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 문정왕후 답사기
조선 왕릉은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2009년 6월 조선왕릉 42기 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孝)와 예(禮)를 갖추어 정성을 다하였다.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풍수 사상에 따라 최고의 명당을 선정하고 왕릉의 시설물을 주변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지도록 조성되어 있다.
왕릉 조성의 모든 절차와 관리 실태는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모범으로 삼고 있다.
현재까지도 조선 왕릉에서는 매년 산릉제례(山陵祭禮)를 행하면서 역사적 전통을 잇고 있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 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고 한다. 조선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조선 왕릉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가까이에서 살아 숨 쉬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태릉(泰陵) 하면 문정황후(文定王后)의 릉(陵)을 생각하기 보다는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육군사관학교와 태릉선수촌이다.
태릉(泰陵)은 조선조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문정왕후(文定王后) 성렬대왕대비(聖烈大王大妃) 파평 윤씨(1517년~1544년)이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산4-20번지에 있는데 이곳은 파평윤씨 15世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璠)을 중시조로 하는 정정공파의 묘역 96기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19世 윤지임(尹之任) 내외의 묘와 그의 아들 5형제 원개(元凱) 원량(元亮) 원필(元弼) 원노(元老) 원형(元衡) 과 정난정(鄭蘭貞)의 묘가 있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여러 번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 맏아들인 12대 인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왕비로 기억된다.
인종(仁宗)은 마음씨가 매우 온순하여 25년 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1544년 왕위에 올랐으나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어려서 죽자 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깊어 병을 얻었다.
1545년 인종은 왕이 된지 8개월 만에 병환이 위독하자 경원대군(慶源大君 : 뒤의 明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경원대군(慶源大君)이 문정황후(文定王后)의 아들로서 13대 조선왕 명종(明宗)이다.
문정왕후는 역대 왕비중 권력에 눈이 먼 가장 표독스런 왕비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인종도 문정왕후가 독살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명종은 12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문정왕후가 명종을 대신해 8년 동안 수렴첨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때에 윤원형(尹元衡)의 첩실인 기생출신 정난정(鄭蘭貞)이 등장한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조선조의 이념인 숭유배불(崇儒排佛)을 무시하고 불교중흥을 도모하였다.
도첩제(度牒制)란 승려가 출가했을 때 국가가 허가증을 발급하여 신분을 공인해 주던 제도를 말한다.
조선시대 왕은 27명인 반면 왕비는 48명으로 21명이나 더 많다.
이는 훗날 왕비로 추증(追贈)된 경우는 빼고, 왕비로 책봉됐으나 폐비가 되어
선원계보(왕실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왕비를 더한 수다.
태릉은 문정왕후가 권력을 휘둘렀던 생시를 반영하듯 단릉(單陵)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묘제에 따라 정확하면서도 웅장하게 만들어져 있다. 왕비릉이면서도 어느 왕릉보다 무게가 있고 안정되어 있는 대표적인 능이다. 무엇보다도 봉분에 운채(雲彩구름의 고운 빛깔)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 (屛風石), 상석(裳石)과 난간석이 모두 둘려져 있다.
능앞 양쪽에 있는 무인석(武人石)이 유달리 무게 있게 앞뒤로 볼륨이 크게 서있디.
태릉의 철책 넘어 북쪽에 강릉(康陵)이라는 쌍릉은 아들 명종과 며느리 인순왕후 심씨의 능인데 문화재청에서 공개하지 않아 답사를 못하였다.
태릉에는 사연이 있다.
사적 제201호인 태릉(泰陵)의 능호(陵號)는 1565년(명종 20)에 정하여졌다.
처음 중종의 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에 있는 지금의 서삼릉(西三陵)역에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와 같이 정릉(靖陵)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는 자신이 죽으면 중종 옆에 묻힐 계산으로 장경왕후(章敬王后)와 동원(同原)에 있는 중종의 정릉(靖陵)을 풍수지리가 안 좋다 하여 봉은사(奉恩寺) 곁에 있는 선릉(宣陵) 옆으로 옮겼다.
그런데 새로 옮긴 지금의 삼성동 정릉(靖陵)의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자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태릉에 묻혀 중종 옆에 묻히려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죽어서도 중종을 독차지 하려던 욕심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조선 왕릉의 숲이 다 아름답지만 태릉역시 울창한 소나무 단풍나무가 아름답다.
태릉앞 거리는 가장 걷고 싶은 거리로 선정된 화랑로다
깊은 가을에 물든 거리는 플라타너스 낙엽으로 깔려있다
능원(陵園)에는 가을색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 있고 빽빽한 소나무 중간 중간에 단풍나무가 아름다운 가을의 조화를 이룬다.
한적한 숲길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덮인 사이사이에 빨간 단풍잎이 아름답다
소나무 사이로 서산으로 넘어가는 햇빛이 신비로운 기운으로 비친다.
가을 숲속을 걷는 기분 태릉에서 느낀다.
☺농월