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참고말씀: 창38:17,18; 삼상20:3; 시37:23,24; 잠4:16; 24:16
읽을말씀: 욥17:1~16
주제말씀: 욥17:3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 보증물(保證物)을 주시고 나의 보주(保主)가 되소서!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욥17:3)
친구들마저 자신을 계속 조롱(嘲弄)하고 충동질하자,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2절), 욥은 지칠 대로 지치고 쇠해질 대로 다 쇠해져갔습니다.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1절 상) 죽음의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진 채 말입니다.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1절 하)
그렇지만 욥은 다시 용기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보증(保證)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즉 담보물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3절 상) 여기서 담보물(擔保物)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는 법정상이나 상거래(商去來)에 있어서 쌍방 간의 계약(契約)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제시하던 물적 징표, 즉 보증물을 의미합니다.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창38:17,18)
또한 그는 오직 누구만이 자신의 손을 잡아줄 수 있으며, 오직 누구만이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증거 해 줄 수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3절 하) 즉 하나님만이 자신의 죄 없음을 증언(證言)해 주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고소장(告訴狀)을 낱낱이 조사하여 위증(僞證)과 무함(誣陷)에 상응하는 대가(代價)를 치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개역성경은 이 부분을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 ‘손을 친다’는 말은 법적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행위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칠 대로 지치고 쇠해질 대로 쇠해진 상황에서, 심지어 죽음과의 사이가 한 걸음뿐(삼상20:3)이라고 할지라도, 욥과 같이, 다시 일어나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용기를 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3,24) / “오직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잠24:16)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꾸준히 가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욥 17:9)
욥은 자신이 백성들의 속담(俗談)거리로 전락하고, “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속담거리가 되게 하시니...”(6절 상)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6절 하) 항상 수심(愁心)에 잠겨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질병(疾病)과 고난(苦難)으로 심신(心身)이 매우 허약해진 상황 등을 되짚어 봅니다.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7절)
그러면서도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9절 상) 사실 이 부분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문맥상 조금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차라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어쨌거나’ 등의 접속사로 번역했더라면 더 매끄러웠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참고로, NIV 영어성경은 이 부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어쨌거나’라는 뜻을 가진 'neverthel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복음성가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의 가사처럼,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라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즉 아무리 상황이 암담(暗澹)하고 비록 출구(出口)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은 계속해서 주의 길을 걸어가리라는 결의를 내보인 것입니다.
주께 점점 더 힘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과 함께 말입니다.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9절 하) /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4:16)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물론 여전히 고난의 극심한 중압감(重壓感)에 짓눌려 힘겨워 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욥이 끝까지 자신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순전함을 지키고 있습니까? 주의 길로만 나아가고 있느냔 말입니다. 제아무리 비바람이 앞길을 막고, 눈보라가 앞길을 가리며, 험한 파도와 모진 바람 등이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