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성령의 사람이다. 성령께서 지혜와 위로를 주신다. 성령의 지혜와 위로가 없이는 사역을 이겨낼 수 없다. 세상의 본질은 무책임하고 가진 힘을 악용한다. 무책임은 어두컴컴할 때 나온다. 군중 속이나 익명성을 가지고 짐승처럼 활동한다.
본문에 군중들이 바울을 거의 광기로 죽이려 한다(22, 23). 사람들이 군중 속에 있으면 무책임해지고 익명성 속에 거하면 난장판 된다. 반대로 익명성을 제거하고 자기 이름을 가지고 살면 절대 깨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한다. 군중 속에 숨어 있지 말고 너의 고백을 하라는 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고백하는 게 중요하다. 익명성 속에 숨어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중세 이후 유럽이 망가졌을 때 키에르케고르가 믿는 척만 하지 말고 ‘신 앞에 단독자로 서라’고 말한다.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을 가지고 살자. 크리스천이라는 이름. 이름 없이 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무책임 하려는 것. 반드시 무너진다. 성령의 지혜는 이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그럼 가치 있는 인생이 된다.
힘은 좋은 관계에 써야 한다. 천부장이 힘을 남용한다. 로마의 세네카는 ‘힘이 정의고 진실’이라고 말한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던 것은 ‘네가 왕인데 왜 그 꼴이냐는 것’. 왕이면 힘을 발휘하고 대적을 심판해야 하는데 왜 끌려와서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놓여 있느냐는 것이다. 이게 로마적인 세상의 시각이다.
천부장이 바울을 구출해 끌고 와서는 먼저 물어보고 잘못했으면 때려도 되는데 때리고 나서 이유를 밝히려 한다. 그래서 세상은 억울한 것이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한다. 사람은 이유를 묻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약자를 다룬다.
그때 바울이 이 질서를 깨기 위해서 자신이 로마의 시민임을 밝힌다. 자기를 보호하려 했다면 예루살렘에 오지도 않았다. 힘을 남용하니까 세상이 무엇인지를 폭로한 것이다. 힘을 약자에게 마구잡이로 썼던 천부장이 허망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인다. 천부장은 돈 주고 시민권을 샀는데, 바울은 나면서부터다. 나는 진짜이고 너는 가짜라는 것. 세상의 힘은 또 다른 큰 힘이 오면 아무것도 아니다(27-29).
무책임이나 익명성, 군중에 머물지 말고 이름을 가지고 책임지고 살아야 한다. 복음 안에서 성령의 지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숨어 있지 않고 빛 가운데로 나와 항상 책임지는 자리로 간다. 에브라임은 강성한 지파였으나 전쟁의 때 책임지지 않았다(시78:9). 힘이 없어도 책임지면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세워 주신다. 이게 성령의 지혜다. 진짜 힘은 약자를 돕고 섬기며 사명으로 사는 것이다.
이게 복잡하다면 성령의 지혜는 말씀 따라 살면 된다. 말씀 따라 살면 질서도 잡히고 피아 식별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는 예배를 보면 안다. 계속 말씀의 원리대로 살면 진짜와 가짜가 갈라지게 된다. 바울이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부활을 증거하니 그 안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갈라진다.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 그 복음을 따라오는 제자들이 있고 아닌 것은 다 가짜다.
거룩은 구별됨인데 거룩에 대한 판별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거룩함과 거룩하지 않음이 갈라진다.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신실하게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 그래서 남는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들이다. 인간은 거룩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말씀만이 거룩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6-8). 부활을 증거하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가 확실히 나누어진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만 전하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 줄 안다. 기도하는데 기도 안 하고 사라지면 가짜다. 전도하면 진짜고 이리저리 피하면 가짜다. 가짜를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짜 되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럼 다시 동참하고 변화되고 거룩한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비췰 때 감사하고 겸손하고 예배하는 사람이 진짜다.
주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계속 비추게 만들어 주면 진짜는 돌아오게 되어 있다. 바늘과 실처럼 말씀이 앞서 가면 걸려 있는 실은 따라간다. 말씀이 가는 대로 움직이면 수도 놓을 수 있고 기가 막힌 옷감도 만들 수 있다. 바늘 없이 실을 밀면 뒤죽박죽 엉키고 실패하는 인생 된다. 인간이 앞서 봐야 아무것도 안 된다. 말씀 따라 사는 것이 지혜다.
또 하나, 성령의 위로다. 힘은 성령께서 함께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데서 온다(행9:31). 성령께서 힘을 주셔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과 기름 부으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방. 오늘 주님이 바울을 찾아가서 위로하신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현실이 된다(요1:12, 계3:20).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23:11) 로마에 가서 증거한다라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안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와 심방을 먼저 받아야 그 힘 가지고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을 하나님의 위로와 성령의 지혜로 이긴다. 하나님의 위로에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