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185 (5권 6. 김홍신. 펌글)
전화를 걸고 난 병규는 조금 후에 연락이 올 거라며 담배를 뻑뻑 빨아댔다.
녀석의 심정도 몹시 착잡한 듯싶었다.
머리를 말리느라 부산을 떠는 미스 김의 목덜미에 퍼런 멍자국이 여러 개 보였다.
아마 몸은 형편없을 것 같았다.
마약과 이상한 환각제를 강제로 투입하고 월급과 몸파는 값을 가로채는 수법을 사용할 정도라면,
보통 악독한 무리들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일본인이 아닌 다른 나라 여자를 그 지경으로 이용하는 것은 언어 소통이 안되는 외국 여자들이,
행동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과 여권을 감추어 놓으면 아무것도 못할 거라는 계산 때문일 것 같았다.
"미스 김, 한국대사관이나 공관에 도움을 청한 생각해 봤나요?"
미스 김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물론 생각해 봤어요. 첨엔 도망치더라도 대사관에 가서 그런 얘길 못할 것 같았어요.
나중에 그런 것보다 우선 이곳에서 도망만 갔으면 싶었지만 워낙 감시가 심해요.
화장실 갈 때도 따라붙을 정도예요. 그리고 집의 구조가 도저히 빠져나갈 곳이 없게 만들어져 있어요."
"다른 여자들도 그래요?"
"아녜요. 일본 여자하고 미국 여지들은 출퇴근을 해요. 필리핀 애들과 나만 그랬어요. 다른 여자들이야 월급쟁이 그대로지요."
그녀가 당한 참을 수 없는 수모는 다 적을 수가 없었다.
이건 사람 취급이란 도무지 받지 못한 여자였다.
섹스의 도구로써 매일매일 육체를 뜯어 먹혔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나 좀 누워 있어도 되죠?"
"그래요."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누웠다. 가련한 계집애였다.
병규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지경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꽤 이런 풍습에 익숙해 있었지만 이렇게 악랄한 변태영업장에서,
한국 여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며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실토했다.
"나도 한국 사람이잖아요."
"그건 네가 한국인이 아니고 일본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탈을 썼다면 말이다."
"형님하고 같이 행동하겠어요."
"내가 일본 말만 할 줄 알면 널 보내줬을 거다. 너까지 끌어넣고 싶진 않아."
"후루가와 두목한테 허락을 받은 몸입니다. 형님이 떠날 때까지 나는 대화단의 야쿠자가 아니라 형님의 수행원입니다."
"알다가도 모를 게 후루가와란 인물이다. 내게 그런 호의를 베풀만한 이유가 없잖아?"
"차차 알게 되겠죠. 명색이 대화단의 두목입니다. 보통 그릇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됩니다."
"글쎄다."
우리들이 얘기하는 사이에 미스 김은 잠들어 버렸다.
"여권 찾으면 바로 보내자."
"정 어려우면 이시하라 두목에게 숨겨달라면 됩니다. 후쿠오카에선 이시하라 두목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두고 보자."
전화벨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병규가 전화를 받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 말로 지껄였다.
"그 자식들 보통 강심장이 아닌데요. 건달들 데려다 배치하고 형님을 찾겠다고 난리랍니다. 이 호텔도 위험하답니다."
"그래서?"
"옮기죠. 귀찮으니까요. 내가 잘 아는 곳이 있어요. 애들한테 뜨이지 않을 곳이죠. 저 친구는 일단 이시하라 두목에게 맡기죠."
"그래라."
병규는 또 지껄였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차가 금방 올 겁니다. 여기 호텔은 애들이 계산할 겁니다. 서두르죠."
우리는 미스 김을 깨워 가방을 챙겼다.
아직도 졸린 듯이 힘없이 걷는 미스 김을 보면서 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보여 주리라. 더러운 일본 놈들에게 내 솜씨를.
호텔 밖엔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병규가 약도를 대충 설명하는 눈치였다.
이시하라 두목이 사건을 해결할 때까지 미스 김을 맡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다.
한적한 지역에서 우리를 내려 준 차는 미스 김만 싣고 갔다.
조금은 불안해 하는 미스 김에게 나는 반복해서 설명해 주어야만 했다.
우리가 당분간 머물게 된 것은 변두리의 양옥집 이층 방이었다.
깨끗하고 조용해서 오히려 호텔보다 푸근한 생각이 들었다.
주인 내외는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병규와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안 들어오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를 남기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타고 가는 편이 훨씬 안전했기 때문에 승용차를 돌려보낸 것이었다.
병규는 약도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 하카다 지역의 지도를 챙겨넣었다.
"뒷골목으로 가면 돼요. 거기서 한잔 하면서 극장으로 감쪽같이 들어갈 수 있는 루트를 찾거나,
아니면 당당하게 손님처럼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미스 김이 얘기한 꽉 막힌 구조라면 당당하게 들어가 화장실이나 창문을 통해 침입해야죠."
"침입이 아니라 공격이다."
"차가 없어도 될까요?"
"차보다 오토바이가 한 대쯤 있으면 좋겠다. 골목길로 튀려면 말이다."
"그럼 애들 보고 한 대 갖다놓으라고 하죠."
"그래 봐. 극장 근처 약국 앞이면 좋겠다."
"걱정 마세요. 우리 애들도 그런 건 도가 텄으니까요.
시동 걸어 놓고 주뼛거리는 체하면 우리가 한방 갈겨 버리는 겁니다.
녀석은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고 우린 그걸 잽싸게 타고 튀는 거죠."
