랑 받은 자로서 그들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 공동체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본에 복수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본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또다시 이웃 나라를 공격하고, 능멸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이웃과 형제자매의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아 주님을 닮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