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 도사
노창진
고등학교 동창생 중에 달마 도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사십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였든 것 같다.
땅딸막한 체구에 유난히 크고 잘생긴 머리통을 갖고 있는 친구였다.
머리가 자꾸 빠지면서 그 크고 잘생긴 머리통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넓은 이마도 점점 튀어나오며 커지는 것 같았고, 그림 속 달마를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았다. 머리 전체가 빤질빤질 빛까지 나기시작하자 더욱
더 그랬다.
누구의 입에서부터인가 달마라는 별명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그 친구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다. 모자를 쓰면
(더 더워서 머리가) 더 빠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너 모자를 자꾸 쓰니까
머리가 더 빠지는 것 아니냐?' 하고 내가 말하면 그는 그때마다 "모자를 써서
빠지는 게 아니라 머리가 빠져서 모자를 쓰는 거다 너 내 심정 알기나 해"
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모자를 벗어버렸다. 그러자 "달마"라는
그의 별명은 급속도로 서울과 대전으로 번져갔다. 동창들만이 아니라
주변의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번져갔다.
햇볓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산에 오를 때는 어쩔 수없이 모자를 썼다.
달마는 매주 일요일마다 가는 북한산 산행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대남문
으로 올라가 보현봉을 돌아 사자능선으로, 사자능선이 통제 되면서부터는
문수봉, 암문, 비봉능선으로 내려오는 정도는 보통이였고, 때때로 북한산성
을 따라 백운대를 거쳐 우이동으로, 또는 대서문으로 내려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신록이 짙어가는 늦은 봄 어느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동창생 십팔 명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3 -40분쯤 걸었다. 땀이 나고 목이 칼칼해지자
언제나처럼 시원한 막걸리 몇 잔씩 마시고 또 오르기 시작했다. 달마가
내 옆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이야기하다가 헉헉대며 힘들어 했다.
깔딱고개를 오르는 중이었다. 쉴만한 곳은 이미 다 등산객들이 차지하고
있어, 우리 두 사람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오르막이 끝나고 평평한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과 한 쪽 들고 가세요."
넓은 바위위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반기는 두 여인이 있
었다. 50대 초반쯤으로 한 여자는 날씬하고 화사하게 보였고, 또 한 여자는
좀 똥똥한 편인데 표정도 과묵하게 보였다.
아침에 처음 만났을 때는 별로였는데 세 번째 만나서인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였다.
이들과 처음 만난 것은 광화문 교보 앞 버스정류장이었는데 "북한산 가려는
데 어떻게 가느냐?" 고 묻는 바람에 함께 버스를 타고 구기터널 앞까지
와서, 대남문으로 가는 코스를 자세히 일러 주었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난것은 내가 우리 일행과 함께 30분쯤 올라 왔을 때였다. 구면이라고
반가워하는 것을 몇 마디 주고받다가 그냥 앞질러 왔던 것인데, 우리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동안에 여인들이 우리를 지나쳐 갔었나보다.
하루에 세 번이나 만났는데 사과 한쪽 얻어먹어도 될 것 같았다.
"야, 달마 우리 사과 한쪽 먹고 갈까?"
내가 화사하게 웃는 여인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달마가 바짝 따라오며
내 귀에다 소근됐다.
"누구야, 아는 사이야? 괜찮은데..."
"달마! 모자나 벗어!" 나는 명령하듯 큰소리로 말했다. 달마는 바보처럼
멋쩍게 헤헤 웃으며 모자를 벗었다.
반들반들 빛나는 머리는 물을 뒤짚어 쓴 듯 땀방울이 숭숭 솟아 있었다.
"잘 봐요. 달마 도사님이십니다."
나는 장난기를 숨긴 채 엄숙하게 여인들에게 그를 소개하듯 말했다.
별로 말이 없던 과묵하게 보이는 여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마를 향해
합장을 하고 정중하게 절을 했다.
달마는 어쩔 줄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그 여인이 하는 것처럼 합장을
하며 답례를 했다. 나는 이 갑작스러운 광경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렇
다고 웃을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사과 한 쪽을
권하려든 화사한 여인도 입만 딱 벌리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보리달마(菩提達磨) 가 소림사 절벽 앞에서 7년 간 기도하고 혜가(慧可)
선사에게 부처님의 급란가사를 인계하고, 죽은지 얼마 후 누군가에 의해
신발 한 짝 들고 훨훨 서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데--나는 그 달마가
갑자기 생각났다.
달마 대사가 지금 내 친구 달마에게 환생되어 나타난 것은 아닐까?
전생은 기억할 수 없다니 모를 일이지만,
지금 불심이 깊은 이 조용한 여인이 그 달마 대사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그렇다 해도 환생한 그 대사가 내 친구 달마 도사인지는 내
친구 달마 자신도 모르는 일이겠지.
나는 갑자기 또 짓궃은 생각이 들었다.
"야, 달마야! 너 달마가 왜 동쪽으로 왔는지 알아?"
오래전부터 언젠가 한 번은 달마에게 말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리
고 달마라는 별명을 가진 너는 최소한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도 명쾌
히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러주고 싶었다. 달마는 한참을 망서렸다.
과묵한 여인은 달마의 입만 주시했다. 내가 달마를 난처하게 만든 건
아닌가 후회하고 있을 때, 달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겠는데......"
달마는 짧게 대답했다. 어처구니없는 이 짧은 대답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조용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정말 선문답(禪門答) 같은 훌륭한 명답이시네요. 옛날, 옛날 달마 대사님이
시기하는 사람들을 피해 서역으로 돌아가실 때
"내가 왜 동쪽으로 왔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후회하셨을 지도 모르잖아요.
대사님이 스스로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숨을 거두었다니"
그녀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금세 울어버릴 것 같은 애처로운 이 여인의 목소리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달마에 대해서 어쩌면 그렇게 깊이 잘 알고 있단
말인가. 이 여인 앞에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달마(菩提達磨) 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마음이, 이심전심
(以心傳心)으로 지금도 우리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달마 귀에 가만한 목소리로
"달마, 좋지!"
대사는 아니지만 너는 진짜 달마 도사야.
저 아름다운 여인도 너를 알아보잖아!
달마는 헤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