"역시 꾼은 다르구나."
"잠깐 전화부터 해 놓죠."
병규는 공중전화로 달려가 전화를 걸고 왔다.
"덤비는 애들 모두 꺽어 앉히고 손 털며 나오는 건 어떠냐."
"형님, 그건 위험해요. 숨어서 총으로 갈기는데야 당할 재간이 없죠."
"좋다. 나도 명 좀 길어보자. 이 험한 바닥에 와서 개죽음이야 당할 수 없지."
우린 택시를 타고 극장 근처에서 내렸다.
우리가 또다시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극장의 바로 뒷골목으로 들어선 우리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뒷골목에서 극장 쪽으로 숨어들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형님, 머리가 길어서 이방인이란 표가 대번에 나요. 여기서 활동하려면 머리를 깍는 게 어때요?"
일본 애들은 머리가 대체로 짧은 편이었다.
나처럼 머리 길이가 긴 사람은 쉽게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친 놈이 아니고서야 일본에 와서 머릴 어떻게 깎냐? 단발령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일본 놈에게 어떻게 내 머리통을 맡기겠니? 차라리 땋아내리지."
"형님두 차암."
병규 녀석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녀석도 머리가 짧은 편이었다.
"술 한잔 하자더니 왜 찻집으로 왔냐?"
"맨정신으로 공격해도 위험한데 뭐하러 술을 마셔요? 일 끝나고 살아 있으면 매일 마실 수도 있는데."
"좋은 데가 있냐?"
"핑크룸이라고 볼 만한 데가 있어요."
"얼마나 좋아서 핑크룸이냐?"
"요쪽 골목으로 주욱 내려가면 소녀시대(少女時代)라고 하는 핑크룸이 있어요.
종이로 만든 교복 있죠, 세일러복이라고 하는 거요. 계집애들한테 그걸 입혀 놓고 술 파는 데가 있어요.
술값만 조금 올려 주면 술값만큼씩 그 옷을 찢어가며 마시는 데죠."
"벼락 맞을......"
나는 이렇게 욕지거리를 했다. 병규가 벌큼벌큼 웃었다.
"조금 일찍 왔으면 노팡키사라고 하는 찻집을 구경했을 텐데요."
"노팡키사? 손님마다 키스해 주는 데냐?"
"한창 유행하다 사라졌는데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미녀들이 팬티도 안 입고, 정말 속에 아무것도 안 입고 시중들고 하는 데였죠.
커피 값이 이십 분 앉아 있는데 천오백엔에서 이천 엔 정도씩 했죠. 이십 분 넘으면 나가든가 한잔 더 시키든가 해야 돼요."
"본받을 만한 나라다. 정말이냐?"
나는 의심스러워 물었다.
"대유행였어요. 지금도 관광객이 많은 지역엔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극장을 공격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늦은 시간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화장실 창문이 어떻게 생겼지?"
"환풍기 달린 것 같았어요."
"그거 뜯어내려면 드라이버가 있어야겠지."
"걱정 마세요."
병규는 호주머니에서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칼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쑤시개까지 달린 다목적용 칼이어서 드라이버는 물론 줄칼이나 쇠톱 같은 것도 달려 있는 것이었다.
"슬슬 가볼까?"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좌우를 둘러보지 마세요. 그냥 구경꾼처럼 자연스럽게 들어가야 돼요."
"알았다."
우리는 찻집에서 나와 골목길로 해서 극장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극장의 맞은편 약국 앞엔 오토바이를 손질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만지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병규가 가볍게 손을 들자 오토바이 옆에 서 있던 사내가 씨익 웃었다.
"저 녀석 칠 땐 진짜 갈기지 말아요. 형님 주먹을 되게 겁먹고 있는 애들이니까요."
"알았다."
녀석은 치밀한 데가 있어서 주의사항도 많았다.
천천히 걸어서 극장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극장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내려서자 실연 쇼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바싹 무대 쪽을 쳐다보고 있었고,
조명실의 불빛은 여자의 나신이 잘 보이도록 불빛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바로 갑시다."
병규는 나를 화장실로 잡아당겼다.
"들어오는 녀석 있으면 한 방씩 갈겨 버려요."
병규는 통풍구의 환풍장치를 재빨리 떼어냈다.
겨우 빠져나갈 만큼 구멍이 뚫렸다.
나는 병규의 다리를 받쳐 주었다.
병규가 날렵하게 넘어갔다.
나는 겨우 빠져나갔다.
환풍기를 들어올려 임시로 구멍을 막은 뒤에 좁은 통로를 빠져나갔다.
무대 옆의 대기실 창문으로 여자들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스 김이 알려 준 지하실은 굵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형님이 맡아요."
병규가 자물쇠를 만져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병규가 내민 칼을 받아들고 자물쇠 구멍에 맞추어 보았다.
"안 돼. 철사 찾아봐."
두리번거리던 병규가 가는 철사를 찾아왔다.
열쇠구멍에 끼우고 몇 변이나 흔들었지만 꿈쩍도 안 했다.
"할 수 없다. 분해하자."
나는 자물쇠를 조심스럽게 분해하기 시작했다.
용수철이 튀지 않도록 움켜진 채 칼 끝과 송곳으로 자물쇠를 분해했다.
절집에서 동주 형한테 자물쇠 분해하는 걸 배운 뒤로 한번도 써먹어 보지 않았던 실력이었지만 궁하니까 써먹을 수 있었다.
"형님한테 반했소."
병규가 이빨을 내보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